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21화 (121/142)

<-- 역습 -->                뭔가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빈 방 안에서 라일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황후의 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텅 비고 썰렁한 방이었다. 검은 머리의 여자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육체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언제나 천천히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효과는 없었다. 원래 제 짝이었던 영혼을 강제로 탈취당하고 다른 혼을 받아들인 육신은 언제나 빠르게 마모가 되었다. 그래서 한세기가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라일리아는 여러 사람의 육체를 탈취해야 했다. 가여운 영혼들. 그녀는 가끔 밤에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지만 그녀는 마녀였다. 기도에 진실성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넓은 방에 유일하게 있는 장식장에서 보석함을 꺼내어 열었다. 그 안에서 몇 개의 바다의 보석이 반짝였다. 몇개는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몇개는 원래의 바다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주 짙은 녹색으로 물든 것부터 파랑과 녹색의 중간을 띠는 것까지 다양했다. 라일리아는 그 중 가장 크고 짙은 색의 보석 하나를 꺼내 손 안에 쥐었다. 아마도 그 안에는, 아버지 레너드 볼프의 가장 따뜻하고 강인한 의식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죽어가면서도 그녀를 걱정했던 역사상 최대의 마법사.

“아버지.”

라일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지옥 같던 동왕국 멸망의 순간에서 빠져나오며, 아버지의 숨통을 스스로의 손으로 끊었다.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결국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숨을 거뒀던 아버지. 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기 전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바다의 눈물에 가두던 그 고통스럽던 순간. 실험조차 거치지 못했던 마법을 최초로 부친에게 시전하면서 라일리아는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그 마법이 실패했다면 레너드 볼프의 영혼은 이승과 저승 어느 쪽에도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성공했고, 그녀의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수로 깨져 보석 속으로 흡수되었다.

“....”

사방이 고요했다. 물론 바깥은 전혀 고요하지 않을 것이다. 슈엔 로마나를 시작으로 고위 귀족과 황족들을 중심으로 그 내부에서 예상할 수 없는 폭주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스스로가 위험인자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폭탄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도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

강박적일 정도로 세간살이를 줄여버린 빈방 안에서 황후는 무료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바다의 눈물에는 레너드 볼프의 의식의 끝자락 하나 정도는 들어갔을 테다. 물론 이 제국의 황자 에스트레드 로마나와 그의 반려 세리나 리엔의 결혼 예물에도 당연히 깃들어 있다. 라일리아는 그 보석을 보는 순간 아버지의 영혼을 느꼈다.

“나를 도와줄 건가요, 아버지?”

사실 지금 그녀 자신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여러 개의 의식의 파편을 만나면서 아버지의 의식들은 전부 쪼개져 괴리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다. 감정들도 조각조각 나뉘어졌고 지식과 논리도 부서졌다. 딸인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도 있었고, 마법을 배우던 십대의 그녀만을 기억하는 아버지도 있었다.

“나는 나의 딸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니...이제 와서 후회할 것도 없어.”

라일리아는 수경을 바라보았다. 잔잔했던 수면이 흔들리고 그 안에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열 서너살, 아주 예쁜 허니블론드에 양쪽 눈의 색이 다른 소녀였다. 그녀는 목에 아름다운 바다의 보석 하나를 걸고 있었다. 마지막 동왕국의 후계로써, 성장이 멈춰진 육체와 정신 안에서도 무너진 왕국의 마지막 유산을 지키려 했던 라일리아의 딸.

“그것도 이제 소용이 없지…”

에스트레드 로마나가 죽였다. 삼년 전, 동부 내란의 전쟁터에서. 세리나 리엔에게 그 바다의 눈물을 주겠다고 욕심을 부리며 라일리아의 어린 딸을 살해했다. 황후의 검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의 색이 검었다. 그녀의 창백하고 핏기 없는 뺨 위로 두줄기 검은 선이 그어져 내렸다. 라일리아는 천천히 양손 안으로 얼굴을 묻으며 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의 딸, 플라티나.”

*****

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서는 원한이 느껴졌다. 딸을 칭할 때 느낄 수 있는 흔한 감정은 결코 아니었다. 목소리, 레너드 볼프의 의식은 말을 이었다.

[라일리아는 아비인 내 의지와 인식을 수십조각으로 으깨어 바다의 눈물에 흩뿌려 넣었다. 그래, 지금 그대가 낀 반지에도 내가...나의 한 조각, 또다른 나, 완전히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성질의 무언가가 들어가 있지.]

세리나는 자신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내려다 보았다.

[너무 비싸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부서지거나 마모되지 않을 그런 보석을 찾다가 결국 바다의 눈물을 선택했지. 마나마저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보석이니 오죽 적합했을까.]

볼프가 껄껄 웃었다.

“그건 정말로...예상 외의 말이군요.”

[진실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지. 소설은 역사를 쫓아가지 못해.]

세리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왜 였는지 질문하면 대답해주실 겁니까?”

[물론이지! 어차피 옛날 일, 뭐가 문제겠는가.]

볼프의 목소리는 경쾌할 정도였다.

[나의 나라는 마법이 융성하고 풍요로운 나라였다. 크지 않지만 동시에 작지도 않았지.]

세리나 역시 동왕국의 역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나라가 무너진 지 오래된 후라 자세한 역사서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발렌1세의 무용담과 비슷한 류의 이야기책이 많이 나와있었기 때문에 대략적인 역사 정도는 알게 되었다. 물론 이야기책 속의 동왕국과 레너드 볼프는 끔찍한 악당과 지옥같은 나라였다.

[바다를 면하고 있고 기후도 온화해서 농사도 잘 됐어. 산맥이 아니고 들판이 많아서 사람들 성격도 온후했다. 마법사가 곧 귀족이고 힘이고 권력이었던 점이 다른 나라와 좀 다르긴 했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하지만 제국이 융성하면서 드디어 정복왕 발렌1세, 오, 그래. 그대 나라의 영웅인 그가 나타났지. 정복왕 발렌1세는 북과 서를 전부 멸망시킨 후 곧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어. 그의 침략으로 동왕국은 무너져갔는데 북과 서와 달리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 왜냐하면 마법사들이 온 힘을 다해 저항했으니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동부의 마법사들은 저항했다.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것이 귀족 계급인 그들이었기 때문에 발렌1세는 그 이후로 마법사들의 씨를 말렸다. 가뜩이나 마법사가 없던 제국 내에 마법사의 존재가 사라진 것도 그래서였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마법사였던 동왕국의 왕실, 볼프 가를 말살시킨 것도 당연힌 조치였다.

[얼음의 창을 뽑아낸 그가 나의 배를 꿰뚫은 채 왕실 홀의 벽에 한달 동안 박아놨었지. 나를 구하러 오는 왕실 후손들의 모든 핏줄들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몸 전체가 동면 상태처럼 얼어 있어서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다. 의식만이 느른하게 깨어있는 상태로 레너드 볼프는 자신의 앞에서 죽어가는 식솔들을 전부 지켜보았다.

아름다운 은발, 차가운 은청색 눈동자. 얼음 폭풍을 철갑처럼 두른 발렌1세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신처럼 왕실의 홀에 앉아 그들을 죽였다. 그의 발밑으로 시체가 쌓여갔지만 죽음의 증거인 피는 흐르지 않았다. 죽음과 동시에 얼어붙은 시체들은 전부 그대로 쌓일 뿐이었다.

[발렌1세는 에스트레드 황자와 참 많이 닮았었지.]

목소리가 웃었고 세리나는 흠칫 놀라서 남편의 앞을 슬쩍 몸으로 가로막았다. 그런 그녀를 깨닫고 볼프가 다시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달 뒤 발렌 1세가 그 창을 뽑았다. 내 몸은 천천히 녹으면서, 동상이 걸려 썩은 상태로 죽어갔지.]

‘아버지.’

아름다운 허니 블론드의 여자가 왕실로 뛰어들어와 울부짖었다. 그녀는 온통 피로 칠갑을 한 채였다. 오면서 얼마나 많은 제국군을 해치웠을까. 레너드 볼프는 희미한 시야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양손이 다 썩어들어간 상태였다. 너라도 빨리 달아나거라. 레너드 볼프는 다 망가진 성대로 속삭였다. 발렌1세가 곧 돌아올거야. 얼른 가렴.

엎드려 오열하던 딸은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손에서 검은 그림자의 창을 꺼내들었다.

‘아버지, 저는 이제 못된 짓을 할 거에요.’

딸의 색이 다른 양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반짝였다. 못된 짓? 레너드 볼프가 의아함에 올려다 볼 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딸은 그대로 그림자의 창으로 아비의 심장을 내리찍었다. 심장이 오그라들었다가 터져나가는 고통에 레너드 볼프가 헐떡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크게 뜨다가, 볼프는 그림자가 자신의 영혼과 의식을 난도질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눈길에 딸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버지…’

복수를 위해 아버지의 힘이 나중에라도 필요해요. 죄송해요 아버지. 볼프는 고통에 찬 신음을 삼키며 마지막 힘을 다해 평온한 얼굴을 가장했다. 지켜주지 못한 자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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