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20화 (120/142)

<-- 역습 -->                “공동묘지…?”

[그래. 만들어진 지 얼마 안되는, 아주 신선한 시체들이 가득한 공동묘지야.]

목소리는 시니컬했다. ‘우리들의’라고 말했지만 죽은 자들에 대해 애틋해하는 감각보다는 피로함이 더 큰 느낌이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거대한 공동이 있던 곳으로, 캐딜럿의 연구실의 자리다. 공동묘지 같은 것이 있었더라도 산사태와 함께 쓸려 내려갔을 것이다.

“여기가 공동묘지 위라는 겁니까.”

[그래. 기억이 안나는 모양이군.]

목소리가 웃었다. 방 안이 울렸다. 기분 나쁜 느낌에 세리나의 눈썹이 약간 찌푸려졌고, 이어서 목소리가 말했다.

[그대도 봤던 적이 있어. 그리고 지금도 볼 수 있어...보지 않으려 할 뿐이지.]

봤던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왔을때는 거의 초죽음이 되어 능욕을 당하던 때였고 제대로 된 기억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황자비에게 목소리가 권유했다.

[제국의 황자비, 그대는 기왕에 초감각을 얻은 마스터 급 아닌가. 한번 직접 느껴봐.]

“내가 소드오러를 얻은 것도 알고 있군요.”

[나같은 자가 되면 싫어도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원하는 바가 아니어도 말이야.]

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같은 자’.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때, 왼손 약지에서 반지가 약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의 서약으로 에스트레드가 건네준 녹색 ‘바다의 눈물’.

그녀는 함부로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변화든 저 목소리를 믿을 수 없으므로 눈에 띄게 하지 않는 게 나을듯 했다. 대신 그의 권유대로 세리나는 감각을 확장했다. 마나의 흔적들이 방 안에 가득하게 느껴졌다. 에스트레드를 따라갔던 푸른 존재의 박자국, 방 안을 가득 채운 녹색 결계의 기운. 그리고 그녀는 발 밑으로 물을 느꼈다. 말 그대로 수기. 녹색으로 가득찬 물.

“물...물이 이 밑에 있는데…”

지하수? 그렇다기엔 맑은 기운이 아니다. 물은 탁하고 이끼가 꼈으며 녹색빛을 띄운다. 마나로 그렇게 느껴지면 육안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넢았다. 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생각나는 광경이 있었다. 후의 충격으로 흐릿해졌지만 처음 봤을 때 깊이 뇌리에 새겨졌던 광경.

녹색의 물 속으로 수없이 누워있던 시체들. 동부의 마법사들에게서 마나를 빼내 스스로에게 주입하고자 했던 캐딜럿이 만들었던 거대한 연못.

“마법사들…”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껄껄 웃었다. 한점의 그늘도 없어서 더 위화감이 들었다.

[맞아. 동부 마법사들이 죽어 누운 곳, 우리들의 사후 세계가 아닌 제국의 지하수 속. 당신은 그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어.]

그녀는 말을 잃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초감각에 인식된 녹색의 수기는 이 방 전체를 떠받치고 있었다. 한번 기억나기 시작한 광경은 점점 더 뚜렷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녹색의 물 속 떠다니던, 밀랍같은 흰 얼굴의 죽은 마법사들.

“대체 어디서 이 많은 시체들을…”

[어디서였겠나? 그대와 그대의 남편이 정벌했던 동부 내란기였지. 우리는 내란이라기보다는, 실패한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네만.]

“...동부 내란기라니, 하지만 그곳에서 사망한 마법사의 숫자는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전쟁의 범위도 있었어. 저기 누워있는 황자 에스트레드와 그의 수하인 ‘그림자의 기사’ 밀렌 바스트가 밤을 틈타 전장을 헤메며 많은 수를 죽였지.]

“당시 나 역시 수호기사였습니다. 황자께서 그러셨을 리가…”

[마법사는 위험한 존재니까 말이야. 그대의 등에 검이 꽂히는 중상을 입고 나서 황자의 광포함이 극심해졌지.]

“....”

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목소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신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목소리는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전장의 사정도, 그녀와 황자의 관계도, 밀렌 바스트에 대한 것도 전부 안다. 동부 내란기의 전장 상황마저 알고 있었다.

[나 말인가. 그러고보니 정식으로 인사도 하지 않았군, 내 불찰이야.]

목소리가 다시 크게 웃었다. 그 서슬에 챔버 전체가 떨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밝지만 동시에 몹시 지치고 피로한 목소리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인사하지. 나의 이름은 레너드 볼프, 혹은 그의 수십조각으로 으깨어진 의식 중 한 조각.]

세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듣자 충격은 컸다. 동부의 마지막 왕, 역사상 최대 최고의 마스터급 마법사. 제국의 황제 발렌1세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했던 남자.

[라일리아의 아버지이며 또한 스승이었지. 육신은 아주 오래 전에 죽었지만 이렇게 영혼의 한조각이 살아 제국의 황자비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군. 참 기구한 인생이야.]

*****

챔버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리나는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고요한 공간 안에서 그녀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순간 챔버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떨림 같아서 세리나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는 침착하게 말했다.

[이 굴도 오래 버티지는 못해. 원래 무너졌어야 하는 굴을 마력으로 머티고 있는 것이니까.]

“마력으로...말입니까.”

[이 챔버는 제국 마법사의 가장 깊숙한 연구실이었어. 스스로에게 실험을 하는 공간이었지...그 덜떨어진 멍청이는 우리들의 시체를 끌어와 마력을 끌어내 자신에게 주입하려고 했고 이곳이 바로 그 자가 실험실이었어.]

세리나는 침대 위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은발의 황자는 창백한 얼굴만 아니면 마치 자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처음 봤을 때는 저만큼 창백한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크게 다쳤다고 생각했지만 부상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정신이 들 기미는 없어서, 만약 그를 끌고 이곳을 탈출하려면 세리나가 그를 들춰 업거나 떠메고 가야한다. 짧은 거리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녀가 미끄러져 내려온 거리를 생각하면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굴이 무너지는 상황을 가정하면 더욱 제로에 수렴한다.

그녀의 고심을 알아챘는지 목소리가 짧게 웃었다.

“자가 실험실이었다면...이 방에 마력을 응축해두고 자신에게 주입시켰다는 겁니까.”

황자비는 남편의 침대를 둘러싼 마력의 결계를 바라보았다. 녹색으로 빛나는 결계는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통과시킨 것으로 보아 물리적 반탄력은 없어보였지만 마나는 충분히 품고 있었다.

[그래. 그대의 남편, 에스트레드 로마나가 이곳까지 기어들어온 이유도 그거지. 마나가 가득한 공간에서 능력과 육체의 회복을 좀 더 빠르게 하기 위해서.]

“...직접 온 겁니까, 에스트레드님이.”

[설마 내가 데리고 들어왔겠나, 황자는 이 연구실이 무너졌을 때부터 이 챔버를 조사해서 이곳의 응집된 마력을 잘 알고 있었어.]

“잘도 제 남편을 이곳에 두셨군요, 레너드 볼프. 그것도 사지 멀쩡하게 말입니다.”

그녀는 가능한 시니컬하게 들리도록 말하고 싶었지만 말끝은 어쩔 수 없이 떨렸다. 레너드 볼프, 대륙 역사상 최대 최악의 마스터급 마법사라 불렸던 자다. 아직 진실인지 거짓인지 의심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이 들었다.

[어차피 라일리아에 대항할 수 있는 열쇠는 에스트레드 로마나와 그대가 쥐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대항?’

세리나는 예상 외의 말에 눈썹을 모았다. 목소리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 침묵했다. 황자비도 말을 하지 않아 방 안이 고요했다.

[라일리아...원래 그애의 이름이 물론 라일리아는 아니었지만.]

이윽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주 오래 전에는 마법에 열의를 가진 훌륭한 마녀였어. 상냥하고 아름다운 아이였지. 마치 지금 그대처럼 눈부신 금발에 양 눈의 색이 다른 미모여서 많은 구혼자들이 있었어, 아주 오래 전-내 딸이던 시절에 말이지.]

사내의 목소리는 애틋하면서도 냉소적이었다. 세리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지금은 딸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인정이라기보다는...조금 도리에 안맞지 않나, 나는 죽은 자의 인식의 파편, 라일리아는 저승의 영혼. 과연 부녀 관계라 부를 수가 있을까.]

목소리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이유가 그것만은 아닌듯 했지만 황자비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부드럽게 남편의 은발을 쓸어넘겨 주었다. 그녀는 어찌되었든 지금 목소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저 좁은 구멍으로 남편을 업고 기어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

“일전에 남편은 이곳에서 녹색 영혼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분명히 당신이었겠죠. 제 기억은 흐려서 정확하지 않지만, 남편의 말로는 그 영혼이 라일리아를 위해 공동을 무너뜨렸다고 했고요. 앞뒤가 안맞지 않습니까.”

[내 의식의 파편들은 전부 레너드 볼프의 영혼이 수십 수백으로 쪼개져 남은 것들이야. 그의 인식 중 일관되지 않은 부분들이 가장 먼저 흩어졌으니 아마 또다른 나의 동료 파편-이렇게 말하니 좀 웃기지만, 아무튼 다른 조각들은 나와 인식이 180도 다를 수도 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그럼 여기 계신 조각...분은, 그럼 꽤 부정적인 쪽이겠군요.”

[아마 레너드 볼프의 마이너스 감정들이 떨어져 나온 것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목소리가 챔버를 울리며 웃었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다. 마법사는 인간 중에서도 유난히 복잡하다. 그런 영혼이 잘게 부수어져 우주를 떠돌았으니 그 개별의 조각들이 어떤 상태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세리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상태가 되신 겁니까.”

[호기심이 많군, 황자비.]

“그렇잖습니까. 대륙 최대 최강의 마법사라고 불렸던 동왕국의 왕이,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사후에 그 영혼마저 수십조각으로 허공을 떠돌다니요. 발렌1세 폐하의 정복전쟁의 결과인 겁니까?”

[굳이 씨앗으로 거슬러올라간다면 그렇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아니야.]

목소리가 갑자기 쌀쌀맞아졌다. 뭔가 안좋은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한때 내 딸이었던 라일리아. 그 여자가 나의 영혼을 분해해 세상으로 던져버렸다. 그 마녀의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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