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19화 (119/142)

<-- 역습 -->                “...뭐지?”

세리나는 손에 쥔 나이프에 손가락을 말아 꽉 쥐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어둠숲이 원래 이리도 조용한 공간이었나. 황자비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캐딜럿의 연구실이 있던 공동은, 당시 에스트레드와 세리나가 도망나오면서 완전히 무너져 묻혔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트레드의 검을 입에 문 형체는 이곳으로 달려왔다.

‘뭔가 남아있는 것인가.’

황자비는 소리없이 움직이며 산기슭 주변의 바위들을 살펴보았다. 당시 그 안의 거대한 공동이 무너지며 산기슭의 겉 역시 흙과 바위가 흘러내려 자갈이 쌓였고, 어떤 동굴도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덮여 있었다.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이윽고 눈을 감았다. 육안으로 쉽게 발견할 수 없다면, 이제 세리나 리엔이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가 더 있었다. 그녀는 백색의 소드오러를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급격하게 예민해진 자신의 마나에 대한 감각을 개방했다.

“...”

세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육감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에 잡혔다. 어둠숲은 고요했고 칠흙처럼 어두워 시야는 새카맸다. 후각에는 풀냄새만 남았고 청각에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통 숲속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조차도 없는, 죽은듯한 고요였다. 하지만 그녀의 감각에는 수많은 마나의 흔적들이 느껴졌다. 너무 많아서 혼란이 올 정도였다.

‘과연...이래서 인간들이 접근하기 힘든 공간이 생성된 것인가.’

아주 희미해서 예전의 그녀라면 감지가 힘들었을 마나의 흔적들이 마치 촘촘한 실의 그물처럼 어둠숲 전체에 짜여져 있었다. 그런 그물망 밑으로, 세리나는 방금 지나간듯한 마나의 흔적을 발견했다. 밤하늘 은하수처럼 길 위를 흐르는 푸른 흔적. 그 잔흔은 무너진 산기슭의 바위 옆 수풀로 이어져 있었다. 그 수풀을 들추자 그곳에 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그녀를 반겼다.

“산 너머 산이군.”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작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이었다. 가로세로 폭을 손뼘으로 재보니 간신히 성인 남성 한명의 몸통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안을 들여다보아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이 보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아기를 가진 몸으로 들어가기는 꺼려지는 곳이다. 하지만 에스트레드의 검을 문 그 존재가 구멍으로 뛰어들어갔다. 세리나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플라티나.”

배가 꽉 뭉치며 태동이 느껴졌다. 황자비는 미소를 띄우고 손바닥으로 그 태동을 느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딸에게 말을 걸었다.

“좀 위험할 수도 있지만...이해하렴. 아버지가 부르시는 것 같구나.”

다시 한번 아랫배가 뛰었다. 그것이 마치 긍정적인 대답같이 느껴져서 세리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온통 어둡고 고요한 어둠숲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네가 태어나면...아주 담대한 아이가 될 것 같구나.”

황자비는 수풀 뒤의 구멍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그 안을 들여다 보던 그녀는 곧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뛰어들었다. 한손에 나이프, 한손으로는 배를 감싸안은 채였다.

*****

금발의 여자가 흙바닥으로 앞구르기를 하며 착지했다. 제대로 낙법이 시전되어 망정이지 안그랬다면 목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젠장, 높기도 더럽게 높네.”

그녀는 투덜거리면서 띵한 머리를 붙잡고 한동안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가 울려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나이프를 안놓친 게 다행이었다. 세리나는 한참 정신을 차리느라 바닥에 앉아있다가 미끄러져 내려온 길을 올려다 보았다. 온통 검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도착한 공간은 복도였다. 캐딜럿이 설계했던 연구실은 거대한 공동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주변 복도와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복도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의외로 살아남은 연구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전에 도착했던 복도와 마찬가지로 공기 중에 은은한 빛이 떠돌았다. 마나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불빛이었다. 그 가운데로 그녀가 쫓아온 희미한 푸른 마나의 흔적 역시 끊어질 듯 이어져 있었다.

세리나는 그 복도를 걸었다. 바닥도 공기도 건조했다. 사막에서 만든다는 미라가 이런 공기에서 만들어질 것만 같았다. 자박거리며 울리는 자신의 발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끄러져내려온 시간을 생각하면 이곳은 적어도 공동의 밑바닥이나 오히려 그보다 낮은 공간일 수 있었다. 이 낮은 지대에도 연구실을 만들어놓다니 마법사란 정말 불가해한 존재다. 평생을 직선적으로 살아온 기사인 세리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성이었다.

‘플라티나.’

아이에게 말을 걸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어디에 무엇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나이프로 언제든 검기를 내뿜을 준비를 하고서, 그녀는 조용히 호흡조차 고른 채로 복도를 걸어나갔다. 어느 순간, 그녀의 확장된 오감 속으로 공기의 결이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세리나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양쪽으로 달린 목제 문은 절반쯤 열린 채였다. 아마도 캐딜럿의 마지막 연구실이었을 게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가장 귀중한 마법적 연구 결과를 품고 있었을 곳. 그녀는 천천히 문 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챔버 안에서 그를 보았다.

챔버의 천장은 유달리 높았다. 꼭대기에서부터 늘어진 태피스트리가 침대의 뒤편을 감싸고 있었다. 침대 곁에 그녀가 쫓아온 푸른 존재가 앉아있다가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세리나의 눈은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남자의 긴 은발이 침대 시트 위로 넓게 흘러내렸다.

황자비는 작게 속삭였다. 고요한 방 속으로 그녀의 부름이 낮게 퍼졌다.

“에스트레드.”

헤어진 지 이틀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하다고 칭해지는 황자를, 자신의 남편 에스트레드 로마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발렌2세와 레드포 로마나와 에스트레드 셋만이 지하 깊숙한 곳의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는 계승식이라 할지라도, 세리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누워있는 에스트레드의 얼굴은 창백했다. 침대 주변은 녹색 기운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가끔 매우 공격적으로 스파크가 튀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결계일 것이다. 이불 밑에 누워있어 상태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안색만으로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세리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푸른 존재가 남긴 에스트레드의 레이피어만이 침대 곁에 나뒹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을 보면서 세리나는 침묵했다. 그녀 자신이 너무 안이했다고 생각했다. 에스트레드는 강인한 자였지만 위험이 너무도 컸다. 생각이 있었다면 피할 수 없는 계승식이라 할지라도 어떤 대비책을 마련해두어야 했다. 그녀도, 에스트레드 자신도, 황자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자만감을 은연중에 뿌리깊게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세리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남편의 녹색 결계에 손을 가져갔다. 공격적으로 스파크를 뿌리던 결계는, 황자비의 손가락이 닿자 아무런 반탄력 없이 그녀를 그대로 안으로 들여보냈다. 자신이 하고도 놀라서 황자비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그대로 결계 안,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마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결계 안과 밖의 압력이 다른 느낌이었다.

“에스트레드님…”

세리나는 차갑고 흰 에스트레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서늘한 냉기에 감싸인 남편의 몸은 차라리 안도감을 주었다. 황자에게 있어 냉기란 언제나 그의 능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었으므로.

[너는 누구지?]

웅웅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세리나가 재빨리 뒤를 돌아 나이프를 쥐었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자비는 남편을 등 뒤로 숨기려 애쓰면서 나이프에서 소드오러를 일으켰다. 새하얀 검기가 레이피어처럼 곧게 뿜어져 올라가기 시작했다.

[워, 거친 아가씨로군. 누구길래, 나의 결계를 그리 쉽게 통과하고...마스터의 소드오러를 지니고 내게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이지?]

공간을 울리며 세리나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목소리는 매우 평이한 말투로 여상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은 마지막 남은 나의 방, 나의 무덤, 나와 나의 가족들이 함께 묻혀있는 곳. 다르게 말하면 우리들의 묘지. 너는 누구지?]

“내가 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

[오, 이런. 적대적인 태도로군.]

남자의 목소리가 챔버를 울리며 웃었다. 태평한 것 같기도 하고 초탈한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굳이 강요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거기 누워있는 그 남자에게 볼일이 있다면 내게 부탁하는 게 좋을 텐데. 이 깊은 지하의 주인은 바로 나거든.]

세리나는 입을 다물고 한동안 생각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확실히 믿음이 갔다. 에스트레드의 결계라고 생각했던 녹색의 막은 확실히 원래 그의 색과는 이질적인 짙은 녹색이었다. 설마 이 방의 주인이 에스트레드를 보호해준 것인가. 그녀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풍성한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비록 급히 달려오고 토굴 안을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느라 다 망가진 잠옷 차림이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위엄있게 인사했다.

“결례를 용서하세요. 나는 로마니엔 제국의 제1황자비, 세리나 리엔이라고 합니다.”

[오, 이런… 귀한 손님이 오셨군.]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라고 목소리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했다. 세리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공간에 다소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목소리가 느릿하게 그녀에게 답하는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게, 제국의 황자비. 누추하지만 소개하지.]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목소리는 다소 지치고 피곤한 느낌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처음은 아니겠지. 우리들, 동왕국 혈족들의 마지막 공동묘지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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