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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17화 (117/142)

<-- 역습 -->                슈엔 로마나는 강한 혈통을 받은 귀족 영애였으나 황후의 어머니 만큼은 아니다. 이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도로 적은 로마니엔에서 노공작 에레니아는 군인으로, 그 이후에는 재상으로 활동하며 공작 가문을 지켜냈던 사람이다. 발렌2세가 라일리아 로마나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가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에레니아와의 친족관계를 원한다는 이야기가 대두될 정도였다.

“자꾸 상대해야되는 인간들 급이 올라가, 왜. 그런 욕심은 없는데.”

용병대장은 투덜거렸다. 가만히 친우를 내려다보던 밀렌은 자신의 검을 허리에 다시 차고 일어서 그의 옆에 가서 섰다.

“어이, 넌 여기 있어. 그림자답게 주인을 지켜야지.”

“여기에 있다고 해서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벡스나 돕는 것으로 하죠.”

“할일이 왜 없어? 여기서 세리나 상태를 좀 지켜봐. 비상 사태가 오면 황자비 전하를 들춰 업고라도 도망가야할 거 아냐.”

“제가 지켜볼 테니 두 분은 다녀오세요.”

두 사람의 시선이 레이디 휘에리에게로 향했다. 중년의 귀부인은 지친 얼굴로 황자비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하드레드 경과 함께 황자비 전하를 모시고 남편에게로 가겠습니다. 이미 전서구를 날려두었으니 제가 이곳에 있는 것도 알고 있구요.”

“...그래주시겠습니까.”

레이디 휘에리에게 느닷없이 이름을 불린 하드레드가 움찔했다. 듬직한 체격의 부관을 훝어보고 벡스 레넌이 한숨을 쉬었고 밀렌 바스트는 명령을 내렸다.

“자넨 여기서 레이디 휘에리의 명을 듣게. 비상시에 황자비 전하를 모시고 카스가드백작의 수도방위군 쪽으로 몸을 피하도록.”

“하, 하지만...저는 전투에 참가해야…”

“전투 참가는 나와 용병대장이 한다.”

어차피 일반 기사인 하드레드는 크게 도움이 안될 것이다. 마지막 말을 삼키고 밀렌이 가벼운 가죽 갑옷을 고쳐입고 일어섰다. 은신을 특기로 삼는 그림자의 기사답게 극도로 경량화된 갑옷이었다. 벡스레넌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쩔 수 없지...일단 나가보자. 에스트레드님이 돌아오실 때 까지는 최소한의 방어선을 지켜야해.”

계승의 방으로 들어간 에스트레드가 다시 나올 때까지 단 이틀. 하지만 과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부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발렌2세와 레드포 로마나, 에스트레드만이 들어간 깊고 깊은 챔버. 황제와 막내 황자는 분명히 황후를 매개로 결속되어 있었다.

밀렌 바스트는 궁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공기는 서늘하고 외벽의 얼음은 두터웠다. 찌는듯한 여름의 공기와 햇빛은 황자궁 안으로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이곳의 얼음 결계가 완전한 것을 보면 황자 전하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황자궁의 홀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정원까지도 에스트레드의 힘이 미쳐 밖의 공기 역시 적당히 서늘하고 건조했다. 밖은 이미 노을이 져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챔버에 들어간 후 72시간이 지나면 계승이 완전히 끝나죠. 에스트레드 전하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밀렌이 해의 각도로 적당히 시간을 가늠했다.

“35시간 정도가 남았군요.”

“절반이 넘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벡스 레넌은 고개를 저었다.

“황후는 왜 하필 지금 이 소란을 일으켰을까. 뭐라 하지...이걸.”

“반란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황제 폐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제국을 전복하고자 하는 시도니까요.”

“워, 어감 무섭군.”

“지금 사태가 더 무섭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원래도 평화로운 제국은 아니었다지만 지금 이 상황은 상상 이상이다. 황실과 귀족 내부에서, 개인들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통제할 수 없는 폭주가 일어나 수도를 폐허로 만든다. 제국의 지도부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 터다. 무엇보다 지도부의 그 누가 폭주하게될지 서로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럼 일단 가볼까.”

“그러죠.”

벡스와 밀렌은 말에 올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삼년 전 동부 내란에서 함께 싸운 이후 아주 오랜만에 검을 들고 나간다. 한명은 에스트레드의 수호기사로, 한명은 수도의 용병길드를 이끄는 대장으로 참전해 딱히 동료라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아무튼 같은 전장을 밟았던 전우다. 그리고 등을 맞대고 싸웠던 또 한명의 전우는 지금 황자궁 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세리나 리엔, 가장 강인하고 믿음직했던 기사.

“무사하기를.”

의식 없는 황자비를 위해 벡스가 짧게 태양신의 기도를 읊조렸다. 황자궁을 잠시 바라보던 두 사람은 등을 돌려 말을 출발시켰다. 노을이 지고 세상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

황자궁의 안은 고요했다. 세리나를 지켜보던 레이디 휘에리는 완전히 어두워진 밖을 바라보았다. 저녁이 된 지도 한참이 지난 듯 했다. 완연한 밤이어서 밖은 새카맸다.

부관 하드레드가 기사로부터 보고를 받고 세리나의 침실로 들어왔다.

“밖의 상황은 어떻죠?”

휘에리가 고개를 들어 기사를 바라보았다. 덩치 좋은 부관은 침울한 얼굴이었다.

“일단 바스트 경과 용병대장께서 달려가셨기 때문에 노공작 에레니아...그러니까, 그녀가 폭주한 마수는 전투 불능이 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한 멸절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몸의 거의 절반이 날아간 채로 어둠숲 쪽으로 도망갔다고 하고요.”

“우리 쪽 피해는요?”

“성기사단 쪽 피해가 막심하다고 합니다. 다행히 바스트 경과 용병대장께서는 큰 부상은 없으시구요.”

뒤 이은 말을 하려다가 하드레드는 입을 다물었다.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마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가장 큰 문제기는 했다. 지금 다행히 노공작 에레니아는 잡혔지만 언제 어디서 괴물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것도 서로 믿고 의지하며 싸우는 아군의 지휘부 쪽에서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모나칸 후작이 지휘하는 황궁 경비대는 현재 황궁 내부의 귀족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황궁 외부에서 진입하려 하는 카스가드 백작의 수도 방위군과 맞붙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하드레드라지만 그는 차마 레이디 휘에리에게 남편의 전투 상황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끔찍이도 사랑하고 의지하는 카스가드 백작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휘에리가 차분함을 잃을 것 같았다.

“우리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지요?”

“네...현재 황자궁의 병력도 수비를 위한 최소한만 남아있으니까요.”

“아직 에스트레드 전하의 얼음은 멀쩡해요. 안심해도 되는 거겠죠.”

“맞습니다. 그리고 에스트레드 전하는 무슨 일을 당할 분은 아니시고, 오히려 무슨 일을 하실 분이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하드레드는 일부러 밝고 명랑하게 말했다. 청년의 순박한 배려에 레이디는 잠깐 웃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가만히 누워있는 황자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끼니를 걸렀잖아요, 하드레드. 가서 뭐라도 먹읍시다.”

“아, 먹을 거요.”

기사가 반색을 하다가 세리나 쪽을 흘긋 바라보고 약간 망설였다. 그 기색을 눈치채고 휘에리는 미소를 지었다.

“가는 길에 시녀 안나를 불러다가 황자비 전하를 지켜보게 하면 되죠, 빨리 먹고 오기로 하고요.”

“...그, 그럴까요?”

“먹어야 힘이 나잖아요. 너무 염려 말아요.”

작은 몸집의 중년 부인은 먼저 나서서 문을 열었다. 하드레드는 금방 걱정을 잊은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다가 안나에게 전갈을 전하게 하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넓은 주방에는 요리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뭐라도 좋으니 요기할 수 있는 것을 내오게. 거창할 필요는 없고, 간단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으로.”

휘에리는 다소 지친 음성으로 명했다. 뒤에서 하드레드가 조심스럽게 뭐든 좋으니 많이 달라는 주문을 하는 것이 들렸다. 덩치 좋고 먹성 좋은 청년다워서 레이디 휘에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앉았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부관이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많이 놀라셨죠?”

눈밑에 검게 그늘이 진 중년부인을 보고 하드레드가 조심히 물었다.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휘에리였지만 그렇게 끔찍한 광경을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한때 가장 위풍당당하고 아름다웠던 대공녀가 벌레 모양의 거대한 마수로 변해 사람을 잡아먹는 광경이라니. 속이 울렁거려서 휘에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식사 전에 굳이 상기할만한 기억은 결코 아니었다.

곧 음식이 나왔다. 휘에리의 주문대로 간단하고 따스한 옥수수 크림 스프와 갓 구운 흰 빵, 반숙으로 삶아 노른자가 조금 흐르는 달걀 몇알과 잘게 자른 사과 한알이 전부였다. 하드레드는 빵을 잡아 일단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레이디 휘에리 역시 한숨을 쉬고 빵 한조각을 잘라 스프에 적셔 입에 넣으려던 참이었다. 여자의 외침이 들리고 주방으로 누군가가 구르듯 뛰어들어왔다. 시녀 안나였다. 그녀가 휘에리에게 달려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레이디, 황자비 전하가 방에 안계세요!”

휘에리는 손을 멈췄다. 하드레드 역시 입안에 든 빵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창문이 열려있고 침대가 텅 비어있었다구요!”

“무슨...무슨 소리야. 네가 우리 대신 황자비 전하의 침실로 들어간 건 금방이었잖니.”

“맞아요, 빈 시간은 오분 내외일 거에요, 하지만 안계신다니까요!”

안나는 울 것처럼 크게 외쳤다. 레이디 휘에리와 하드레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자비의 침실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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