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황후는 더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세리나의 아랫배를 관통한 그림자의 창이 쑥 빠져 그대로 뒤로 돌아가 라일리아의 손으로 돌아갔다. 긴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검은 피로 물든 여름의 정원에 서있는 그녀는, 마치 악마가 보낸 마녀처럼 보였다.
“황자비 전하!”
벡스 레넌이 피가 뿜어져 나오는 세리나의 상처를 손으로 막았다.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재빨리 지혈하면서 그는 황후를 노려보았다. 검은 머리의 여자는 미소를 짓다가 허공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온통 흑혈의 호수가 된 정원을 손짓했다.
“마음에 드나, 수도의 용병대장? 모처럼의 티파티가 엉망이 되어 안됐네만.”
“닥쳐, 이 마녀!”
“마녀, 정확하게 나를 지칭하는 단어로군. 그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겠어.”
라일리아는 크게 웃었다. 오랜기간 그녀를 보아온 밀렌조차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원래 나의 정원은 야생 장미로 가득한 곳이야. 검은 색이 덧칠해져 더욱 아름다워졌어. 나는 검은 것, 어둠, 그림자가 좋아.”
“그러시겠지요, 황후 폐하. 본래 당신이 속한 곳일 테니.”
밀렌 바스트는 흥분하려는 벡스 레넌을 막고 침착하게 답했다. 그 역시 분노에 차 있었지만 그림자의 기사는 감정을 억눌렀다.
“당신, 라일리아 로마나...아니, 그 몸을 차지하고 있는 당신 말입니다. 고향의 친구여.”
황후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굴러서 밀렌 바스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의 색깔은 달라도 마치 슈엔 로마나의 것과 같아 보여서 한명의 기사와 한명의 용병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동향의 친구. 멸망한 조국을 잊고 제국에 붙은 배신자.”
“내가 곁에 있는데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고요. 조국? 나고 자란 나라를 말하는 거라면 나는 장소 같은 것에 애착 따위가 없습니다.”
“과연 배신자다운 논리야.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그림자도 내려놓아야지.”
“내 그림자는 내가 직접 얻은 것, 그렇게 말할 권리 같은 건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습니다.”
“동왕국에서 노예 생활이나마 하지 않았다면 그림자를 얻었을 것 같은가, 어리석은 천인.”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얻을 수 없었겠지. 이 문제에 관해선 평행선을 달리겠군요. 할말이 남아있습니까, 동향의 친구여?”
밀렌은 차갑게 대화를 끊었다. 라일리아 로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매정한 친구로다.”
“고향의 정따위를 키우지 않으니 매정할 밖에.”
황후는 오른손을 들어올려 손가락을 튀겼다. 딱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 안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고 밀렌의 품 안에서 세리나가 크게 신음했다. 고통에 잠식당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었다. 덜컥 뛰는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으면서 밀렌이 황후를 노려보았고 벡스 레넌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수작이야!”
“진정하게, 수도의 용병대장. 어차피 황자비를 위한 결말은 정해져 있으니.”
라일리아는 밝게 웃었다. 피비린내 나는 폐허가 된 정원의 한가운데서 검은 머리의 황후는 기이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아이는 걱정하지마...세리나 리엔은 임신한 아기를 낳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인간이 아닐테지, 왜냐하면…”
라일리아 로마나가 손가락을 들어 세리나를 가리켰다. 밀렌은 친우를 꽉 끌어안았고 벡스 레넌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몸으로 막는 용병대장을 향해 라일리아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미 그 어미가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뭐?”
“뭐라고?”
반사적으로 비명처럼 반응이 튀어나갔다. 당황한 벡스 레넌이 검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다, 용병이여.”
라일리아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안녕히, 라고 말하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입모양만으로 작별인사를 남기고 검은 머리의 황후는 서있던 자리에서 공기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여름 햇살만이 찢어지게 뜨겁게 비추었다. 폐허가 된 정원의 공기 속으로 악취를 담은 아지랑이가 올랐다.
“-사라졌어.”
“일단 에스트레드 전하의 황자궁으로 갑시다, 벡스.”
밀렌은 세리나를 들춰 업고 뛰기 시작했다. 친우의 몸이 뜨거워 위태했다. 자신보다 한참 자그마한 밀렌이 키가 늘씬한 세리나의 몸을 업고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당황한 벡스가 그 뒤를 따랐다.
“잠깐...잠깐! 황후는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거야?”
“안두면 어쩔 겁니까. 별 수가 없어요.”
밀렌은 전혀 속력을 줄이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먼저 도망나간 사람들은 정원의 담을 뚫었고 경비대의 저지도 넘어섰다. 재빠르게 퇴로를 확보한 두 사람은 여전히 전투가 이어지는 곳을 뚫고 지나갔다. 각 가문의 지원병들이 와서 경비대와 싸우고 있었다.
“잘...잘도 뛰네.”
벡스가 숨이 차서 투덜거렸다. 밀렌은 답하지 않고 발을 재게 놀렸다. 그는 벡스가 끌고 왔던 말을 잡아 타고 세리나를 위로 올린 뒤 채찍질을 했다.
플라티나, 라고 세리나는 계속 혼잣말을 했다. 몸 전체에 열이 들끓는 듯 비정상적으로 뜨거운데도 춥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간혹 그녀의 말에 에스트레드를 부르는 소리도 섞여들었다.
“정신차려, 세리나.”
플라티나라는 아이의 이름을 먼저 지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되려고 그랬나 싶어서 밀렌 바스트는 초조하게 박차를 가했다. 황자궁으로 가면 일단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전속력으로 에스트레드의 궁으로 말을 달렸다. 친우의 품 안에서 황자비가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아랫배를 감싸쥔 그녀의 손이 떨렸다.
*****
태양신의 최고위급 신관은 최대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 안에서 환한 빛이 스며나와 세리나의 상처로 옮겨갔다. 이미 몇십분째 계속된 치료였다. 의술사가 이미 지혈한 후 긴 자상을 꿰맸고 그 이후 황자궁에서 대기하던 신관이 들어와 황자비의 몸 위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황손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긴 침묵 끝에 검은 머리의 신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밀렌 바스트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곁에 앉아있던 레이디 휘에리 역시 창백한 얼굴로 신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가 말한 것은 플라티나 로마나, 세리나의 뱃속에서 겨우 덩어리 모양으로 생명을 갖기 시작한 아기이다. 성격 급한 벡스 레넌이 기다리지 못하고 외치듯이 물었다.
“그럼 황자비 전하는? 황자비 전하는 괜찮으신 겁니까?”
“벡스.”
“괜찮으신 거겠지요, 아직 임신 초기인데도 아이가 무사하시다면...모체가 무사하지 않을 리 없지요.”
당연한 일이다. 가뜩이나 불안정하고 연약한 임신 초기였다. 잉태한 생명은 더욱 연약하다. 아기가 멀쩡하다면 모체 역시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관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일단 지금 상태로는 별 문제는 없으신데, 음…”
“없으신데?”
밀렌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신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이 안되는 소리긴 하지만 신성력과 반발하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회복을 위해 기도를 올려도 오히려 황자비 전하의 육체 내에서 반탄력을 되돌리고 있구요.”
밀렌 바스트는 되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말했던 마지막 말이 갑자기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만약 세리나의 몸이, 황후의 실험에 걸려 슈엔 로마나처럼 이미 변화한 상태라면…
“정말 알 수 없는 상황이군요.”
앞뒤 사정을 간단하게만 전해들은 레이디 휘에리는 몸을 조그맣게 말며 중얼거렸다. 귀부인으로 전장에 서본 적 없는 그녀는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레이디 휘에리께선 부군이신 카스가드 백작께 돌아가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수도 방위군이라면 어떻든 레이디를 안전히 지켜줄 테니까요.”
이미 한번 거절당한 제안이었지만 벡스가 다시 권했다. 하지만 휘에리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순간에 필요한 건 힘 센 손만이 아니지요. 약하지만 부드러운 손도 어쨌든 지금의 황자비 전하께 도움이 될 겁니다. 어차피 남편은 군을 이끌고 수도 전체를 막아낼 터.”
휘에리의 눈은 단단했다. 그녀는 보드랍고 통통한 손을 내려 차가운 세리나의 손을 덮었다. 귀부인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어렸다.
문밖에서 급한 전갈이 들려왔다. 호보프의 안내로 방에 들어선 자는 세리나의 부관이었던 하드레드였다. 그는 경례를 붙이고 다소 조급한 말투로 보고했다.
“현재 황후 폐하 정원에서의 전투 이외에 세군데에서 폭주가 신고 들어왔습니다. 태양의 신전에서 성기사단이 전투에 임해 둘은 잡았습니다만, 아직 한곳에서 애를 먹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아니, 누가 폭주한 것인데?”
벡스의 질문에 하드레드는 입술을 씹었다. 그는 여전히 지금 이 사태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강력하고 유력한 제국의 귀족들이 마수로 변해 성기사단에게 잡혔다. 인간이 괴물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믿어온 제국의 가장 강한 자들이. 그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의심하며 답했다.
“노공작 에레니아 로마나님이십니다.”
“에레니아님이?”
밀렌 바스트 역시 다소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라일리아 로마나의 생물학적인 모친인 노공작 에레니아. 그녀는 역대 공작가문의 수장 중 가장 피가 짙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황후의 친모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모친까지 실험 대상으로 삼다니.”
“지금 황후는 정확히 라일리아 로마나는 아니니까.”
“상황은 어떻지?”
“성기사단 역시 두 마리의 마수를 잡으면서 전력에 상당히 손실을 입은 상태입니다.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고는 있지만 에레니아님이...아니, 마수가 워낙 강하다보니 쉽지 않습니다.”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비록 이 황자궁은 에스트레드의 속성 결계로 인해 얼음의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벡스 레넌은 검을 쥐고 일어섰다.
“일단 나가봐야겠군.”
“어딜 가십니까, 용병대장.”
“도우러. 노공작이 폭주한 마수라니 내 손 따위 별 도움이라도 될지 자신은 없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