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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13화 (113/142)

<-- 역습 -->                검을 든 자들은 긴장한 얼굴로 마수와 대치했다. 거대화된 마수, 그 꼭대기에 달린 슈엔 로마나의 얼굴은 여전히 동공이 가득 차 흰자가 전혀 없는 눈을 내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세리나의 뒤에 있던 애송이 기사는 검의 손잡이를 다시 말아쥐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봐, 너, 이름이 뭐지?”

세리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를 지목해서 물었다. 기사는 더듬거리다가 답했다.

“테서스입니다. 테서스 세번.”

“세번 후작가의 아들이군.”

“차남입니다.”

“그리고 삼년 전에 내 밑에 있었지.”

밀렌이 끼어들었다. 그는 테서스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올렸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사슴같이 큰 밤색 눈. 용감한 기사라기보다는 시인 지망생 같은 얼굴이었다. 동부 내란 당시에도 용맹보다는 후방지원으로...그러니까, 의료라든가 간호로 더 쓸모가 있던 인물이었다.

“넌 그림자의 기사 밀렌 바스트의 밑에 있던 기사다. 좀 더 제대로 움직여.”

세리나는 기를 불어넣은 나이프를 손 안에서 빙글 돌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봐 테서스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긴장이 역력한 젊은 기사의 얼굴이 조금 용기를 얻으며 힘차게 답했다.

“네, 명 받들겠습니다, 리엔 경!”

“세리나 리엔 황자비 전하다, 멍청이.”

밀렌은 투덜거렸다. 기사로서의 명성이 컸던 만큼 세리나의 몇달 동안 바뀐 지위에 적응 못하는 멍청이들이 몇 있었는데, 하드레드를 포함한 그 무리에 이 애송이 역시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세리나 본인은 개의치 않고 마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장난 시계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갑각류의 마수 뒤로 황후 일행이 보였다. 케린 모나칸의 뒤에 선 라일리아 로마나는 차분한 얼굴로 세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죽여야 하는 건 너야.’

특별한 적개심도 살의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목적의식이었다. 그것을 확실히 느끼고, 황자비는 긴장한 얼굴로 검을 몸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 찰나 마수가 소리도 없이 앞 집게발을 세리나 일행 쪽으로 휘둘렀다.

세리나는 뒤로 뛰어 피했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테서스는 뒤로 굴렀다. 이미 고요하게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 밀렌은 보이지 않았다. 연이어 마수의 거대한 발들이 사람들을 공격했다. 몸을 길게 늘여 더 많은 발을 꺼낸 괴물은 닥치는대로 황후의 정원을 휩쓸기 시작했다.

“크악! 저 마수!”

“살, 살려줘!”

“으아악!”

검을 든 자들이 속수무책으로 그 공격에 휩쓸려 나갔다. 잘 기른 장미와 잔디들이 전부 뒤집어지며 흙먼지가 정원을 메웠고 그 사이로 피가 튀었다. 일반 마수라도 에스트레드 정도의 강자가 아니라면 상대할 수 없어서 잘 조직된 십여명의 기사단이 사냥하는 판이다. 거대화된 저 정도의 마수를 무기를 들었을 뿐인 개개인들이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자 전하는 괜찮으신 건가.’

황후는 일부러 이런 일을 꾸몄다. 그렇다면 계승의 방으로 들어간 에스트레드 쪽은 무사할 것인가. 발렌2세도 레드포 로마나도 황후와 한패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대번에 초조해져서 세리나는 입술을 물었다. 마수든 뭐든, 빨리 쓰러뜨리고 계승의 방 쪽을 살펴야 했다.

“끄아악!”

팔이 잘려나간 사내 하나가 바닥에 굴렀다. 끔찍한 비명이 채 퍼지기도 전에 마수의 이빨이 그의 머리통을 물고 꺾어버렸다. 사내의 몸뚱이가 축 늘어지는 것을 마수가 목구멍을 벌려 으득거리고 씹어 삼켰다. 고개를 쳐드는 마수의 대가리에서 슈엔 로마나의 얼굴을 발견하고 세리나는 침음성을 삼켰다. 고아했던 대공녀의 얼굴을 한 마수의 입가로 인간의 살점과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얼굴의 모양은 그대로인데 끔찍한 광경이었다.

‘혼자 쓰러뜨리는 건 무리야.’

혼자는 커녕 밀렌이나 테서스와 함께 공격한다 해도 마수를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세리나의 검기가 나이프를 타고 제대로 터져나오고 있었지만 소드 마스터 급에는 근접하지 못했다. 그녀의 소드 오러는 푸른색. 마스터들이 사용하는 백색의 검기는 아주 찰나의 순간에만 검기 사이로 섞여 나왔다.

“황후는 사라졌어.”

그림자 속에서 밀렌이 속삭였다. 잠깐 마수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황후 일행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귀족 중 한명이 죽어가는 사내를 보며 울부짖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끄럽소, 떠들 시간에 싸워!”

“저 죽고 있는 자가 내 형이란 말이다!”

남자의 시신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빠르게 엄습하는 그림자의 공격을 세리나의 푸른 검기가 튕겨냈다. 거세게 잘라지고 쳐내진 그림자가 다시 마수의 몸 속으로 들어갔고, 약간의 고통을 느낀 것인지 마수에게서 울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는, 폐하는 대체 어딜 가신 겐가!”

황후 라일리아 로마나만 있다면 마수 정도는 없애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황후는 가장 강인한 로마나 황실의 혈통 중 한명이었고 동시에 드문 마녀 중 한명이었다. 북부 산맥에서 소수 민족을 멸절시켰던 그녀의 강함은 전설과도 같았다. 귀족 한명이 소리를 질렀다.

“없어, 황후는 도망갔어!”

마수가 움직였다. 검을 내밀어 싸우려던 기사 한명의 몸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허리가 반쯤 잘린 몸은 곧 그림자가 휘어감아 마수의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순식간에 두명째를 먹어치우며 마수의 이빨이 어그적거렸다. 그 둥그런 새파란 눈이 다른 귀족 한명에게로 돌아갔다. 아직 채 자라지 못한 소년인 그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세리나의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튀어나가 검을 휘둘렀다.

“야, 야! 이쪽이다, 이 미친 놈아!”

“테서스!”

“거긴 보지마! 날 봐라!”

애송이 기사는 무모할 정도로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그림자를 베었다. 세리나는 당황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돌진했다. 마수의 다리가 기사의 칼을 견뎌내며 그를 포박했다. 하지만 테서스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며 그 다리를 검으로 내려쳤다.

“그래! 차라리 날 봐! 걘 아직 어려! 내 동생이란 말이다!”

“저 멍청한 자식…”

밀렌의 중얼거림이 귓가로 들려왔고 그보다 빨리 세리나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으악!”

테서스의 동생이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마수의 다리와 그림자의 넝쿨은 한쪽에 테서스를 놀리듯 묶어놓으면서 동생을 덮쳐갔다. 그 중간으로 세리나가 끼어들었다.

“황자비 전하!”

테서스가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나이프에서 둥근 모양으로 검기가 뿜어졌다. 방패처럼 두 사람을 둘러싼 푸른 기운이 그림자를 튕겨냈다.

“이제 와서 제대로 부르는군.”

세리나는 투덜거렸다. 그녀는 가차없이 검을 휘두르며 그림자를 전부 끊어내면서 테서스의 동생의 뒷덜미를 끌고 뒤로 물러났다. 소년은 덜덜 떨면서도 열심히 기어서 그녀의 뒤로 도망쳤다.

그림자의 한가운데서 푸르게 빛나는 검을 든 황금색 머리카락의 황자비는, 마치 옛 이야기에 나오는 신의 천사와 같았다.

“서두르지 마라. 항상 기회는 노리고, 잡았을 땐 덮쳐야 하는 법이지.”

나이프에서 뿜어져나오는 검기의 서슬에 하늘거리는 엠파이어 드레스가 뒤로 휘날렸다. 아주 오랜만에 맞는 전투 상황에 세리나 리엔은 검사로서의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절대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림자 속에서 밀렌이 속삭였다.

“객기 부리지마, 세리나.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알아. 일단 시간을 끌 테니 넌 정원 너머로 사람들을 대피시켜.”

“걱정마. 벡스 레넌이 합류하기로 되어있다.”

“황궁 경비대라면 벡스 하나로는 힘들어, 빨리 가라.”

“잠깐, 너는 아직 임신 초기라서 함부로 위험한 짓을 하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기합 소리와 함께 세리나가 마수 쪽으로 달려들었다. 푸른 검기가 길게 늘어나며 마수의 검은 그림자 주변을 빙글 감았다. 그대로 휘어감아 전부 산산조각 내버리면서 금발의 황자비는 마수의 배쪽으로 뛰어들었다. 밖으로만 리치가 긴 갑각류의 다리를 파고든 움직임이었다. 배 한가운데로 새파란 소드오러가 땅을 쪼갤 기세로 날아갔다.

급히 다리를 전부 끌어모아 배를 방어하는 마수를 보면서 세리나는 급격하게 검의 경로를 틀었다. 허리를 틀며 쏟아낸 소드오러가 테서스를 잡고 있는 마수의 다리로 향해 단숨에 세개의 다리를 부쉈다. 단단한 갑옷과 같은 껍데기가 산산조각 나며 검은 혈액이 터져나왔다. 그 피를 피해 뒤로 훌쩍 뛰면서 세리나는 땅으로 내려섰고 테서스는 땅바닥에 꼴사납게 뒹굴었다. 밤색 머리의 유순한 기사는 풀이 잔뜩 묻은 채로 어안이 벙벙해 일어섰다. 죽을 각오를 하고 덤볐는데, 황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황자비는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테서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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