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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11화 (111/142)

<-- 역습 -->                아직 임신 초기라 몸에 부담이 갈까 코르셋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허리가 잘록한 드레스 역시 꺼려졌다. 세리나는 역시 가장 편안한 허리선이 높은 엠파이어 드레스를 선택하여 그 위에 아름다운 플래티넘의 목걸이를 걸쳤다. 더운 여름에 잘 어울리게 살결이 비칠 정도로 얇은 옷감으로 만든 옷이었다.

양 팔에 장식용의 숄을 느슨하게 걸쳤다. 드레스와 비슷한 천으로 만든 숄은 얇고 길어 뒤로 늘어지며 발 뒤쪽으로 끌렸다. 반짝이는 은실로 수를 놓아 멀리서 보면 햇빛 아래 은은히 빛났다. 황자비는 풍성한 금발을 틀어올려 위로 높이 올리고 그 위에 자그마한 티아라를 장식했다. 금발 곳곳에 보석가루를 뿌렸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손 안에 자신의 나이프를 쥐었다. 귀부인들만 모이는 티파티인데다가 옷이 가벼워 숨기기도 마땅치 않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방심을 할 수도 없어서 세리나는 나이프를 숄 안쪽으로 숨겼다.

황자비는 손가락을 내려다 보았다. 왼쪽 약지에 반짝이는 녹색 보석이 빛났다. 그녀는 그 위로 장갑을 낄까 하다가 포기했다. 어차피 누구나 아는 적대적인 사이다. 굳이 호의적인 척을 위해 자신을 가릴 필요는 없었다.

라일리아 로마나의 몸을 지배하는 동왕국의 누군가. 아마 아주 오래된 영혼일 것이다.

“밀렌, 그녀가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세리나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림자 속에서 답이 들려왔다.

“아마도 동왕국 마지막 왕, 레너드 볼프의 소실된 후손일 거야. 공식적으로는 그가 결혼도 하지 않고 죽어 자식이 없다고 했지만…”

“어쨌든 마지막 혈통의 한명은 삼년 전 에스트레드 전하의 손에 죽었잖아?”

“그래. 취조할 시간도 없이 죽어버려서 결국 혈통의 계보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에스트레드가 바다의 보석을 뺏어오며 마지막으로 살해했다는 어린 소녀. 밀렌의 말에 의하면 정말 어린 아이였다고 했다.

“라일리아 로마나는 황실의 혈통이 짙어서 젊어보이지만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야. 오십에 가깝지. 그런데 정신계 마법 중에서도 영혼을 분리해 넣을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지려면 마법사가 몇살이나 되어야 할까?”

“적어도 서른 이상. 마법은 재능의 영역이지만 나이에 따른 숙련도도 무시하지 못한다. 특히나 육체와 영혼의 분리같은 경우는 당시 내가 모시던 중년의 마법사도 실패만 했어.”

그렇다면 현재 라일리아 로마나의 영혼은 산술적으로만 보아도 팔십에 가깝다. 천재 마법사라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위로 간다면 어디까지 갈지도 모른다.

“파티 시간이 다 되었어요, 세리나 전하!”

시녀 안나가 재촉했다. 밀렌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황자비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적들이 가득한 전장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티파티는 황후가 머무는 궁의 정원에서 열렸다. 다른 황궁의 거대한 스케일과는 달리, 황후의 정원은 오히려 자그마하고 야트막한 수목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곧고 푸른 나무들이 정원을 둘러 싼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정원 중앙을 채우고 있는 것은 작고 부드러운 야생화나 이국의 꽃들이었다. 보랏빛의 제비꽃들이 가장 많았다.

자연석으로 놓인 길 위를 걸어가며 세리나는 어깨를 곧게 폈다. 보통 귀부인들로 가득차는 티파티와는 다르게 이곳에는 귀족가의 남성들도 상당히 섞여 있었다. 고위 귀족들로만 모인 자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을 느끼며 황자비는 황후의 앞으로 나아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이전과는 달리 간소화된 인사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라일리아는 목례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곧이다. 어차피 황후와 황자비의 위치는 바뀔 것이다. 사흘 뒤 계승의 방에서 네 사람이 나오면 그때부터 이미 제위는 이양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예상 외로 대신관을 포섭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던 황후의 태도로 인해 서열자는 에스트레드로 결정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다만 언제 어떻게 피가 튀는 혈육간의 상잔이 일어날지 몰라 황궁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 뿐이었다. 계승자가 정해진다 하더라도 그 뒤에 그를 살해하고 뒷서열의 형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일이 드물지 않았으므로.

황금의 머리카락을 지닌 세리나와 검은 머리의 라일리아는 빛과 그림자 같았다. 황후는 우아하고 나른해보였지만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고 황자비는 날씬하고 아름다웠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로마니엔의 순수 혈통들은 원래 모든 색소가 옅고 화사한 쪽이었다. 귀족들의 눈에 부드러운 하늘색의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세리나는 천사의 강림처럼 보였고 짙은 보라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라일리아는 마족의 부활처럼 보였다.

모두가 착석한 뒤 라일리아가 말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와 그의 아들들이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신 날이오. 성스러운 기간 사흘이 지나고 나면 우리들은 다음 대의 황제를 맞이하게 되겠지요. 우리 여인들은 그저 뒤로 물러나 내조를 하면 되니, 이 아름다운 사흘을 우리끼리 두터운 친목을 도모하고자 하는 바요. 아, 물론 여인이 아니신 분들도 우리의 사교에 얼마든지 참여하실 수 있소.”

여인들 사이 드문드문 섞인 남자들에게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황후는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로 손짓을 했고, 정원 한쪽을 점령한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현악기와 하프로 이루어진 소규모 악단은 부드럽고 느린 발라드를 연주했다.

티포트에서 따라지는 물이 붉었다. 세리나는 차분하게 그 흐름을 지켜보았다.

“마시게, 나의 며느리. 부모자식간에 다름이 아닌가.”

황후의 느릿한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세리나는 황후의 시녀가 따라준 찻잔을 슬쩍 밀어내었다. 주변에서 그들에게 이목을 집중하던 귀족들의 얼굴이 굳었다. 황후가 권한 차 한잔을, 황자비가 거부한 것이다. 다음대의 황후가 될 여자가 현 황후의 손을 거절한 광경에 귀부인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지켜보았다.

“뱃속에 아이가 있어서 뜨거운 차는 마시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세리나는 핑계를 대었다. 어떤 경우에도 저 동방의 차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챔버에 들어가기 전날 밤에도 에스트레드는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의 걱정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그녀는 잘 알았고 세리나 자신도 사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코 저 차를 더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이라…그렇지, 그대는 회임을 했지.”

라일리아는 눈썹을 올렸다. 괘씸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오히려 호기심이 느껴졌다. 황후는 몸을 기울여서 세리나의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아랫배 쪽으로.

“아이를 밴 기분이 어떤가?”

황후의 말투는 순수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어투는 마치, 가축이나 애완동물이 새끼를 가진 광경을 보며 하는 말과 같았다. 그 뉘앙스를 눈치채지 못한 귀족의 여인과 남자들은 부채 속으로 숨어 낄낄거리고 웃었다. 임신이라는 단어에서조차 음란함을 발견하는 희한한 자들이었다. 세리나는 최대한 공격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답했다.

“아직 별다른 느낌은 없습니다. 가능한 조심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라일리아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황후의 얼굴이었으나 세리나는 뭔가 소름이 끼쳤다.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는 황후 라일리아 로마나는 현재 죽은 자였다. 육체는 살아있으니 그 영혼이 죽은 것이 당연하다. 저 몸을 움직이는 자는 저 먼 동방에서 온, 정체를 알 수 없고 나이가 많은 어떤 마법사.

“그래...그런가.”

황후의 검은 눈이 천천히 주변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슈엔이 없어. 나의 며느리. 아직도 준비가 덜 끝났다고 하던가, 케린?”

황후의 뒤에 선 수호기사는 그녀의 귀에 답을 속삭였다. 라일리아는 손에 든 부채를 팔락였다.

“그럼 데리고 오도록 하게...준비가 모두 끝났다는군.”

세리나는 황후의 눈에 스치는 웃음을 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정원의 문 앞에서 비틀거리는 여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슈엔 대공녀 전하?”

곁에 선 안나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검은 머리, 큰 키, 분명히 슈엔 로마나가 맞다. 슈엔의 몰골은 끔찍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다소 창백하기는 해도 멀쩡했던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바싹 말라 해골처럼 보였다. 푹 패인 안구 부분에 검은 그림자가 졌다.

수행원 한명도 없이 여자는 비틀거리며 정원을 들어섰다. 슈엔의 드레스는 형광빛에 가까운 밝은 노란색이어서 해골같은 그녀의 모습과 기묘할 정도로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의 몰골을 보고 정원을 가득 메운 이들 사이로 적막과 긴장이 흘렀다.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숄 안의 나이프를 잡았다. 사람들이 앉은 정원의 중간까지 온 슈엔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히죽 웃음이 지어졌다. 창백한 입이 거의 귀까지 찢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냐.’

다음 순간, 거의 얼굴의 반정도를 차지한 슈엔의 입에서 검은 그림자가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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