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황궁의 지하로 통하는 길은 거대했다. 계승의 방은 사실 하나의 방이라기엔 동굴에 가까운 곳이었다. 대신관과 황제를 수행하는 행렬이 그 안으로 들어서고 유이한 서열자인 에스트레드와 레드포가 그 뒤를 따랐다.
중앙궁은 모든 예식과 공식 일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천정은 하늘을 찌를듯 높았고, 부분적으로 마련된 2층과 3층은 예식을 준비하기 위한 높은 분들의 대기실이었다. 중앙궁을 둘러싸고 있는 황자궁들은 넓은 정원 너머로 높은 담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온통 여름의 풀과 나무 향기로 가득한 잘 조경된 정원의 대로로, 에스트레드와 세리나의 결혼식 때에 못지 않게 화려한 길이 열렸다. 둘의 결혼식 당시가 화려하고 화사한, 사랑스러운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사치스럽지만 장중하고 묵직한 색조였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에스트레드의 손을 잡고 동행한 세리나는 흘긋 대신관의 뒤를 보았다. 흰머리의 제너드 뒤로 따르는 최고신관의 손에는 벨벳 장막이 드리워진 석판이 모셔져 오고 있었다. 아마도 에스트레드의 이름을 새겨낸 석판일 것이다. 애초에 마녀인 황후와 척을 졌으니 대신관이 레드포의 이름을 적었을 리는 없었다.
‘그때 대체 왜 그랬을까.’
선대든 그 전이든 별다른 문제 없이 새겨졌다는 계승자의 이름은, 대신관의 신성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리나는 그것이 불길했다. 차라리 레드포의 이름이 적혀졌다면 마음 놓고 그 이후의 계획을 도모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이해도 예상도 할 수가 없었다.
석판이 불량품이었겠지, 라고 에스트레드는 가볍게 말하고 지나갔으나 정말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태양의 신전에서 계승자를 써넣기 위해 사용하는 기록용의 석판은 철저히 신관들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황실의 혈족과 서열자를 결정하는 신성한 광석은 저 멀리 북쪽에서 캐오는데 극소량이다. 그만큼 신관들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천일의 수행을 거쳐 정성스럽게 대신관을 위한 황족의 석판을 만들어낸다. 불량품? 그런 것이 만들어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뜻이다. 황자 역시 그 사실을 알 것이다.
그녀는 부드러운 엠파이어 드레스 위로 깍지를 끼고 아랫배를 내려다 보았다. 임신 때문인지 세리나의 몸은 살짝 부드럽게 살이 붙었다. 근육으로 단단히 단련되었던 몸이 말랑거리게 바뀌는 느낌이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육체에 민감한 세리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은 임신을 맞이하여 그에 걸맞게 풍성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걱정 마라.”
에스트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아내를 내려다 보았다. 계승식에 들어가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명목 하에 사흘을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다. 발렌2세는 자신의 어린 동생을 살해하고 그 혼자만이 살아나왔다. 발렌1세는 이미 사망했을 당시이므로 대신관만이 피투성이가 된 젊은 발렌2세를 따라나와 황제가 결정되었음을 선포했다. 아주 비밀스러운 소문이었으나 당시 계승의 방에는 몸이 세로로 갈라진 어린 막내 황자의 시체가 그대로 놓여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간혹 아버지에게서 듣던 이야기로 에스트레드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발렌2세는 흉포하고 입이 가벼운 남자였다. 가끔 술에 취해 어린 아들의 곁을 지나치다가,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면서 동생을 살해했던 일에 대해 스치듯 이야기했다.
“조심하십시오.”
세리나는 조용히 속삭이고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고요하게 그녀가 물러나는 뒤로, 창백한 안색의 슈엔 대공녀 역시 레드포에게서 물러났다. 그녀는 오히려 이전의 만남에서보다 안정되어보이는 얼굴이었다. 세리나는 그녀를 흘긋 보았다가 에스트레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발의 황자는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렸다. 사람들의 발 아래로 두터운 붉은 카펫이 깔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황금색의 머리카락을 부분부분 땋아서 늘어뜨린 채 세리나는 걸어가는 황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수행원과 신관들이 따라가지만 곧 시간이 다가오면 챔버의 문이 닫히고 네명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에 있는 것은 에스트레드 로마나다. 십여년 동안 그를 수호기사로서 지켜봐온 세리나는 딱히 불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하다고 세리나는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뒤쪽으로 황후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올려 묶고 짙은 보라색의 옷자락이 긴 드레스를 입은 라일리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시녀와 수행원들의 무리가 세리나를 압박하듯 바싹 다가왔다.
“에스트레드가 갔군.”
“그렇습니다. 사흘 뒤 뵙게 되겠지요.”
라일리아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어딘가 억지로 입을 찢은 광대의 가면이 생각나는 기분 나쁜 느낌으로 웃는 얼굴이다. 세리나는 난생 처음 웃는 사람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뒤로 물러서 허리를 굽혔다.
“허락하신다면 이만 가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아, 그래. 피곤하겠지.”
검은 머리의 황후가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검은 눈이 휘어져서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임신했다고 했지? 아이를 가졌다고.”
황후의 두 눈은 분명하게 세리나의 아랫배를 노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황자비는 한발 더 뒤로 물러섰다.
“먼저 축하의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내가 영 바빠서 말이지.”
“아닙니다, 황후 폐하.”
“곧 선물을 보내지. 이번 세대 첫번째 아이인데 그냥 지나갈 수야 있나.”
미소를 지으며 라일리아는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창백한 얼굴의 슈엔 로마나에게로 꽂혔다. 무언의 지시에 슈엔은 말없이 앞서가는 황후 일행의 뒤를 따랐다. 세리나에게는 시선 한끝도 주지 않은 채였다.
황자비는 잠시 멀어지는 황후와 대공녀 일행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넓디넓은 중앙궁의 홀 너머로 모두의 그림자가 사라진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흘, 황자비로써 에스트레드 없이 처음으로 맞는 황궁의 시간이었다.
*****
‘선물을 보낸다고 했지 초대장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세리나는 다소 난감한 얼굴로 황후의 초대장을 내려다 보았다. 곁에 선 벡스 레넌이 우적거리고 밀푀유를 씹으면서 초대장을 넘겨다 보았다.
“뭔가요, 그 레이스에 분홍색인 것은? 제가 아는 세리나 리엔 전하와 아주 안어울리는 조합입니다만.”
“그런 소리 마세요, 벡스! 세리나 전하께서 얼마나 여성스럽고 아름다우신데!”
괜한 소리를 했다가 레이디 휘에리에게 등짝을 얻어맞고 벡스는 말없이 나머지 밀푀유 조각을 입안에 넣고 꿀떡 삼켰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사흘간 불안하다고 여겨 에스트레드가 벡스를 황자궁 안으로 불러들였다. 덕택에 용병대장은 황자궁의 디저트를 마구 축내는 중이었다.
“황후 폐하의 티파티지요? 어차피 궁 안에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들이 없으니 여성들끼리 친목을 다지자고 여는 것일 겝니다.”
“글쎄요, 가도 될지.”
세리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칼만 안들었다 뿐이지 황후는 분명하게 자신을 없애고 싶어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실은 확실했다.
‘아니...사실 이유도 명확할지도.’
라일리아가-혹은 라일리아의 육체를 점거하고 있는 영혼이 만약 동부에 애착을 지니고 있는 어떤 자라면…
그녀는 에스트레드와 함께 했던 삼년 전 동부 내란기를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동왕국의 잔당을 전부 쓸어버리고 개선장군으로 수도에 귀환했던 시절. 동왕국의 후손은 생각보다 질기게 살아남아 저항도 격렬했다. 여기서 지면 정말 그들의 조국은 끝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어서였는지 모른다.
세리나 역시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 그녀는 기사였고 군인이었으니 거기에 대해 후회를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주군을 위해 행한 전쟁이니 거기서 물러난다면 그야말로 수치였을 게다. 그러나 에스트레드는 세리나 정도가 아니었다. 일개 기사나 병사가 감히 쫓아가지 못할 수준의 힘을 지닌 로마니엔의 제1황자로써, 그의 힘이 지나간 곳은 폐허가 되었다.
‘우리가 마지막 전쟁이었지.’
에스트레드 로마나의 동부대륙 정복을 끝으로 내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동왕국의 공식적인 멸망이 선포된 것은 이미 한세기도 전의 일이었으나 그 잔재가 사라진 것은 제1황자의 손에 의해서였다. 혹자는 멸망보다 더한 수준인 멸족이라고 불렀다.
“세리나 전하의 임신 축하를 위한 티파티이니 가지 않으시기도 좀 곤란하시겠어요.”
휘에리는 초대장을 들고 난감한 얼굴을 했다. 황후는 매우 노골적으로 세리나가 불참하지 못하도록 티파티의 초대장을 써놓았다. 제1황자비 세리나 리엔의 경하할만한 임신을 기념하며...라니.
세리나는 이마를 문질렀다. 자신의 몸은 조금씩 약해져가는 상황이었고 곁에 황자는 없었다. 하지만 싸움을 거는 데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적장이 직접 전장으로 초대하는 데야 별 수 없죠. 자, 준비하러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