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이건 그냥 있을 일은 아니야.”
에스트레드는 눈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세리나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폐하께 말씀 드리셔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지금 별다른 활동이 없으시다 한들 제국의 황제신데요.”
“...글쎄.”
은발의 황자는 손을 내려다 보았다. 이렇게 큰 사건이 있다면 부친이자 이 나라의 지배자인 발렌2세에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잘못하면 제국의 지배계층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황제를 믿을 수가 없었다. 죽은 자, 사망한 라일리아 로마나의 곁에서 몇십년을 지낸 자다. 그 역시 정상은 아닐 것이 당연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안내키신다면...폐하를 직접 뵙고 의중을 먼저 알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의중.”
“현재 저희의 직언을 받으실 수 있는 상태신지요. 여러모로 한번 뵙기는 해야할 것 같습니다만.”
“아, 귀찮군.”
세리나의 말이 맞다. 황제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를 알아볼 필요는 있었다. 완전히 황후의 편이 되어 그들을 찍어누를 수준인지, 아니면 뭔가 틈이 되어줄 수준인지.
에스트레드는 귀찮은 짓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느릿하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전하!”
놀란 세리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농담이야 농담.”
황자는 씩 웃었다. 물론 백퍼센트 농담은 아니라는 사실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어차피 로마니엔은 힘의 논리로 창건되었고 여태까지 지배되었던 제국이야. 반란 따위 뭐 어때서?”
에스트레드는 농담처럼 말했다. 사실 반란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그가 받을 제위가 아닌가. 황제가 거슬린다면 황제를 치울 뿐이다. 현재로 오면서 많이 줄고 문화 역시 부드러웠지만 본래 제국의 역사에서 아들에게 살해당한 황제는 많고 많았다.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세리나를 향해 그는 웃어보였다. 임신한 아내를 봐서라도 제위 계승은 얌전히 이루어지는 편이 좋다. 레이디 휘에리의 남편 카스가드 백작의 수도 방위군을 우군으로 끌어들였고 수도 용병길드의 수장 벡스 레넌 역시 그의 수하였지만 제국군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황제와 정면 대결은 피하는 것이 유리하기도 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겠다. 약속하지.”
그는 세리나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지만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떻게 에스트레드님의 행동을 제약하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녀는 아내였지만 동시에 주군을 따르는 기사의 자세도 아직 버리지 못했다. 전쟁과 흡사한 지금 상황에서 에스트레드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잘 알기도 했다.
“그럼 폐하께 잠시 알현을 드리고 오겠다.”
아내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그는 황제의 중앙궁으로 향했다. 먼저 정보를 주기 전 그의 상태를 확인해볼 심산이었다. 밀렌 한명만을 대동한 채 그는 말을 타고 달렸다. 어차피 황제는 요사이 거의 일정이 없었고 미리 연락했을 때 잠시의 시간은 금방 허락받았다.
며칠 동안 아무도 보지 않던 발렌2세의 상태로는 예상 외의 반응이었다.
정식 알현은 아니었기에 에스트레드는 별궁으로 안내되었다. 휴식을 위해 지어진 황제의 별궁에는 여름의 장미가 만발해 향기로웠다. 정원 한가운데 황제가 앉아있었다. 다행히 황후는 없고 혼자였다.
“폐하, 제1황자 에스트레드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자는 그의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아 인사를 올렸고 발렌2세는 귀찮은 듯한 손짓으로 일어나라 명했다. 일어선 에스트레드는 황제의 곁에 마련된 흰 철제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이냐, 사적인 만남은 아주 오랜만이구나.”
“곧 계승식이니 인사라도 드릴 겸 왔습니다. 결혼식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렇다면 네 반려와 함께 왔어야지, 그 페로몬이 고약한 여자애 말이다. 음 아니. 고약하다기엔...창녀 같다고 해야하나.”
에스트레드는 잠깐 말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라 뻔 했지만 그는 차분하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잊고 있었지만 발렌2세는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사내를 꼬여내는 냄새를 항시 풍기고 다니는 수호기사라니 놀라운 일이었지. 네가 품고 돌 때부터 관심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정말 결약까지 맺을 줄은 몰랐다.”
굳이 말하자면 클리스 로마나와 지극히 비슷한 성격의 남자였다. 입이 더럽고 성격 역시 거친.
‘열등감 덩어리인 것까지 닮았지.그래도 그나마 최근에는 본성을 숨긴다 했더니 나이 먹고 도로 나오는군.’
에스트레드는 애써 경멸감을 숨겼다. 그의 부친은 선대 황제인 발렌1세에 대해 극도로 언급을 꺼렸다. 자신과는 달리 빼어난 지배자이자 정복자였던, 능력치로도 제국 역사상 최고를 찍었다는 선대 황제에 대해 열등의식이 높았던 탓이었다.
발렌2세는 느릿하게 테이블 위의 차를 마셨다. 말갛고 부드러운 향이 피어올랐다. 동방의 차를 황제에게까지 마시게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 왜 왔지? 용건을 말해라.”
황제는 흐릿한 은청색 눈동자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에스트레드는 그래도 예의상으로나마 물어보아야 했다.
“아뇨, 정말로...이제 제가 제위를 받을 때가 되었으니 어린 시절 일도 생각이 나고 해서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제위. 네가 받는다고 아주 단정을 짓는구나.”
“아닐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어떻든 무슨 상관이냐.”
발렌2세는 낄낄 웃었다. 제국의 수장답지 않은 천박하고 경박한 웃음소리였다. 에스트레드는 평온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억하십니까? 이곳 정원이었죠, 제게 아버님께서 처음으로 목제검을 주셨던 때 말입니다. 진검처럼 잘 다듬어진 것이었죠.”
“음...그랬나.”
발렌2세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미소를 띄운 에스트레드의 얼굴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그런 일도 있었지. 내가 지금 기억이 흐리긴 해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네가 어릴 때는 내가 참 잘해주지 않았더냐.”
“어디 빠지지 않는 부친이셨습니다.”
“그래, 아무렴. 어린 아이라 목제 검을 먼저 줬었지? 작은 손에 진검은 위험하다.”
“그래도 훌륭히 만들어져 진검 못지 않았습니다. 기억 나시죠? 장인이 만들었던 화려한 검신.”
“넌 제국의 황실의 장손이야, 그 정도는 당연하지.”
황제는 뻐기는 것처럼 말했다. 명확한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그는 몇마디 더 검에 대해 주절거렸다.
“그럼 계승식 때 뵙겠습니다.”
에스트레드는 몇마디 더 겉치레 인사를 하고 황제와 황후의 덕성에 대해 치하했다. 발렌2세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미소를 띄운 채 그의 말을 들었다. 다소 백치같은 인상이었다.
황후나 레드포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도 더 꺼내지 않은 채 에스트레드는 황제와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돌아 나왔다. 정원에서 황제는 여전히 몽롱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황자가 말에 오르자 그림자처럼 밀렌 바스트가 나타나 곁으로 다가왔다. 검은 말을 탄 수호기사를 보고 에스트레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너무 예상대로라 우스울 지경이었다.
“잘 되셨습니까.”
“그래, 저 자는 이제 내 혈연상 부친도 아닌 모양이다.”
에스트레드는 비웃듯 말했다. 밀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아함이 서린 얼굴을 보고 황자는 웃었다.
“아버지는 내게 검은 커녕 책 한페이지도 자신의 손으로 줘본 적이 없다. 그건 제국의 기본이지. 황제와 황자는 언제든 역전되어 잡아먹힐 수 있는 위치. 황제의 양육은 방관뿐이다.”
로마니엔의 황제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면 검을 준 것으로 착각 자체를 할 수 없는 일이다. 제국의 문화는 뿌리깊었다. 아들, 특히 장손에게 아비는 결코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자신의 손으로 쥐어주지 않았다. 그 스스로 무기가 될 혈통들이었기 때문에.
“저쯤 되면 정신이 이상하다기 보다는 아예 다른 인간이라고 봐도 될듯 하다.”
“정신지배란 그런 것이지요.”
밀렌은 침울하게 말했다. 그 역시 발렌2세를 좋아해본 적은 없지만 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었다는 사실은 우울한 소식이었다.
*****
두문불출하던 황제가 움직였다. 불과 며칠 남지 않은 황위 계승식 전 모든 일정을 간략화하라는 전례없는 명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진행해야 하는 예식은 있었다.
황자들 둘을 불러들여 태양신의 대신관과 함께 황제가 서열을 정해야 했다. 제국민 모두의 소리를 듣는다는 식의 의미에 따라 기본적으로 사흘이 걸리는 예식이었다. 사흘 동안 대신관의 지휘 하에 식이 치러졌고 서열자 두 사람은 중앙궁의 지하에 위치한 계승의 방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대신관이 계승자의 이름을 새긴 석판을 들고 나와 황제와 동의한 순간, 다음대 황제의 이름이 선포된다.
에스트레드와 레드포 모두 결약된 반려가 있고 그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일단 이 로마니엔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황족 서열자라는 자체가 계승의 후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 한명의 서열자 클리스 로마나의 생사는 이미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자신을 잃은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 이미 클리스는 실질적인 경쟁자의 자격을 잃고 있었다.
“황후 쪽에서 대신관을 먼저 치고 그 후에 자기 사람을 앉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게 목적은 아니었던 거지.”
여름의 공기가 후덥지근하지만 제1황자궁은 에스트레드의 냉기로 인해 서늘했다. 그가 살아있는 한 이 황자궁의 차가운 공기는 바뀔 일이 없을 것이다. 세리나는 이 궁 안에 있는 한 언제나 에스트레드의 품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포근하면서도 서늘한 한기. 기분 좋은 신선한 공기의 냄새.
에스트레드는 호보프와 시종들의 손길 아래 완전한 의장을 갖추어 입었다. 짙은 푸른 색의 매끄러운 예복과 흰 허리띠, 그 옆으로 롱소드를 찼다. 손잡이가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조각되고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아름다운 검이었지만 결코 의장용은 아니었다.
“가능하면 실전용 클레이모어를 가져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눈에 띄니까 말이야.”
전장에서 그가 휘두르던 거대한 클레이모어는 들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눈에 띌 것이다. 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전쟁터에서도 다른 기사가 들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그에게 건넬 정도였으니까. 황제 앞에서도 무장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인 에스트레드는 계승식이라고 마음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짙은 자주색의 빌로드 망토를 둘러 옆으로 넘기고 에스트레드는 세리나를 내려다 보았다. 황자들이 계승식을 위해 들어가면 황자비들은 각자의 궁에서 태양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세리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남편의 뒤를 따라 수호기사의 자격으로 따라들어가고 싶었지만 계승식에는 수호기사마저 참관의 자격이 안된다. 들어가는 것은 오직 황제와 대신관 뿐이다.
아름다운 금발을 등 뒤로 늘어뜨린 황자비는 넓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황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 위로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흩어져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임신으로 인해 세리나의 흰 얼굴은 더욱 희어져 대리석 같았다.
그녀를 사흘이나 혼자 두어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에스트레드는 눈을 찌푸렸다.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가진다는 변수는 예상 외였던 탓이다. 세리나는 강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지금은 대단히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몸을 조심하고 있어라.”
에스트레드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의 따뜻한 손에 얼굴을 기대고 세리나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비볐다. 이 정도의 어리광 쯤은 그녀가 아내로써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였다. 에스트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사흘 뿐이니까요, 금방 지날 겁니다.”
세리나는 마주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그녀 자신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는 동방의 차 사건 쪽이었다. 아예 정신이 이상해진 황제 때문에 사건을 공표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계승식이 끝나고 나서 황제의 자리를 손에 넣은 뒤에야 가능했다. 라일리아 로마나가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