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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06화 (106/142)

<-- 역습 -->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밀렌이 말 끝을 길게 끌었다. 생각에 잠겼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검은 머리에 평범한 인상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신계 마법에는 영혼을 분리해내는 것은 물론 다른 이의 영혼과 섞거나, 후대에 그 일부를 남기는 것까지도 가능한 마법들이 전해져. 하지만 일단 전승되는 기록에 나타나있을 뿐이고 실제로 그 마법을 행하는 자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레너드 볼프라면 어떤가, 밀렌?”

“역사상 가능했던 자라면 그 밖에 없겠죠. 가장 강한 마법사였고 동시에 정신계 마법의 마지막 전승자이기도 했으니까.”

세리나는 녹색 보석을 햇빛에 비춰보았다. 반짝이는 보석은 은은히 마나를 흘렸다.

“그렇다면 캐딜럿의 연구실에 나타났던 남자는 정말 영혼일 수 있다는 이야기군.”

“내 생각에는, 맞아.”

“그럼 마법사가 자신의 영혼을 다른 이의 육체에 옮기는 것도 가능한가?”

“영혼을 다른 사람에게?”

밀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의심을 하는 거야, 세리나? 혹시 황후의 몸에 지금 있는 영혼이…”

“다른 이의 영혼일 수 있겠지. 어때, 가능할 것 같아?”

황자비의 녹색 눈이 그림자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밀렌은 눈을 찌푸렸다.

“아마도...하지만 영혼 분리에는 아주 강한 마법사라도 한명의 마나로는 안될 거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마법 시전시 드는 초기 마나와 준비작업이 혼자로는 절대 안된다고. 라일리아 로마나는 확실히 강한 마법사지만 지금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로는 턱도 없어.”

“그렇군. 그럼 보조자가 있다면 가능하긴 하다는 말이로군.”

“정신계 마법의 구조와 기본 체계를 볼 때 분명히 가능이야 하겠지만…일단 영혼을 분리할 수 있는 마법사가 레너드 볼프 정도였을 텐데 그는 이미 두세대 전에 죽은 자야.”

세리나는 친구로부터 시선을 돌려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실의 위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유화가 눈에 들어왔다. 에스트레드가 대륙 제일의 화가를 불러 궁 전체를 장식할 때 그려진 천장화였다. 흰 날개의 천사와 검은 악마가 싸우고 있었다. 빛을 내는 성검을 든 금발의 천사, 그림자와 어둠에 감싸인 검은 머리의 악마. 언뜻 긴 검은 머리의 악마의 얼굴에서 라일리아 로마나를 읽어낸 세리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피곤한가?”

에스트레드가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팔할이 세리나의 몸상태였다. 그의 손을 쥐면서 아내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에스트레드님.”

“조금 자자.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과연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문득 줄리엣으로부터 선물받았던 붉은 동방의 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향긋하고 마시면 힘이 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꽤 많이 마셔버렸던. 불길한 색이라 버리려고 했지만 한번 맛을 본 이후 계속 생각이 났다.

하지만 잠이 더 많이 쏟아졌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녀는 남편의 따스한 품에 고개를 묻었다. 너르고 푸근한 가슴을 내주면서 에스트레드는 아내의 뺨을 쓰다듬었다. 세리나는 졸린 와중에도 중얼거렸다.

“생각해봐, 밀렌. 너는 동방의 피를 이어받은 자잖아.”

*****

침대 위에 누운 세리나는 옷을 벗는 에스트레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곁에 누웠다. 황자비는 매끄러운 어깨를 드러내는 얇은 슬립 원피스만을 입고 얄팍한 차렵이불 밑에 누워있었다. 화려한 금발은 임신 이후에 조금 더 그 색이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마수들이 묘하게도 조용하군요.”

“어둠숲도 다시 고요해졌다. 오히려 기분이 나쁘군.”

한참 숲 전체가 뒤집어질 정도로 마수의 수가 늘어났었다. 방랑자의 마을은 그 덕에 인구 수가 삼분의 이로 떨어졌을 정도였다. 마을의 사람이 폭주하고 그대로 곁에 있는 주민을 공격하니 막을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에스트레드가 기사단을 이끌고 최대한 막아내고 많은 수를 살해했지만 폭주하는 확률을 줄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마수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어, 오히려 이전보다도 소란이 줄어들었다. 마수는 세계의 경계 너머 마족의 부림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마나의 영향으로 인해 특정 능력이 과도하게 증폭되어 신체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부서져버린 생물이라고 보는 쪽이 정확했다.

“실험이 끝난 게 아닐까요.”

“아마도. 그래서 더 긴장을 하고 있어야 되는 거지. 황후가 어떤 단계를 넘어섰을 테니까.”

“동방의 일원으로 제국에 원한이 있다면 제국의 몰락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겠죠.”

세리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실과는 달리 침실의 천장은 부드러운 색감의 구름과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천상을 향해, 제국의 수호신인 태양신을 향해 솟구치는 수많은 천사들 중에는 역대 로마니엔의 황제들의 얼굴을 인용하여 그려진 것이 많았다. 로마니엔의 황족들은 대대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사치스러운 유화의 풍성한 색감 속에서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황실 특유의 은청색 머리카락과 로마니엔 제국의 전형적인 화사한 금발. 천사처럼 사랑스럽고 혹은 차가운 미모들이 신과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정말 선한 자들이었을까.

세리나는 조용히 제국의 역사를 되새겼다. 선천적으로 강한 능력의 혈통을 타고 난 로마니엔의 초기 황족들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며 나라를 넓혔다. 끝없는 정복전쟁. 손속은 언제나 잔인했다. 평원 한가운데서 시작한 로마니엔은 곧 대륙 전체를 지배하며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 속에 희생자들의 피가 흘러든 것은 물론이었다.

“동왕국은 큰 국가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대전의 발렌1세께서 처음으로 정복하셨다고 했는데…레너드 볼프 역시 그때 사망했구요.”

“그래. 동왕국 왕실의 혈통 역시 보통 사람보다 긴 수명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로마니엔 정도는 아니다. 레너드 볼프는 당시에 죽었고, 후손도 전부 죽었다고 전해졌다. 한명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에스트레드는 삼년전 내전을 종식하며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두었던 소녀를 기억했다. 그의 기억은 그리 감상적이지 않았다. 적국의 마지막 후손이었으니 죽이는 게 당연했고 그리 슬프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그건 그저 전쟁의 끝자락일 뿐이었다.

“내전 당시에 마지막으로 굴을 지키고 있던 여자애가 있었어. 볼프의 방에 있었으니 그 후손이 분명했지.”

“...”

“내가 죽였다. 적국의 왕손을 살려두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으니까.”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군인으로서 에스트레드의 말이 맞다는 걸 안다. 하지만 동시에 꺼림칙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국의 역사가 피로 얼룩졌다지만 그것을 현재에도 되풀이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 건가.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쉬는 아내의 속내를 알고 황자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세리나 리엔은 언제나 독립적이고, 그녀의 주군보다 더 윤리적인 기준을 가진 기사였다. 당연히 전쟁시 이루어지는 어린 아이나 약자에 대한 학살에 고민을 했다. 에스트레드는 거기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고집불통인 면이 더 사랑스러울 정도였다.

세리나는 에스트레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은발이 얼굴 주위로 흘러내렸다. 대리석같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황자비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초기라서 좀 불안하지요.”

“그래. 안된다.”

에스트레드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는 언제나 아내를 안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몸상태를 고려하지 않을 만큼 욕정에 휘둘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세리나는 그의 단호한 대답에 미소를 더 크게 했다.

그녀는 나란히 누워있다가 몸을 돌려 완전히 남자의 품 속에 몸을 묻었다. 너른 에스트레드의 품 안은 따스하면서 부드럽고 강인했다. 세리나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려 그의 남성을 잡았다. 손안 가득히 차는 남성이 제법 단단했다.

“세리나.”

그가 만류하며 여자의 손을 밀어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남자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예민한 성기에 닿는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에스트레드는 몸을 굳혔다. 세리나는 많이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하지만 능숙하다기엔 모자람이 있는 손으로 그의 남성을 비볐다.

에스트레드는 천천히 아내의 목덜미와 가슴 위로 입을 맞췄다. 하얗고 보드라운 뺨과, 매끄러운 목과 어깨. 손가락으로 얇은 천 위 둥근 가슴을 쥐고 가운데 유두를 손톱으로 긁자 세리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자칫 흉폭해지려는 자신을 애써 가라앉히면서 황자는 아내의 다리 사이 깊은 곳을 손가락 끝으로 찾았다. 허벅지 사이를 조금 벌리고 그 안을 더듬자 손가락 끝에 습하게 젖은 더운 동굴이 느껴졌다. 그는 손톱으로 그녀의 성감대를 찾아 긁고 애무하면서 아내를 끌어안았다. 다리를 벌려 남자를 휘어감은 채 세리나의 두 손이 황자의 남성을 감싸고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눈 앞이 하얗게 변하며 절정이 찾아왔다. 세리나는 몸을 웅크리며 에스트레드의 품 속으로 더 깊이 안겼고 에스트레드는 아내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몸을 결합하는 것만큼 강한 절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한 충족감이 전신을 가득 채웠다. 절정이 끝난 후에도 작은 쾌락들이 간헐적으로 찾아와 아내는 몸을 움찔거렸고 남편은 그런 그녀를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이제는 이런 짓도 먼저 할 줄 알고.”

에스트레드가 놀리듯 말하며 웃었다. 세리나는 다소 부끄럽긴 했지만 일부러 대담하게 입을 삐죽였다.

“결혼식도 치른 부부입니다. 못할 일도 없죠.”

눈을 크게 떴다가 황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피부 위로 땀이 희미하게 젖었다. 세리나는 노곤한 기분으로 에스트레드의 품 안에서 눈을 깜박였다. 곧 잠이 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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