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04화 (104/142)

<-- 역습 -->                라일리아 로마나의 이름 위에서 검은 색이 씻은 듯 사라졌다. 피처럼 새빨갛게 빛나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보면서 대신관 제나드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노년의 대신관의 손바닥은 마력과 신력의 충돌로 인해 붉은 화상이 남아 뜨거웠다. 그는 손을 움켜쥐며 말없이 황후의 이름을 내려다 보았다.

“황후 폐하의 이름이 붉은 색…”

세리나는 믿기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섰다. 에스트레드가 만류했지만 그의 손을 밀어내고서였다. 황실의 가계도 위에서 붉은 이름이라는 사실은, 이미 죽음의 운명을 맞은 자라는 뜻. 그녀는 대신관을 돌아보았다.

흰 머리의 신관은 얼굴에 언뜻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눈이 불타고 있었다. 감히 신성한 신전의 가장 깊은 곳, 황족의 가계도 위에 신성력으로 새긴 황후의 이름 위를 그림자 마법 따위가 덮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대신관에게는 큰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황족들의 기록을 관리하는 신전에서 이렇게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데 있었다.

“붉은 색의 이름.”

에스트레드가 낮게 말했다. 그 역시 충격을 삭이느라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이건, 현재 황후가 죽었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가계도 위에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이름들은 전부 선대 황족들이었다. 죽어서 사라진 자들. 라일리아 로마나의 이름은 그 밑에 존재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망의 의미지요.”

대신관은 마침내 신음처럼 답했다.

“이게, 이게...가능한 일입니까? 아니, 그렇다면 지금 황제 폐하와 같이 있는 황후 폐하는 대체…”

세리나는 약간 어지러운 기분으로 머리를 짚었다. 가계도 위에 선명한 사망자 라일리아 로마나와, 현 황후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말이다.

“...의료술사의 기록도 살펴봐야겠군요. 황족들의 건강을 실제로 관리해오는 것은 그들이니까.”

“그래야겠지요…”

대신관은 충격을 받은 채 가계도를 더 자세히 살폈다. 손이 욱신거렸지만 거기에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고어로 되어 나머지 두 사람은 읽지 못하는 부분을 읽어내렸다. 대신관이 다시 한번 낮게 신음했다.

“심지어 아주 오래 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군요.”

“언제쯤이죠?”

“...태어나자마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주일 째에 숨을 거둔 시각이 나타납니다.”

“....”

“신께서 부여하신 육신의 생명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 기록에는 거짓이 있을 수가 없지요.”

이쯤되면 동일인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신생아를 가로채 바꿔치기하고 황족으로 길러낸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황실에 알리고 위험한 자를 제거해야…”

대신관은 당황한 가운데 결연한 얼굴로 챔버를 나서려했다. 하지만 에스트레드가 그의 팔을 잡고 말렸다.

“아직은 공표할 때가 아닙니다.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는 라일리아 로마나를 보면서 귀족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도 없고요.”

“아니, 그렇더라도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여자를 황제 폐하 곁에 계속 있도록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뇨, 만약 그 여자가 황제 폐하를 해치려 했다면 수십년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불과 며칠 정도 유예기간을 둔다고 해서 사고가 날 위협은 극히 미미하지 않겠습니까.”

황자는 침착하게 반대 의견을 말했고 잠시 생각하던 대신관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에스트레드 부부를 이곳에 데리고 들어온 것 자체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결코 좋게 비칠 리 없었고 딱히 변명할 말도 없었다. 로마니엔의 긴 역사 동안 지극히 세속화 된 태양신의 신전이 제위 계승 싸움 속에서 아무런 의도 없이 황후가 죽었다고 공표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만약 실제 라일리아 로마나가 사망했고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면…”

세리나가 손가락을 뻗어 가계도 위의 한 이름을 가리켰다. 그곳에 레드포 로마나의 이름이 있었다. 아직 엄연히 검은 색으로 자리하고 있는.

“아 황족의 가계도에 레드포 로마나 전하의 이름은 올라갈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요. 로마니엔 황실의 혈통을 증명하기 위해 그 피에만 부식하는 가죽 위에 피로 이름을 쓴 후 신성력으로 감싸니까요.”

아내의 말에 에스트레드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레드포 로마나는 그렇다면 진짜 황자라는 이야기인데.”

“황제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건가요?”

“물론 일반인 여성이 낳았더라도 황제 폐하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올라갑니다만, 문제는…”

대신관이 황제와 황후의 이름 사이를 잇는 선과 그 아래로 뻗어 레드포 로마나로 이어져있는 선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페로몬과 혈액으로 자신의 친부모를 자연적으로 새기는 이 가계도 위에서, 레드포 전하는 라일리아 로마나와의 아이로 올라가 있다는 점이죠.”

에스트레드가 드물게도 짜증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넘겼다. 이 상황은 당장 설명할 방법을 찾을 길이 없었다.

“죽은 자의 아이라…”

섬뜩한 단어였다.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감쌌다. 생명이 떠난 사자(死子)의 육신에서 나온 아이. 스스로의 생마저 끝난 인간이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기분을 눈치채고 손을 잡아왔다. 아내의 어깨를 끌어안아 그녀를 품 속에 넣은 채 그는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일단 급선무는 석판이겠습니다. 남들 앞에 보이는 것이니 제일 시급하겠지요. 일단 계승식만 넘기면 되니 융통성 있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를 안고 황자는 몸을 돌렸다.

“황후와 레드포의 이야기는 이쪽에서 조금 더 조사를 거친 후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육중한 신전 챔버의 문이 닫히고, 대신관은 조용하게 황자 부부를 배웅했다. 신전의 앞에서 마차를 타고 돌아나오면서 세리나가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을 두개나 봐버렸습니다.”

“그래. 설마하니 태양신의 신전에서 이런 꼴을 볼 줄은.”

그냥 ‘이상한 일’이라기엔 대단히 스케일이 크다. 황자는 혀를 찼고 세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일단 걸리는 건 에스트레드와 레드포 둘 모두의 이름이 제단의 석판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한쪽이라면 제위를 이을 자가 상대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둘 모두가 이름을 거부당했다.

황자 두명의 제위 계승이 전부 운명이 아니라면, 황실의 혈통이 끊긴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더 최악으로 로마니엔이 무너진다는 이야기인가. 황후가 진행하고 있는 검은 속셈이 제위 계승이 아닌 제국의 멸망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세리나는 그 이상을 상상하기가 주저되었다.

또 하나, 죽은 자-라일리아 로마나.

“의료술사들은 황족을 진찰할 때마다 페로몬과 혈액을 동시에 채취해 보관하지 않습니까? 만약 달라졌다면 분명히 보고가 들어갔을 텐데요.”

“대신관이 버티고 있는 태양신의 신전 가장 깊은 곳까지 그림자 마법을 침투시킬 수 있는 여자다. 뭘 했다 한들 놀랍지 않지.”

예상보다 상대의 능력은 넓고 깊은 모양이다. 일단은 의료술사들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차를 모는 마부가 채찍을 더 급히 휘둘렀고 마차는 자욱한 흙먼지를 내며 산기슭을 내려갔다.

*****

“케린, 내 어머니는 죽은 육신으로 나를 낳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레드포 로마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손 안에 불꽃을 피워올렸다. 채 자라지 못한 육신, 비뚫어진 정신. 아마도 죽은 육체를 빌려 태어난 목숨이라 그런가보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알게 된 이후 레드포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성인 남성으로 완전하게 성장한 에스트레드 로마나를 보면 극도로 반발감이 치밀었다. 그 한명으로도 그랬는데 그의 곁에 완벽한 반려로써 세리나 리엔이 등장한 이후 레드포의 질투심과 증오감은 한계를 잃었다.

“내가 화내봤자 어머니의 꼭두각시 주제에 뭘 할 수 있을 리도 없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이미 포기한 지도 오래됐다. 무기력해진 삶 속에서 레드포는 어머니의 숙원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항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는 가끔 궁금할 뿐이었다. 이것저것, 여러가지. 어머니 라일리아가-아직도 레드포는 모친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했다-자신을 과연 아들로 생각하기는 하는지, 영혼과 육신이 일치하지 않는 그녀가 어떻게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지, 오래 전부터 퇴색한 눈동자만 남은 황제는 아직 살아있긴 한 것인지.

혹은 그가 가지지 못했던 ‘진짜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레드포는 첫번째 아내였던 도나 누앤을 생각했다. 처음으로 황실에 들어오면서 긴장감에 떨고 있던, 가녀리고 연약했던 여자. 존재감 없는 외모와는 달리 다가가는 순간 막 물오른 장미꽃 봉오리처럼 터지던 페로몬과 체향. 지금의 세리나 리엔과 비슷한 레벨의 체향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화려하고 짙은 향기의 소유자였던 레이디 도나 누앤.

“잘만 풀렸다면 도나 누앤도 괜찮았을 텐데.”

지금 와서는 늦어버린 소리지만 어쩌면 그녀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끼어들어 그녀를 실험체로 만들어버리지만 않았다면.

처음 그녀가 황자궁 안에 들어와 레드포의 손을 잡았을 때 그의 기쁨은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으로 자신만의 존재가 생겼던 것이다. 그만을 바라보고 그만을 사랑해줄 존재가. 어머니조차 레드포에게 해주지 못했던 그런 관계를 드디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지, 아주 어렸어.’

레드포는 피식 웃으며 찻잔 안의 붉은 찻물을 들여다 보았다. 모친의 눈을 피해 물처럼 마시고 있는 동방의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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