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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03화 (103/142)

<-- 역습 -->                상아로 만든 거대한 양문이 수행신관들의 손에 의해 천천히 열렸다. 지독하게 무거운 문은 소리도 없이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챔버는 어둡고 생각보다 좁았다. 다만 한가운데 붉은 빛을 내는 제단이 있었다. 제단 앞의 석판에는 여태까지 내려온 역대 황제들의 이름이 써있었고, 그 끝은 에스트레드의 아버지 발렌2세에서 끝나 있었다.

“황위 계승자의 이름은 여기 새겨지게 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신이 내린 이름만이 남았기 때문에 로마니엔의 황제는 신의 부름을 받은 자만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 전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지요. 대신관의 신성력으로 새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내려오는 것 같긴 합니다만.”

세리나는 제단에 조금 더 다가갔다. 다음 서열자를 새길 석판은 아직 깨끗했다.

“이름을 적고 나서 석판을 이 밑으로 이어붙이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역대 황제들의 제위를 확인하게 됩니다. 제위 계승자를 지정하는 것 역시 이름을 새긴 태양신의 석판을 확인하는 것으로 증거 삼습니다. 그리고…”

제나드는 석판 주변으로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공간에 희미한 불이 들어왔다. 노란 불빛 아래 펼쳐진 챔버의 공간 안은 가죽으로 된 걸개로 가득 차 있었다. 걸개 위에는 빼곡하게 가계도와 황족들의 이름이 보였다.

“나머지 황족들의 혈통 역시 이곳에서 관리됩니다. 신성력으로 새긴 이름은 해당자가 죽을 경우 자연적으로 붉게 물들죠.”

황제 발렌2세의 치세 하 존재했던 모든 황족들의 가계도가 걸개 위에서 빛났다. 일반적인 인간보다 오래 사는 황제의 특성상 대부분의 가문에서 한번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이 보였다. 윗대는 대부분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신기한 기분으로 세리나는 걸개 위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황족의 혈통이 아닌 배우자의 이름도 나타납니다. 단, 그 결약이 진실할 경우에 한해서.”

에스트레드의 이름 옆쪽으로 자신의 이름이 빛났다.

“그럼 결약이 진실인지 아닌지 역시 알 수 있는 거군요.”

“황족이 아닐 경우에는 그렇죠. 하지만 대부분 혈통을 이어받은 여성들이 황가의 배우자가 되니까 큰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나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세리나의 이름 근처를 두드렸다. 신성력을 지닌 대신관의 손가락 끝이 표면을 건드리면서 세리나의 이름에서 나는 빛이 두드러졌다.

“황자 전하와 황자비 전하의 결약이 매우 공고하다는 사실은 이 선명한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죠.”

뭔가 수줍은 기분이 되어서 황자비는 웃었다. 자신의 이름이 로마니엔 황가의 가계도에 정식으로 올라가 빛을 내고 있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대신관 제나드는 약간 볼이 붉어진 황자비를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인 그는 신선한 기운을 품은 건강한 모습의 세리나 리엔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귀족들의 가식에 굳이 얽매이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도 호감이 갔다.

에스트레드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가계도를 훑었다.

“자, 이제 제위 계승자의 이름을 새겨볼까요?”

대신관은 빈 석판을 제단 위로 올렸다. 성인 남성의 몸체보다 조금 더 넓고 얄팍한 흰 광석으로 되어 있었다. 제단의 붉은 빛에 비추어져 석판 역시 희미한 붉은 빛을 띄웠다. 세리나는 여태까지 제대로 본 일이 없는 대신관의 신성력을 보게 되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빼고 제나드의 손을 들여다 보았다.

“생각보다 별건 없습니다. 전설과는 달리 이 돌 위에 이름을 새길 때 다른 현상이 나타난 적은 없어요. 태양의 신께서 허락하신 신성력을 주입해서 전하의 이름을 새기는 것 뿐이니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석판을 주시하는 두 사람에게 대신관은 멋쩍게 말했다.

“그래도 신께서 허락하신 신성력이잖습니까.”

세리나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위 계승자를 적은 석판은 신전의 정치적 세력을 나타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 자체로 신비감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게다가 태양신의 대신관이란 대륙에서 신을 대리하는 존재다. 물론 많이 세속화된 신전이었으나 세리나 역시 신에 대한 경외감에 예외는 아니라서 기대에 차 있었고, 에스트레드는 귀엽다는 얼굴로 아내의 고운 금발 머리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곧 대신관의 양손에서 풍선이 부푸는 것처럼 부드럽게 빛의 무리가 일어났다. 화사한 노란빛의 신성력이 석판으로 스며들고, 빈 공간 안이 빛났다.

“...”

에스트레드는 대신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오만방자한 인생에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그 대상은 에스트레드의 의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제나드는 자신도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석판 위에 아무런 것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대신관의 손에서 빛무리가 일었고 석판이 빛났다. 또 한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참다못한 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은 제가 힘을 일으킴과 동시에 새겨지는데…”

대신관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세번째 시도 역시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석판을 만지작거리며 황자 쪽을 흘긋 보았다. 엄연히 신성력으로 새겨지는 서열자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혹시 협력한다 말하고 딴마음 먹었다 여길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에스트레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제안했다.

“레드포 로마나의 이름을 한번 새겨보시죠.”

“예? 막내 황자님의 이름을요?”

“시험삼아서 한번 해보세요. 전설이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위를 이을 자만이 이 석판에 이름을 올린다고.”

“그거야 전설이고…”

“그러니까 한번 실험으로 해보시라는 거죠.”

황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의 제안에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양손에 휘감겼던 또 한번의 빛무리는 아무런 소득 없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역시 안됩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클리스 로마나는 사망했다. 남은 황제의 핏줄 두명 모두 이름이 새겨지지 않는다. 뭔가 생각에 잠겨 에스트레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음...이럴 리가 없는데. 어떤 기록에도 이런 건 나와있지 않습니다. 아니 물론, 전설 속의 오백년 전 황제 폐하의 경우 제단이 다른 이의 이름을 거부하고 황제의 이름만을 흡수한 기록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진위 여부 확인이 어려운 신화일 뿐이라…”

당황한 대신관이 애써 허허 웃었다.

“아무래도 광석의 문제일 듯 하니 다른 석판을 준비해놓겠습니다. 신성력에 감응하는 광석으로 만드는 것이라 바로는 되지 않고…”

“아, 예.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정 안되면 저희가 대체재를 하나 마련하죠.”

당황한 신관을 진정시키고 황자가 빙긋 웃었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어차피 제위 계승자의 증거로 삼기 위해 거치는 절차일 뿐이다. 대외적으로는 태양의 신전이 제1황자의 편에 섰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석판에 아무런 이름이 써지지 않는 것은 매우 찜찜했지만, 에스트레드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전설 같은 것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흠. 그런데 이쪽은 먼지가 좀 앉은 건가?”

그는 자신의 윗대, 발렌2세와 황후의 이름을 가까이 보았다. 황제의 이름에 비해 황후의 이름이 색이 조금 다른 듯 했다. 결약의 빛 때문인가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황자는 한걸음 더 다가서 뚫어지게 걸개를 바라보았다.

“...라일리아 로마나.”

이름의 빛깔은 검었지만 동시에 옆의 이름들과 색이 다소 달랐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모를 정도의 미세함이었다. 에스트레드의 말을 듣고 세리나는 제단의 붉은 빛을 손으로 가리고 다시 보았다. 분명히 달랐다.

“색이 다릅니다, 제나드. 어떻게 된 거죠?”

“...색이 다르다구요?”

생전 처음 듣는 말인듯 대신관이 다가와 자세히 보았다. 그의 눈에도 뭔가 다른 빛이 잡혔다. 신관은 낮게 중얼거렸다.

“황족의 혈통 가계도는 그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니까요. 한번 결정되고 나면 색으로 자연히 그의 운명을 알려줍니다. 자세히 봐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원인이 아닌 결과의 문제니까 그럴 이유가…”

“현재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제나드가 눈썹을 찌푸리고 걸개를 보았다. 그의 눈에도 라일리아 로마나의 이름이 아주 미세하게 다른 색을 띄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신성력이 도는 손가락을 그 이름 위로 가져다 대었다.

파직, 하는 소리가 나며 불꽃이 튀어 대신관이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뭐죠?”

세리나가 소매 속에 숨긴 나이프를 잡았지만 에스트레드가 그보다 먼저 그녀의 앞을 막았다. 대신관이 놀라고 의심 섞인 얼굴로 신성력을 강화시켜 손바닥으로 라일리아 로마나의 이름 위를 덮었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더 센 불꽃들이 마구 튀었다. 신관의 소맷자락이 타들어가고 손목 주위에 작은 화상들이 생겼지만 제나드는 개의치 않고 황후의 이름을 틀어쥐었다.

“그림자 마법이야.”

에스트레드가 속삭였다. 환하게 빛나는 대신관의 손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살아있는 거미처럼 꿈틀거리며 발악했다. 그의 굵은 손가락 사이로 터져나오던 어둠은 강대한 신성력에 짓눌려 서서히 짜부라져 들어갔다. 세리나는 거인의 신발 밑에 깔려 터져버린 벌레의 모습을 상상했다.

잠시 후 불꽃과 소리가 잠잠해지자 그가 손을 거두었다. 그 밑에 핏빛으로 새빨갛게 변한 라일리아 로마나의 이름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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