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자꾸만 몸이 차갑고 늘어졌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나쁠 것도 없다. 어깨 부상 때문이었다고 생각한 컨디션 난조가 오히려 임신 때문이었다니 반길 일이다.
세리나는 긴 소파에 반쯤 누워서 에스트레드를 바라보았다. 황자는 그녀의 앞으로 케이크 접시를 밀어주었다. 6주차라 아직 태도 안날 정도로 초기이고, 입맛도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는 둘의 주변에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도록 온갖 음식들을 준비해 두었다. 곱고 섬세한 밀푀유부터 꿀을 바른 딸기와 마른 살구, 크림을 잔뜩 올린 푸딩 케이크까지 입에 넣으면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럽고 단 음식들을 시시때때로 세리나의 입안에 넣어주면서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다른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면, 전하가 아니라고 할 텐데요. 요괴가 둔갑이라도 했나 할 겁니다.”
세리나는 참지 못하고 놀리듯 말했다. 에스트레드는 당연히 무슨 상관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는 여태까지 남의 시선에 크게 상관한 적이 없었고 지금은 더했다. 무려 자신의 아이가 생긴 것이 아닌가! 원래 로마나 황실에서 남성 황족들은 자신의 자손이 생기면 그리 기뻐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신의 경쟁자가 생겼다고 본능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름아닌 세리나와 자신의 아이이기 때문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원 한복판에서 기절했었으니까 밖에 별 소문이 다 떠돌텐데요.”
그 말에도 여전히 에스트레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비록 정원에서는 제1황자궁의 내부인만 있었기에 소문이 퍼질 일은 없었지만, 임신을 진단받은 이후 에스트레드는 매우 당연하게 황궁 내외부에 그 사실을 공표했다. 황자비의 임신은 여러가지를 의미한다. 두 사람 사이의 결약이 그만큼 공고하다는 뜻, 황자의 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 이미 자손을 보아 제위에 오를 준비가 완벽하게 되었다는 뜻. 이런 경사를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비록 세리나 본인은 외부에 이렇게나 소문이 퍼진 줄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만.
그녀가 정원에서 그렇게 쓰러진 뒤로 사흘 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다.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게 된 것이 불과 이틀 전이었다.
가능하면 더 쉬게 하고싶었지만 일정이 빠듯해서 황자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공식적으로 나가야 하는 날이었다. 태양의 신전을 방문해 대신관을 알현해야 하는 일정이 있었다.
“이제 코르셋따위는 입지 마. 가능한 편한 옷으로 입어라.”
아직 티도 안나는 판판한 아랫배 위를 정답게 쓰다듬으며 충고하는 남편을 보면서 생전 처음, 세리나는 팔불출이란 이런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에스트레드의 눈은 다정함을 넘어서 꿀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그녀와 마음을 확인한 뒤로 언제나 다정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뭔가 다른 의미가 추가되었다. 아내로써 세리나는 그것이 민망하고 부끄러우면서 동시에 기뻤다.
시녀 안나가 가져온 옷은 헐렁한 엠파이어 스타일의 허리가 높은 드레스였다. 별다른 불평 없이 그것을 걸치고 세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간 입고 다녔던 드레스가 얼마나 불편하고 무거웠나가 새삼 느껴졌다. 아이는 그녀에게도 소중했으니까 굳이 꽉 죄는 옷을 입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낮은 굽의 새틴 구두를 신고, 그녀를 거의 안아올리다시피 하려는 에스트레드의 팔을 쳐서 만류하고 세리나는 그와 함께 마차를 탔다. 말을 타고 싶었지만 순식간에 정색하는 황자 덕분에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일단 태양신의 신전에 갔다가 황제 폐하께 알현을 드릴 것이다. 가능한 일정을 줄일 예정이니까 피로해도 조금만 참아줘.”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에스트레드님.”
과보호는 민망할 정도였다. 그녀 역시 간혹 배에 손을 올리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지만 황자는 아예 아내의 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아이가 그리 좋으신가 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에스트레드가 신기해서 세리나가 불쑥 물었다. 황자는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다가 빙긋 미소지었다.
“당연하지. 네가 낳을 나의 아이가 아니냐. 너와 내 피와 살이 함께 섞여 빚어낼.”
세리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렇다. 두 사람 사이의 결실. 그 무엇보다 강한 사랑의 증거.
태양신의 신전은 황궁 뒷쪽, 다소 좊은 지대의 산 위에 위치했다. 남쪽으로 문을 내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신전 가득히 받고있었다. 거대한 로마니엔과 강대한 태양의 신. 본래는 대륙에 수많은 수의 신들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로마니엔 제국의 내부에서 다른 신의 종교는 모두 아사한 상태였다. 황제와 동일시 되는 태양신 외에는 전부 멸절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차에 내려 신전의 정원을 가로지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고집을 부려 신전 건물 바로 앞에 마차를 대려는 황자를 만류하고 세리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차로 불과 삼십여분, 매우 가까운 위치임에도 지대가 다소 높아서 공기가 맑았다.
황자가 온다는 소식에 신전의 1층 제단에는 대신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노년의 사내인 그는 세리나 쪽을 잠시 바라봤다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조금 놀란 기색인 그를 보고 세리나는 의아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대신관 제나드?”
에스트레드가 대신 물었다.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임신하셨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습니다만...황손 전하의 기운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져서요.”
“오, 그 먼 곳에서도 아실 수 있습니까. 가까이 오셔야 아시던데요.”
“대신관의 이름을 허투루 달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강하고 건강한 분이시겠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신관의 앞으로 미리 도착해 있던 수행원들이 두 사람의 앞에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그 중에서 에스트레드의 어머니, 메리타 궁부인의 얼굴을 발견한 세리나는 잠시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경하드립니다.”
메리타 궁부인은 눈꼬리를 접으며 웃고 깊이 허리를 굽혔다. 궁부인은 마치 황후를 맞듯이 넓게 스커트를 펼치고 무릎을 굽혔다. 계집애라고까지 부르던 고압적인 자세는 간 데 없었다. 완전히 달라진 그녀의 자세에 세리나는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스트레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귀엣말을 했다.
“이제 너는 신전과 황실의 인정을 받은 공식적인 황자비야. 황후를 제외하면 로마니엔에서 누구도 너보다 지체높은 귀부인은 없다.”
로마니엔의 제1황자비. 제아무리 위세 있는 가문의 여인이라 한들 그보다 높을 수는 없다. 줄리엣 와부이를 넣으려던 속셈이 실패한 이후로 메리타는 철저하게 세리나에게 굽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을 한 바로 그날 밤 임신의 소식까지 들려왔으니 세리나의 위치는 산처럼 공고했다. 셈이 빠른 제 모친을 탓할 생각은 황자에게 별로 없었다.
“열흘 뒤가 제위 계승식이다. 그 전에 태양의 대신관이 계승자를 지목할 텐데 이미 신전 측은 우리에게 협조하기로 되어있어.”
계승식 직전 황자들간의 싸움이 본격화되어 실제로 서로를 죽인 일도 드물지 않은 로마니엔이었지만, 일단 공식적으로 계승 서열은 대신관에 의해 정해진다. 대신관이 서열자를 지정한다고 해도 거기에 불복해 제위를 뒤집은 경우가 워낙 많아서 문제이긴 해도 일단 절차는 그러했다.
“설득하기 힘드셨을 텐데요.”
“마수 사냥에서 이미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다. 지금 수도 근처와 어둠숲에서 마수 출현이 소강상태인 것도 신전에서 결계를 강화해준 덕분이지.”
세리나는 호의를 담아 대신관 제나드에게 미소를 짓고 목례했다. 대신관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딱히 우리 때문은 아니야. 태양신의 제국에서 마녀 황후라니 신전에서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곁에서 에스트레드가 낮게 웃었다. 적의 적은 아군인 법, 마법을 밀어내고 신전이 득세하는 로마니엔에서 마법에 정통한 황후를 대신관이 곱게 볼 리야 없었다.
신전의 거대한 건축물은 하늘을 찌를듯 높고 넓었다. 온통 흰 대리석으로 된 아치형의 건축이 푸른 하늘 아래 하얗게 빛났다. 이전에도 공식행사를 위해 이곳에 와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깊은 공간까지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로 황족들의 후계 의식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수호기사라도 들어갈 수 없었던 탓이다.
하늘하늘한 엠파이어 드레스의 자락이 연보랏빛 새틴 구두 위를 덮으며 흔들렸다. 굽이 낮은 구두는 대리석 바닥 위에서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길고 굽슬거리는 금발을 위만 살짝 집어 땋아 묶어 세리나의 머리카락은 등을 덮고 찰랑거렸다.
대신관은 말 없이 길고 긴 회랑을 인도했다. 이윽고 당도한 가장 깊은 곳의 챔버 앞에서 그는 뒤를 돌아 두 사람을 마주했다. 체격이 좋은 대신관 제나드가 돌아서자 뭔가 압도되는 느낌이 있었다. 비단 체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눈은 평범한 갈색이었지만 가운데 끓는듯한 빛을 발했다. 다름아닌 태양신의 대신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들어갈 곳은 역대 황제들의 계승식에 사용되었던 제단이 있는 방입니다. 이곳에서 보고 들으신 일은 마음에만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