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슈엔 로마나는 지하 홀의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레드포 로마나는 혀를 찼다.
“이젠 진짜 한계입니다, 어머니. 먹이만으로는 더 유지가 안되나봐요.”
라일리아는 불쾌한 낯빛으로 슈엔을 내려다 보았다. 아직 실험은 완성되지 않았는데 마땅한 실험체마저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육체적인 폭주를 노린 실험이지만 심적인 타격이 가면 위력이 약화되거나 최악의 경우 돌아와버리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결혼 무도회로 시끌벅적한 중앙궁의 하늘 쪽을 바라보았다. 수도민들을 위해 축제의 불꽃놀이마저 화려하게 타올랐다.
“할 수 없지...그래도 이 동방의 차는 그럭저럭 만들어 놨으니.”
황후는 테이블 위 찻잎들을 손가락으로 부스러뜨렸다. 그 위로 물을 붓자 붉은 액체가 찻잔 속으로 흘러내렸다. 레드포는 쓰러진 슈엔의 몸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어머니의 곁으로 와서 앉았다.
“맞아요, 동방의 차는 이제 많이 유행을 하고 있죠. 재배가 성공했으니까.”
“그걸 진짜 재배라고 믿다니 희한해.”
라일리아는 붉게 배어나온 찻물을 흔들어보다가 땅바닥으로 뿌렸다. 찻물에 젖은 작은 식물의 형태가 눈에 띄는 속도로 변형했다.
“아무리 그래도 비싸서 고위층에만 번지고 있지. 좀 더 빠르게 대중에까지 번지면 좋을 텐데.”
“그러기엔 시간이 없습니다. 실제로 물량도 그만큼 내놓을 수는 없고요.”
“피가 모자라니까. 도나 누앤 한명으로 실험과 배포용 약제까지 다 만들어내기는 좀 힘들었어.”
그런 의미에서 세리나 리엔을 잡아서 실험용으로 삼았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라일리아는 아쉽게 중얼거렸다. 슈엔 로마나 역시 혈통이 지극히 강한 여자였으나 페로몬 쪽이 영 맞지 않았다. 그간의 실험에 따라 어찌 비슷한 약제는 만들어 냈지만 그만큼의 효과는 없었다. 일시에 촉발시킬 화력을 위해 변형될 마수는 그만큼 강하고 완전히 이성을 잃어야 했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살육하며 황궁 전체가 일시에 망가지고 지도층의 부재가 이루어진다.
고위층에게만 동방의 차가 유행한다고 해도 효과는 충분하다. 본래 혈통이 강할 수록 능력이 강한 것이 로마나 황실이고, 변형되는 마수들 역시 본체의 능력에 그 강함이 비례하니까. 상성이 맞는다면 한모금만 마셨더라도 폭주가 가능했다. 게다가 도나 누앤과 슈엔 로마나의 혈액을 기반으로 찻잎을 만들어내면서 둘에게 정신감응까지 시전했기 때문에 폭주의 순간도 라일리아가 결정할 수 있었다.
“에스트레드와 세리나 리엔은 그걸 마셨을까? 일단 그 같잖은 시녀가 전달하는 것엔 성공했던데 말이야.”
황후는 순수하게 궁금한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좋아서 레드포 로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황제 발렌2세도 이미 충분한 양의 차를 마셨는데 황자 따위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나도 꽤 마셨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모친은 어떤 얼굴을 할까. 레드포는 오히려 그쪽이 궁금했다. 육신으로 낳은 아들도 진짜 아들이라고, 변형과 폭주에서 그를 구하려 애쓸까. 아니면 좋은 마수 하나가 더 늘어났다고 여기며 폭주를 강화시킬까. 슬프게도 레드포는 어느 쪽일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
눈꺼풀이 아주 무거웠다. 몸은 자꾸만 아래로 꺼지는 것 같았다. 낮지만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둠 저편에서 들려왔다.
‘세리나.’
단정한 목소리는 끈질기게 자신을 불렀다. 이대로 좀 더 잠들어 있고 싶었지만 더이상 눈을 감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애타는 목소리였다. 세리나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천근만근 너무도 무거워서 있는 힘을 다 쥐어짜서 간신히 눈을 떴다.
처음에는 눈 앞에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흐릿하고 불투명한 막 뒤로 사람의 그림자가 잡혔다. 흐리멍텅한 실루엣이었지만 여럿인 것 같았다. 뒤에 서있는 먼 그림자들 앞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남자는 좀 더 익숙했다. 세리나는 손을 들어보려고 하다가 다른 이의 손이 꽉 잡아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
“세리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그가 세리나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 보았다. 에스트레드의 은청색 머리카락이 세리나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에스트레드님.”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뻑뻑한 성대 때문에 몇번이나 쉰 소리를 내다가 그녀는 간신히 소리를 냈다. 눈에도 초점이 돌아와 황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녀의 마른 입을 눈치챈 남자가 입안에 물을 담아 입을 맞추며 한모금을 넘겨주었다. 차가운 물을 한모금 꼴깍 넘기고 세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후인듯 방 안에 들이친 햇살이 낮았다. 에스트레드의 뒤쪽으로 황자궁 직속인 의료술사와 신관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남편이 된 황자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녀를 안심시키듯 얼굴을 감싸쥐었다.
“어젯밤 갑자기 네가 기절했다. 기억은 안나지?”
“기절...이요.”
세리나는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이제 안도해서 많이 편안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누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풍성한 금발마저도 윤기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래. 정원에서...갑자기 축 늘어졌어. 내 품 안에서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려서 무척 놀랐다.”
어젯밤이라면...결혼의 저녁이다. 그와 함께 밤하늘 밑 정원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까지는 있었지만 그 이후는 완전히 끊겨 있다. 아무래도 기절을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눈을 찌푸린 에스트레드의 얼굴을 보고 황자비는 자신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 에스트레드가 놀랐다는 말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많이 충격을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걱정하셨지요.”
“당연하지. 게다가 하루가 거의 다 가도록 깨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다.”
황자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 비볐다. 다소 차갑지만 정상 범위에 들어온 그녀의 체온에 안심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일단 사과는 해야할 것 같은 기분에 세리나는 작게 말했다.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안도감과 충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소리냐. 네 잘못이 아닌데. 아니, 잘못이라니. 오히려 기쁜 일이다.”
“기쁜 일이요?”
에스트레드의 크고 따뜻한 손이 이불 위로 세리나의 배 부근을 어루만졌다. 여름이라 얇고 가벼운 질감의 흰 천 위로 그의 부드러운 손짓이 느껴졌다. 그의 뜻을 알 수가 없어서 세리나는 누운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뺨 근처로 깨끗한 베갯잇이 느껴졌다. 그런 아내의 얼굴이 귀여워서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설마하니 생각도 못했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네?”
“임신이다.”
순간 세리나는 멍한 기분으로 에스트레드를 올려다 보았다. 간단한 단어였는데 잘 와닿지가 않았다.
“임...신이요?”
“그래. 여기…”
남자의 손이 아내의 배 위를 어루만졌다. 아직 판판하고 날씬한 복부였지만 분명히 그곳에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아이가 생겼다. 너와 나의 아기가.”
에스트레드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세리나는 다가오는 의료술사와 신관을 바라보았다.
“네, 황자비 전하께서는 회임 6주차이십니다. 경하드립니다.”
신관이 미소를 지으며 알려주었다. 태동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신성력을 지닌 신관 뿐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아주 강하고, 짙은 피를 이어받은 황손이실 것입니다. 이미 태동이 매우 왕성하니까요.”
“기쁜 일이다. 정말로 기쁜 일이야.”
세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에스트레드를 돌아보았다.
“...임신 말씀이신 겁니까?”
“그래.”
“농담이실리야 없을테고.”
“당연하지.”
“세상에.”
세리나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었고 황자는 기꺼운 얼굴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원래도 사랑스러운 여자다. 자신의 아이마저 가진 아내가 이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네 몸이 안좋았던 이유가 있었던 게다. 부상 때문인줄만 알았지 설마 임신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그랬던 거군요…”
황자비는 반쯤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배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아직 그녀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지만, 신관이 아기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황족들의 태동을 가장 직접적으로 빠르게 알 수 있는 것이 신관이었으니까.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세리나는 아직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에스트레드는 기뻐했다. 그들 둘처럼 페로몬이 완벽하게 맞는 한쌍이, 매일같이 몸을 섞고 또 결약을 단단히 다지는데 아이가 안생기는 쪽이 이상한 일이다. 그의 아버지 발렌2세도 자신이 생겼을 때 이만큼 기뻤을까 싶을 만큼 에스트레드는 기뻤다. 환희라는 감정을 모르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이 환희에 차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몸을 조심해야해. 이제 너 혼자만이 아니다.”
“알겠습니다...세상에. 믿을 수가 없네요.”
세리나는 기뻐하는 남편을 끌어안으며 천천히 현실을 인식했다. 뱃속에 그와 나의 아이가 들어섰다. 새로운 생명을 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에스트레드와의 아이였다. 언감생심 마음도 품지 못하던 남자와의 결실.
뱃속에 따스한 촛불이 켜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촛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