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99화 (99/142)

<-- 역습 -->                연달아 세곡을 추었다. 한곡이 끝나자 모두가 함께 춤을 추며 무도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사이에서 둘은 손을 놓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서로 눈을 떼지 못하는 황자와 황자비를 보면서 귀족들은 흐뭇해하기도 했고 못마땅해 하기도 했다. 어떤 자들은 세리나가 용맹하고 아름다운 기사에서 황후를 제외하면 가장 격이 높은 여인의 자리인 제1황자비로 올라선 것을 기뻐했다. 어떤 자들은 그녀가 저 변방의 지위가 몹시 낮은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질투했다. 대공가의 무남독녀 슈엔 로마나가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서 아예 여식을 들이밀어볼 생각도 못했던 귀족들은 자신의 딸들 역시 세리나 못지 않게 미인이니 미리 황자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면 얼마든지 선택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어쩌면…’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렀으니 황자비의 자리는 뺏지 못하겠지만 궁부인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슈엔 로마나의 성격은 무척 강해서 언감생심 마음조차 품지 못했지만 세리나는 자비로운 기사로 살아왔다. 황자파 귀족들은 물론 황후 측 귀족들도 그런 생각을 했다. 최근 들어 황제의 태도가 소극적이 되고 고발 사건이 해프닝으로 끝나면서 세력의 추가 에스트레드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 이제 그만들 좀 봤으면 좋겠군.”

언제는 아내를 찬탄하며 바라봤다고 한 에스트레드가 춤이 끝나고 투덜거렸다. 그는 못마땅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세리나를 넋놓고 바라보는 기사 한명과 눈이 마주쳤다. 젊은 애송이 기사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고, 황자는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뭘 보는게야. 눈알을 뽑아버릴까.”

“전하!”

세리나는 질색하면서 낮게 질책했다. 어린애처럼 입을 삐죽이던 황자는 금새 낯빛을 바꾸어 환하게 웃었다.

“농담이야. 설마 정말로 그러겠어? 세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자, 발이 아플 텐데 자리로 돌아가지.”

“가끔 농이 너무 진담 같으셔서 문제입니다.”

황자비는 한숨을 쉬며 그의 팔에 몸을 기대고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에스트레드는 100% 농담은 아니었고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호보프가 내온 샹그리아를 마시면서 세리나는 홀 안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황후도, 레드포 로마나와 그의 반려인 슈엔 로마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1황자의 결혼식 무도회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대단한 결례다. 하지만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두 정치 세력을 모두 알기 때문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레드포 로마나 쪽이 쉽게 제위를 넘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예상할 뿐이었다. 오렌지와 시나몬 향이 가득한 끓인 포도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즐기면서도 황자비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실제로 제위 싸움만이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밀렌 바스트가 에스트레드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흠칫하고 에스트레드의 어깨가 흔들리는것이 세리나의 예리한 눈에 잡혔다. 가타부타 말 없이  황자는 시원한 탄산수를 마저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잠깐 바람 좀 쐬고 돌아오겠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세리나도 스커트를 들어올리며 일어섰다.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넌 여기 있어라. 좋은 광경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좋은 광경이라. 뭔가 안좋은 일이 있는 건 확실했다. 세리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눈은 웃지 않았다.

“전하, 가끔 잊으시는 모양인데...저는 좋은 광경만 보고 살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에스트레드는 세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가끔 아내의 아름다움에 경도되어 그녀가 최전선에서 몇년 동안 피를 뒤집어썼던 '붉은 에메랄드'였다는 사실을 잊고는 했다. 하루에도 수백씩 발밑에 시신이 뒹구는 전장을 지나온 사람에게 무슨 참견인가.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함께 가자.”

*****

“꽤 거친 레이디시더군요.”

황자궁 지하의 의료챔버로 내려간 두 사람은 눈을 찌푸렸다. 머리와 팔에 붕대를 잔뜩 감은 용병대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갓 감은 새하얀 붕대 밑으로도 붉은 피가 비치는 것을 보고 에스트레드가 고갯짓을 했고 신관이 다시 신성력을 가했다. 피가 잘 멎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깐 사이에 많이도 다쳤군. 피로연 직전에 숨어들어갔던 거 아닌가? 식사 한번 할 동안 이렇게나 다치다니 얼마나 훈련을 게을리 했으면 이 정도로 솜씨가 떨어진 건가?”

“아이고 솜씨가 떨어지다뇨. 반 인간 반 마수에게서 팔다리 멀쩡하게 살아나온 일반인한테 칭찬은 못해주실지언정.”

벡스 레넌은 너스레를 떨었다.

“어라, 그러고보니 지금은 무도회 시간 아닙니까? 설마 저 때문에 춤도 안추고 여기에 오신 거에요? 그럼 안되죠, 빨리 돌아가서 마저 즐기셔야…”

“시끄러워.”

에스트레드가 조잘거리는 벡스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농담이 먹히지 않자 용병대장은 입을 삐죽거렸다.

쾌활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낯빛은 창백했다. 의술사가 곁에서 보고했다.

“전신에 자상이 많고 깊으셨습니다. 특히 옆구리 쪽의 자상이 깊어서 자칫 위험할 뻔 했습니다. 다행히 내장은 다치지 않아서 꿰메는 것으로 봉합이 가능했습니다만.”

“피가 잘 안멎는 건가?”

“예. 상처가 검게 변했는데 주위 체온이 자꾸 내려가면서 지혈이 쉽지 않습니다.”

다시 보니 벡스 레넌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세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추운 건가?”

“네, 춥네요. 아주 많이요.”

벡스는 자존심 때문에 이가 딱딱 부딪히는 사태만은 피하려고 일부러 더 크게 떠들었다.

“처음 당했을 때는 열이 상당히 올랐는데 갑자기 이렇게 추워지는군요.”

“...슈엔 대공녀의 짓인가?”

세리나는 침울한 낯빛으로 물었다. 용병대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황자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결국 실험을 피하지는 못한 모양이야. 도나 누앤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되겠어.”

“맞습니다. 지하에 누워있는 그 쪼글쪼글한 숙녀분과 비슷한 공격을 하더군요.”

“그래도 어찌 살아남았군?”

벡스 레넌은 품에 안은 더운 물통을 끌어안고 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추위가 자꾸만 몸을 잠식했다.

그가 슈엔과 레드포의 뒤를 밟아 동부 황자궁으로 잠입한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결혼식은 지루했고 파티는 한참이나 남았다. 용병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서성이느니 쓸만한 정보 하나라도 모아오는 게 훨씬 그의 성미에 맞았다. 직업용병에게 은신이란 기본 스킬이나 다름없어서 인원수 많은 황자의 수행 파티를 따르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예상 외로 레드포 로마나는 황후의 궁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슈엔의 마차만이 황자궁으로 향했다. 둘 중에서 고민하다가 그는 그나마 만만한 슈엔 쪽을 택했다. 동부 황자궁 안으로 들어가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그는 경비병의 눈을 피해 담을 넘었고, 그 뒤엔…

“대공녀는 황자궁의 1층 홀에서 시종 하나를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머리부터 물어뜯어 먹고 있더군요. 레이디 도나 누앤과 같은 그림자 괴물을 내어놓고서요.”

“...”

“얼핏 예전 클리스 로마나 전하의 야수화 모습과도 비슷했지만 확실히 도나 누앤 쪽이 더 닮았어요. 제 모습을 보지 않고도 그곳에 숨어든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인육의 냄새.

슈엔 로마나였던 괴물은 시종의 머리부터 시작하여 장기와 팔, 다리까지 전부 씹어먹었다. 황자궁 정원의 담벼락에는 있던 경비병들이 이 순간 궁 안에는 없었다. 일부러 사람을 전부 치운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텅 빈 홀 안에서 인간의 뼈와 살을 씹는 소리만이 울렸다. 불쌍한 제물의 손가락 뼈를 씹던 마수는 벡스 레넌의 냄새를 맡자마자 고개를 휙 돌려 정확히 그가 숨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름이 등골을 타고 달렸다.

“당한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뒤로 물러날 틈도 없었어요.”

시종 한명을 전부 먹어치운 괴물이 달려들어 벡스 레넌을 후려갈겼다. 그가 임기응변으로 숨어있던 창틀을 걷어차고 발코니 바깥으로 몸을 날리지 않았다면 그 일격에 전신이 박살났을 것이다. 옆구리가 길게 찢어져 피가 터졌다. 허공에 날리는 피가 뻗어나온 그림자 속으로 순식간에 흡수되었다. 휘감기는 채찍같은 그림자를 피해 벡스는 상처를 껴안고 정원의 나무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팔과 다리에 날카로운 자상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뒤로 구르던 용병대장의 등이 바위에 부딪쳐 고통스럽게 신음을 질렀다. 허리의 상처를 끌어안고 비틀거리며 고개를 든 남자의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검은 암흑 속에서 괴물이 두 눈이 빛났고 용병대장은 한껏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벡스는 시선이 마주친 그 눈동자가, 슈엔 로마나의 새파란 눈이었던 것을 기억했다. 괴물의 핏빛 눈에서 순간적으로 이성을 지닌 대공녀의 눈동자로 돌아온 것이다.

“...괴물의 거대한 몸집이 순식간에 슈엔 대공녀로 줄어들더군요.”

여자는 그대로 늘어져 기절했다.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늘어진 여체임에도 마치 무기질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용병대장은 죽을 힘을 다해서,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끌어안고 바닥을 기어 동부궁을 벗어났다.

“운이 좋았군.”

에스트레드의 말에 벡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변형된 마수에게서 혼자 몸으로 벗어나다니, 그냥 운이 좋다고 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결국은 이렇게 됐군요.”

세리나는 다소 침울해졌다. 레이디 도나 누앤의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 또다른 희생자는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슈엔 로마나 역시 벗어나지 못했다.

에스트레드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향한 듯 싶었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레이디 도나 누앤을 보면서도 생각했지만...이건 그냥 단순한 마수화가 아닌 모양이다.”

“예?”

“도나 누앤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 그림자를 꺼내 생물을 먹어치웠다. 슈엔 로마나 역시 마찬가지이고. 샘플은 둘 뿐이지만 유추는 가능하지.”

세리나는 에스트레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결론이었다.

“인간형태를 유지한 채 마수화의 가능성이 있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미 상당 부분 성공한 것 같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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