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황후 폐하의 마법은 분명히 정신계파 쪽이라고 했지요."
세리나는 낮게 속삭였다.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다. 어째서 황후가 동왕국의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어."
정신계 마법은 동왕국 왕실에서만 전승되는 마법의 계파다. 로마나 황족의 혈통은 팔촌까지도 철저하게 관리된다. 라일리아 로마나는 황제의 사촌뻘에 해당하는 혈통을 가지고 있었으니 도저히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이건, 분명히 가설입니다만...만약 정신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노공작 에레니아를 정신지배해서 자신을 로마나 황족의 혈통 속에 끼워넣는 게 가능할까요?"
"아니, 안돼. 에레니아 한명으로는 속일 수 없다. 황실 직속의 의술사와 신관이 혈통을 각자 기록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고친다고 해서 다른쪽까지 고쳐지지는 않아. 가문의 기록, 의술사의 기록, 신관의 기록이 모두 일치해야 비로소 황실의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또 정신계 마법은 피지배자가 힘이 강할수록 더 힘에 겨워지죠. 노공작 에레니아 쯤 되면 황실 직계 자손 바로 다음 순위 쯤 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겁니다."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시종장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밀렌 바스트가 한손에 술잔을 들고 서있었다.
"어, 언제 오셨소, 바스트 경!"
"온건 아니고 계속 서있었습니다."
"왔으면 기척을 좀 내요,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벌써 십년째인데 이젠 좀 익숙해지실 때도 됐는데요."
밀렌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숨어지내는 자이기 때문에 외부인과 친분을 쌓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호보프와 같이 오래된 내부인에게는 스스럼없이 친근감을 드러냈다. 평범한 얼굴의 기사는 술잔을 내려놓고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정신계 마법은 저도 알기만 합니다. 그것도 중요한 특성만요. 확실한 건 노공작 정도 되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건...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전설적인 동왕국 마지막 왕 정도나 되면 모를까요."
"일단 가능은 하다는 건가?"
"이론 상으로야 가능하죠. 하지만 정신계 마법은 스스로의 존재 속에서 에너지를 뽑아내 남의 영혼을 잠식하는 것이라 지난 몇십년간 에레니아를 지배했다면 마법사 본인이 남아나질 않았을 겁니다."
그럼 말이 더욱이나 안된다. 세리나가 생각했던 가설은 황제 발렌2세와 노공작 에레니아를 모두 지배하고 그 틈으로 자신의 위치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레니아 한명의 지배조차도 그렇게 힘들다면 발렌2세를 지배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야 했다. 더구나 둘을 지배한다고 해도 신전과 의술사가 전부 관여하는 로마나 황실의 혈통을 속이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역시 발렌2세와 에레니아의 눈은 뭔가 미심쩍었다. 정신계 마법에 대해 아는 자가 없으니 더 이상의 추측은 불가능했지만 세리나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에스트레드가 선물한 녹색의 웨딩밴드로 눈을 내렸다. 반짝이는 녹색 보석에서, 지난날 마나를 가득 품은 영혼이 튀어나왔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워낙 정신이 없었다. 당시 그녀는 수치스러운 일로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녹색의 빛나는 남자의 영혼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강력한 마나로 둘러싸였던 남자. 세리나는 밀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동왕국의 마지막 왕, 레너드 볼프는 어떤 능력을 가진 자였는지 혹시 알고 있어?"
"레너드 볼프라..."
밀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역대 최강의 마법사라 불린 남자였지. 정신과 그림자, 두개의 마법에 동시에 통달했다고 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의 마법사이기도 했고. 결국 발렌1세에게 살해당했지만.”
“...밀렌, 아무리 과거 친구였다지만 식까지 치른 황자비 전하께 말을 놓는 건.”
호보프가 헛기침을 하며 참견을 했지만 세리나가 손을 저었다.
“아니, 그대로 해 밀렌. 그럼 레너드 볼프는 그림자와 정신 두개를 전부 마스터했다는 거군. 황후 폐하도 비슷한 케이스인가?”
“여태까지 내가 본 바로는, 맞아.”
“흔한 재능은 아니지?”
“내가 아는 걸로는 역사상 둘 뿐이야. 레너드 볼프와 라일리아 로마나.”
무엄하게도 황후의 이름을 불러버리는 밀렌의 말에 호보프가 놀라서 허둥지둥했다. 다행히 음악 소리에 묻혀 주변의 귀족들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남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수작을 걸기에 바빴다.
“네가 판단하기엔 어때, 레너드 볼프 정도라면 공작과 황제폐하를 전부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터무니 없는 소리인데.”
밀렌이 웃어버렸다.
“그건 마치 전설 속의 골드 드래곤이 현재의 마수 군단을 제압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것 같은 질문이야. 대답할 수 없고 고민할 부분도 아니라는 말이지. 굳이 말하자면 뭐, 가능이야 하겠지. 그는 역사상 단 한명 뿐인 마법사였으니까.”
놀리는 듯한 친우의 농담에 세리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고 천천히 부채를 부쳤다. 여름 밤의 훈풍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영혼만을 따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가.'
반지 속에 봉인되어 있던 레너드 볼프의 마력이 담긴 형체.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비슷한 재능. 터무니 없는 가설이었지만 세리나의 마음 속에서 서서히 뭔가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
곧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정원에서 중앙궁의 1층 홀로 자리를 옮긴 귀족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온갖 보석과 장식품들을 보고 탄사를 내질렀다. 남부에서 공수한 섬세한 레이스의 커튼들이 여름 밤바람을 가득 품에 안고 밤하늘에 흔들렸다. 미닫이문들을 전부 위로 올려 정원과 완전히 통하게 만든 무도회장은 시원하고 상쾌했다. 정원에 가득 핀 장미의 향기가 홀 가득히 흘렀다. 신선하고 청명한 향기.
“좋은 향이야. 마치 네 체향같아.”
에스트레드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정원에서는 오히려 제대로 인식하기 힘들었던 장미향이 홀로 들어오니 명징하게 후각을 건드렸다.
“제 체향이요?”
“그래. 원래는 백합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여름 장미에 더 가까운 것 같아.”
풋풋하고 싱그럽다. 황자는 미소를 짓고 아내의 뺨을 쓸었다. 피로함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세리나는 마주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지금부터 무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로마니엔 제국의 제1황자, 위대하신 에스트레드 로마나 전하와 제국의 제1황자비가 되신 세리나 리엔 황자비 전하의 경사스러운 혼약을 축하드립니다!”
대신이 크게 외쳤다. 모두가 함께 술잔을 들어올리며 축하의 말을 외쳤고, 그와 때를 같이 해 음악이 시작되었다. 주인된 도리로 황자와 황자비는 홀의 중앙으로 나섰다. 평소라면 황제와 황후가 나섰어야 할 자리지만 둘은 더운 여름 공기를 핑계로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다.
귀족들 모두가 물러서 둥근 원이 만들어졌다. 황자의 손을 깃털처럼 마주잡고 그 중앙으로 걸어나가는 세리나의 부드러운 보라색 넓은 드레스가 회장 안으로 퍼졌다. 무도회를 위해 다시 갈아입은 드레스는 수십겹으로 층층이 고운 레이스를 쌓아올린 스커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맨 위로 반투명한 잠자리 날개처럼 사뿐히 얹은 실크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우아하게 흩날렸다. 단단히 단련된 기사로서의 몸이 그간의 춤 연습에 힘입어 마치 무용수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왼손을 어깨에 얹은 뒤 가느다란 허리를 잡았다. 풍성한 삼박자 왈츠의 음악이 홀 안을 울렸다. 음악에 따라 황자는 아내의 손을 잡고 발을 움직였다.
경쾌하고 풍성한 음악. 세리나는 많이 익숙해진 왈츠의 박자에 따라 황자와 함께 춤을 추었다. 갈아신은 신발은 무도회 용의 댄스화로 다행히도 편안했다. 날카로운 굽을 가지고 있었지만 발목까지 끈으로 묶는 디자인이어서 발목이 꺾일 염려 없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에스트레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청색 눈동자가 기쁨에 반짝거렸다.
“모두가, 네가 아름다워서 찬탄하고 있다.”
황자의 은발이 움직임에 따라 날렸다. 부드럽고 가볍게 춤을 추면서도 둘의 시선은 결코 서로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빛나는 은발과 그녀의 금발이 허공에 부드럽게 휘날릴 때 귀족들이 탄성을 뱉었다. 밤하늘 같이 아름다운 보라색의 드레스 자락이 둥글게 원을 그렸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내가 황제가 되면...세상 최고의 황후로 만들어주마.”
황자가 속삭였다. 그는 언제나 진담만을 했지만 지금은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말이었다. 에스트레드는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어 세리나 리엔을 그에 걸맞는 완벽한 황후로 자리매김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십년전 그녀를 만난 이후 한시도 그 결심을 마음에서 떠나보낸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것과 아름다운 것, 가장 호화로운 것들을 모두 안겨줄 심산이었다.
세리나는 웃었다. 에스트레드의 마음이 전해졌고, 고마웠지만 그녀는 그런 것이 필요 없었다.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다만,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게 허락해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