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97화 (97/142)

<-- 역습 -->                기름기 흐르는 오리고기를 바라보다가 세리나는 결국 고기에 손을 댔다. 기사로써 훈련장이나 전장에서 먹는 거라면 망설임 없이 손으로 잡고 마구 뜯어먹었을 텐데 드레스를 입은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서 그녀는 아쉬웠다.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 살점을 잘라 입에 넣는 아내를 보면서 에스트레드가 쿡쿡 웃었다.

“편하게 먹어도 상관 없는데.”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먹었다간 레이디 휘에리가 울 기세다. 결혼식 주관자의 대리인이라는, 다소 규정하기 어려운 자리에 앉은 휘에리는 세리나의 피로연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직접 골라냈다. 그녀의 자태에 무척 만족스러워했던 만큼 귀부인답지 않은 자세로 고기를 뜯어먹었다간 무척 실망할 것이다.

세리나의 드레스는 은은한 은회색이었다. 폭이 넓고 화려했던 웨딩용의 드레스와는 달리, 몸에 달라붙어 아래에서만 퍼지는 머메이드 라인의 이브닝 드레스였다. 광택도 노골적이지 않고 은은했다. 군데군데 작게 반짝이는 자그마한 다이아몬드와 진주 장식도 부드러운 광채를 발했다. 머리는 아래로 내려 굽슬거리는 웨이브를 넣고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을 한쪽으로 꽂아 옆으로 넘겼다. 보랏빛 자수정과 흑철로 된 귀걸이만이 다소 눈에 띄는 크기였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태양의 열기에 노출되어 붉게 달아올랐던 피부는 식물의 차가운 즙으로 식힌 뒤라 원래의 흰 빛을 회복했다. 지금은 엷은 분 밑으로 작은 홍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입술 위에 바른 붉은 보호제 덕에 세리나의 얼굴은 무척 생기넘치고 건강해 보였다. 물론, 지금 그녀는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그걸 눈치채는 사람은 가까이서 세리나의 거무스름한 눈밑을 볼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 뿐이었다. 에스트레드는 몹시 지친 게 틀림없는 아내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잘 먹어서 다행이군.”

세리나는 막 입에 넣던 포크를 멈추고 에스트레드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볼멘스럽게 중얼거렸다.

“놀리시는 건가요?”

“그럴리가.”

진심이다. 애초에 기사로써 세리나 리엔의 모습을 십년이나 보아왔다. 전장에서 물자가 떨어져 갈 때는 귀족의 예의 따위 지켜서 식사를 해서야 자신의 목숨 하나도 지킬 수 없다. 그런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에스트레드였고, 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물거리며 오리고기를 삼키고 와인을 한모금 마시는 아내의 뺨에 황자는 살짝 입을 맞췄다. 둘을 주시하고 있던 주변 귀족들 사이에서 살짝 동요가 일어났다. 세리나는 얼굴이 약간 붉어진 채 테이블 밑으로 에스트레드의 허벅지를 찰싹 쳤지만 황자는 웃으면서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어차피 귀족들의 시선은 태어나면서부터 받아왔다. 그의 아내로 살아갈 세리나 역시 이제 마찬가지가 될 터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하네요.”

황자비는 피곤 때문에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물렀다. 그녀는 체력이 매우 강한 편이다. 물론 웨딩 퍼레이드가 이토록 길고 험난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피곤에 절어서 꼼짝도 못할 체력은 아닌 것이다. 그녀는 기묘하게 피로한 몸이 의아했다.

“그런가보군. 향기도 조금...옅은 편이고.”

체향과 페로몬은 컨디션에 영향을 받는다. 세리나의 체향은 지금 상당히 옅어진 편이었다. 그녀의 페로몬이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옅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에스트레드는 신경이 쓰였다.

“피로연이 끝나고 밤에는 무도회가 이어질 거야. 오프닝에만 참석했다가 들어가서 쉬자고.”

“그래도 될까요? 그래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닐지.”

“누가 감히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방해하겠어? 사형감이야.”

어찌 보면 민망한 말에도 세리나는 푹 웃었다. 그들이 비록 결약을 맺은 지는 몇달이 되었지만 형식상으로는 분명히 신혼부부였다.

“그렇네요. 그 생각을 못했네.”

에스트레드 역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유리잔을 둥글게 돌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붉은 포도주가 둥글게 소용돌이 쳤다. 날이 다소 더워서 그는 약간 냉기를 뿜어 포도주를 차게 해서 즐기고 있었다.

“황자 전하, 황자비 전하.”

시종장 호보프가 둘의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용병대장 벡스 레넌의 전언이 있습니다.”

에스트레드는 눈썹을 올렸다. 용병대장은 분명히 그의 측근이라 시종장에게 전언따위 보내지 않아도 얼마든지 곁의 자리를 내줄 수 있다. 그는 말해보라는 뜻으로 턱짓했다. 호보프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어조로 말을 전했다. 딱히 낮은 음성도 아니었다.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만 흥미로운 일이 생겨 숨바꼭질을 하러갑니다. 달이 뜨는 곳, 어둠이 지는 곳. 고귀한 아가씨의 비밀을 캐러.’”

“흠.”

언뜻 들으면 귀족 아가씨라도 한명 꼬시러 가겠다는 의미 같았다. 근처에 있는 귀족들이 설사 듣더라도 누군가 또 황궁의 정원 어둠 속에서 뒹굴겠구나 싶은 전언. 어차피 무성한 수풀 속 야음을 틈타 내통하는 남녀는 많고도 많았다.

에스트레드는 한숨을 쉬고 크게 말했다.

“정말이지, 용병들이란. 참 몸가짐이 단정치 못하군.”

음란함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에 황자 부부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귀족들과 수행원들이 웃었다. 용병이란 어쩔 수 없지! 라는 말과 함께 왁자지껄하게 모두가 다시 음악과 대화와 미식으로 돌아갔다. 세리나는 픽 웃었다.

“우리가 움직일 수 없으니까 대신 움직여주네요. 무려 용병대장이 움직이니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겠죠.”

“...필요 없는데 엉뚱한 짓을 해.”

황자가 혀를 찼다. 골치아프고 귀찮으면서 도움이 되는 존재다. 달이 뜨고 어둠이 지는 동쪽-레드포 로마나의 황자궁으로, 고귀한 아가씨-슈엔 로마나의 뒤를 밟겠다는 뜻이렸다. 뭔가 꼬투리가 잡혔으니 탐색을 위해 염탐하러 가는 것이다. 별다른 걱정은 되지 않았다. 용병대장은 유능한 자라서 실패할 일은 없을 게다. 결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무리한 짓 따위는 하지 않는 게 벡스 레넌의 가장 큰 미덕이자 용병으로서의 자세였다.

“후...피곤하네요.”

세리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유난히 묵직한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몇달 훈련에 소홀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이토록 체력이 떨어질 일인가, 싶어서 그녀는 다소 의아했다. 잔뜩 먹어 배가 부른데도 몸은 계속 늘어졌다. 황자비는 곁의 귀족들이 아첨하며 따라주는 포도주를 적당히 거절하면서 에스트레드의 품 안으로 몸을 기댔다. 여름 저녁이라 공기가 훈훈한데도 어딘가 오한이 들어서 따스한 남편의 품이 안온했다. 에스트레드는 숄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며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세리나의 녹색 눈을 들여다 보았다.

“많이 안좋은가?”

“...그렇네요. 안좋습니다.”

부인해봤자 별 좋을 일도 없어서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잠이 몰려왔다. 주변이 몹시 시끄러웠지만 황자의 품은 따스했고, 그 품에 기대자 세상 모든 걱정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흠, 흠.”

곁에서 시종장이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을 둘러싸고 테이블에 앉은 귀족들의 시선이 전부 둘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세리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황자는 태연하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 품에 안았다. 그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귀족들에게 포도주 잔을 들어올리며 씩 웃었다.

“남사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어. 오늘은 결혼의 날이고, 우리는 신혼이니 말이지. 안그런가?”

귀족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떠들었다. 황자비는 아름다웠고 황자는 강인했다. 둘의 페로몬은 남들이 보기에도 거의 완벽하게 맺어져 빈틈이 없어 보였다. 제1황자파 귀족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잔을 들어올리며 황자비의 미모를 찬탄했다.

“노공작께선 심기가 좀 불편하신 모양인데요.”

세리나는 그의 품 속에서 속삭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에, 혼자 유쾌하지 않은 낯빛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노공작 에레니아가 들어왔다. 황후 라일리아의 어머니, 에레니아 로마나. 백발을 매끈하게 틀어올린 노공작은 수행원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노공작 에레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세리나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이 딸인 황후 라일리아와 무척 닮아있었다. 그녀의 눈은 새카맸고 빛은 한점도 없는 것 같았다.

‘저 눈을...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세리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썹을 모으며 에레니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의심의 여지 없이 라일리아와 닮아있다. 모친이니 당연할 터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본 눈동자였다. 뭔가 흐릿하고 초점이 없는 듯한 인상. 정확히 말하면...자신의 의지가 없는 자의 얼굴.

한참을 고민하던 세리나는 답을 찾아냈다.

‘...황제폐하.’

발렌2세의 흐린 은청색 눈동자와, 에레니아의 탁한 검은색 눈은 매우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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