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96화 (96/142)

<-- 역습 -->                낯선 남자의 출현에 슈엔은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물러서려 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라 움찔거리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그녀는 흰 드레스가 다 구겨지고 더러워지도록 바닥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책에서만 읽었던 거리의 거지 같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공녀는 수도 뒷골목에 수도 없이 많은 걸인들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뭐,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겁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벡스 레넌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대체적으로 황족과 높으신 귀족 나리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눈 앞의 여자도 마찬가지로 별로 호감의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슈엔 로마나는 대단한 미인이기는 했다. 검고 굽슬거리는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동자와 대리석 같은 피부. 지금 당장은 야위고 창백해서 그 미모가 많이 상하기는 했지만 본래의 아름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벡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몸이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별 거 아니오.”

슈엔은 당당하게 대답하려고 애쓰면서 허리를 폈다. 그녀는 대공녀였고 용병 따위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용병대장이라니 평민 중에서야 꽤 지위가 높은 자일 테고, 또 그러니 에스트레드의 결혼식에 초청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에스트레드는 전장으로 나도는 동안 이런 저런 외부 인사들과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슈엔은 용병과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친분이 있는 귀족들이나 기사들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용병이란 가장 천박하고 질이 떨어지는 자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벡스 레넌이 도와주기 위해 내민 손을 쳐다보지 않고 나무만 짚고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슈엔을 보면서 벡스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 같은 고집 센 귀족 영애들을 그는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그때마다 화를 내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나서 용병대장은 가만히 쳐다보며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슈엔이 몸을 감쌌다. 살갗 전체에 소름이 돋고 으슬거리며 추웠다. 그녀는 턱을 높이 들려고 애쓰면서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용병대장을 노려보았다.

“몸이 안좋으시다면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소. 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것 뿐이니 돌아가요.”

“결혼식이 이미 시작해서 모시러 올 수행원이 없을 겁니다.”

“필요 없다고 이미 말했으니...아.”

그녀는 갑자기 찾아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몸을 나무에 기댔다. 벡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슈엔의 팔꿈치를 잡아 지탱해 주었다. 대공녀는 어지럼증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의 손에 의지했다.

‘...피부가 차가운데.’

벡스 레넌은 그녀의 팔을 잡아주며 피부가 차갑다는 것을 인지했다. 혈관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창백한 피부 밑으로 푸른 정맥들이 눈에 띄었다. 혈관에 흐르는 피는 푸르다 못해 검어보였다.

“정신 차리세요. 많이 안좋으십니까?”

벡스는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슈엔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대공녀는 그를 뿌리칠 만큼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고, 다른 이의 다정한 목소리나 따뜻한 손바닥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끌렸다. 그녀는 축 처진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감기 몸살이라도 있으신 건지. 황궁 제일의 미녀께서 이렇게 아프시면 남자들이 속상해 합니다.”

“...잠을...제대로 못잤을 뿐…”

“잠? 불면증이신 건가요, 대공녀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남자라도 있으십니까?”

벡스는 일부러 가볍고 경박한 어조로 말했다. 슈엔 로마나는 황후 측 인물 중 상당히 중요한 자였다. 자꾸 말을 시켜서 뭔가 알아낼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는 수확이 될 터였다.

“불면증...그런가.”

슈엔은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며 침울하게 말했다.

“잠을 자긴 해도 계속해서 악몽이 찾아오니 그럴지도 모르겠군.”

“악몽이라, 만병의 근원이죠.”

“끝없는 어둠 속에 갇혀 살인하는 꿈이니 끔찍하지.”

대공녀는 머리를 흔들어 현기증을 털어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벡스 레넌은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부축했다. 슈엔은 점점 더 뿌옇게 변하는 머릿속을 알면서도 어찌 할 방도를 몰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결혼식이 열리는 정원이나 아니면 황자궁으로?”

슈엔은 흐릿한 머릿속으로도 현재 화려한 결혼식이 열리는 정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고싶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녀의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자리, 에스트레드의 반려. 지금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을 가진 세리나 리엔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

“거기가 내 자리였는데….”

슈엔은 중얼거렸다. 잘 알아듣지 못한 벡스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대공녀는 남자의 반응을 알아챌 정도로 정신이 있지 않았다.

용병대장은 황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페로몬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대공녀 슈엔 로마나의 몸에서는 체향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 역시 강하고 짙은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매우 강한 체향을 발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페로몬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의 혈액을 아예 바꿔치기한 것처럼.

“날 데려다 줘. 그 자리로.”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슈엔 로마나가 중얼거렸다. 몇번이나 더 물어서 그녀가 뜻하는 것이 정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벡스 레넌은 그녀를 부축했다.

돌아간 정원에는 이미 에스트레드와 세리나의 결혼 행렬이 떠난 뒤였다. 아직 피로연이 열리려면 한나절이 지나야 했기에 군중들도 휴식을 위해 꽤나 자리를 뜬 뒤여서 자리가 허전했다. 단상 위에 있던 황제와 황후 부처 역시 자리에 없었다. 한적해진 귀빈들의 자리에서 남아있던 레드포 로마나가 뒤를 돌아 슈엔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남편을 두고 나가서 다른 사내와 돌아오는 건가?”

별로 기분 나쁜 어조는 아니었다. 수행원들이 슈엔을 모시고 대기하던 마차에 그녀를 올렸고 벡스 레넌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도의 용병대장 벡스 레넌. 초면은 아니지만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지요?”

“...레드포 전하를 뵙습니다.”

삼년 전 에스트레드의 개선 행렬에 벡스 레넌 역시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얼굴을 보았던 모양이다. 벡스는 눈을 굴렸다. 레드포 로마나는 용병대장을 한번 훑어보고 별다른 말 없이 마차에 올랐다. 황자궁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이 있은 뒤 저녁에는 거대한 피로연이 열릴 예정이었다. 인사 한마디 없이 수행원들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흠.”

벡스 레넌은 턱을 쓸었다. 슈엔 로마나의 상태는 굉장히 좋지 않았다. 그걸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것이 레드포 로마나에게 좋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막내 황자는 매우 태연한 얼굴로 말 한마디 없이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용병대장은 에스트레드와 대부분의 정보를 공유했다. 그는 슈엔이 실험을 당한다는 사실도, 황후가 결혼식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가지 이상한 건 레드포 로마나의 대응이었다.

*****

천천히 먹으려고 했다. 정말 노력을 했단 말이다.

세리나는 순식간에 쓸려나간 자신의 앞 요리 접시들을 보면서 잠깐 민망해 했다. 곁에 있던 에스트레드가 큭큭대며 웃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잠깐 황자를 노려보았다가, 곧 다시 오리고기 요리가 대령되자 그쪽으로 정신을 빼앗겼다.

아무튼 힘든 한나절이었던 탓이다. 원래 세리나는 기사였고, 따라서 근육도 잘 발달되어 있었으며 먹는 것도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새 모이처럼 조금씩 먹고 체중조절을 하는 귀부인들과는 먹는 양 자체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잘 먹는다는 사실을 별로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다른 귀족 여인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상당히 튈 수 밖에 없어서 민망할 때가 있기는 했다.

피로연은 저녁 시간에 시작되었다. 결혼을 위한 버진 로드가 펼쳐졌던 황궁의 중앙 정원에는 넓은 저녁용 테이블과 흰 의자들, 악단들이 배치되었다. 잘 가꿔진 잔디밭 위로 푹신한 카펫이 깔리고 오전에 웨딩용으로 장식되었던 흰색의 실크 리본들은 붉은 천 위 금색 자수가 놓인 테피스트리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붉고 노란 메리골드가 짙은 향기를 뿜었다.

이제 해가 져 정원 위로는 긴 어둠이 깔렸다. 기다렸다는 듯 마법구들이 일제히 떠올라 밤하늘을 은은한 빛으로 수놓았다. 맑은 날이라 아직 초저녁임에도 은하수길이 선명하게 나타나 흘렀다.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면서 정원 전체로 은은한 음악이 퍼져나갔다.

“힘드네요.”

곁에 앉아서 시중을 들던 레이디 휘에리가 투덜거렸다. 긴 웨딩 행진 속에서 황후의 공격을 대비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에스트레드 쪽 사람들은 지금 상당히 지쳐 있었다. 피로연을 위한 드레스로 갈아입는 동안 세리나가 깜박 졸 정도였다. 안나와 휘에리의 덕분에 드레스를 입다 마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꺼풀에는 피로가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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