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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94화 (94/142)

<-- 혼약 -->                단상 앞 버진로드가 시작되는 곳에서 에스트레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빛 아래서 청은발이 차가울 정도로 깨끗하게 빛났다. 기분 좋을 정도로 살랑이며 부는 바람에 그의 긴 은발이 흩날렸다. 여름 나무의 푸른 잎사귀들이 에스트레드의 뒤에서 화사하게 흩날렸다.

마차를 탄 채 먼 곳에서 그를 발견한 세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페로몬이니, 체향이니, 사실은 아무것도 소용없었을지 모른다. 첫눈에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건 결국 그렇게 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었을 테다. 사랑을 한 것이 먼저였고, 그 이후에 운좋게도 체향마저 서로에게 꼭 맞았다. 행운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황금색 머리카락의 황자비의 눈에, 수없이 많은 관중들은 보이지 않았다. 뿌연 먼지가 끼인 것처럼 모든 것이 흐려지고 오로지 에스트레드만이 보였다. 황자는 먼 거리에서도 알 수 있을만큼 환하게, 크게 웃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 넓은 대로로 마차가 행진했다. 일어선 세리나의 흰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흩날렸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버진 로드 앞에 도착한 마차에서 황자비는 수행 시녀들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길고 풍성한 드레스와 늘어진 흰 망토 자락을 시녀들이 갈무리해 뒤에 펼쳤다. 흰 비단 위 펼쳐진 붉은 빌로드 카펫 위에 올라선 세리나는 에스트레드의 손을 잡았다. 언제나 잡던 손인데도 새삼스럽게 떨려왔다.

“아름다워.”

황자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아내의 손을 맞잡고, 그는 신부를 에스코트해 버진로드를 걷기 시작했다. 붉은 카펫 위로 흰 드레스 자락과 긴 망토가 끌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세리나는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방심하면 안되는 날이라는 걸 아는데...집중이 잘 안되네요.”

에스트레드가 낮게 웃었다. 그들의 앞으로 기사단이 도열하여 높게 검을 뽑아들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예장용 검이 햇빛을 하얗게 부수었다. 두 사람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도열한 기사들 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황후가 무슨 짓을 꾸몄을지 모른다. 황궁의 호위를 총괄하는 것은 여전히 모나칸 후작이었고 그만큼 두 사람에게 취약했다. 에스트레드와 세리나 두 사람의 위치가 오늘만큼 선명하게 드러나는 날도 없었다. 당연히 그 어느때보다 조심해야 하는 날이지만, 에스트레드 역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곁에 선 아름다운 아내를 흘긋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렇다. 어쩔 수 없지. 누가 뭐래도 오늘은…”

긴 시간 동안 속으로만 삭여온 감정을 온 천하에 드러내고 드디어 그녀를 자신의 것이라고 공표할 수 있는 순간이다. 남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않는 그였지만 자신의 소유라고 완전히 공식적으로 알리는 건 다른 문제다. 더이상 그녀의 위치에 범접할 수 없도록, 드디어 에스트레드 자신이 모두의 앞에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다.

높은 구두가 힘들었지만 에스트레드의 손에 의지해 세리나는 신중하게 계단을 올라 단상 위에 섰다. 그들보다 조금 더 높은 위쪽으로 황제와 황후가 앉아 둘을 내려다 보았다. 황제의 얼굴에는 요즘 계속 그렇듯 표정이 사라져 있었고, 황후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면 두 사람은 너무나 닮아서 마치 남매같을 정도였다. 라일리아의 검은 눈은 이 밝고 뜨거운 여름 오전의 햇빛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빛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 시큰둥한 태도로 에스트레드와 세리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향해 태양의 신관이 결혼의 축복을 읊었다.

“이 아름다운 계절, 가장 강한 태양신의 축복을 받아 제국 로마니엔의 제1황자 에스트레드 로마나가 그의 반려로써 리엔 후작가의 독녀 세리나 리엔을 맞는다. 태양신의 빛나는 권위 아래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자와 황자비가 될 것이다.”

황자가 결혼의 상징으로 예물을 황자비에게 선사할 차례였다. 에스트레드는 황후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에게 수행원이 받친 것은 작은 빌로드의 상자였다. 황자가 그 안에 든 반지를 손 끝으로 빼내 들어올렸다. 녹색으로 빛나는 작은 돌. 그 안에서 마나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간 라일리아의 등이 등받이에서 떼어져 앞으로 쏟아질 것처럼 몸이 쏠렸다. 가까이 있는 자들이 다소 놀라 그녀를 돌아볼 정도였다. 황후의 무저갱같던 검은 눈에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에스트레드의 반지를 바라보던 세리나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채고 황후 쪽을 바라보았다.

“난 좋은 사람은 아니야, 세리나. 나의 아내.”

에스트레드는 주의가 흐트러진 세리나의 손을 잡아당겨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녹색의 보석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이건.”

“쉿.”

황자비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황자는 행복한 듯 미소를 지었다. 세리나는 손에 낀 반지의 보석을 알아보았다. 언젠가 라일리아가 그녀에게 주었던, 환영이 나타났던 녹색 반지. 비록 백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박힌 광물 자체는 당시의 것과 동일했다. 기묘할 정도로 한눈에 알아본 세리나는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라일리아는 양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꽉 쥐고 반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손등에 혈관이 잔뜩 튀어나왔다.

두 사람이 황제와 황후의 앞에 가서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황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황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름다운 반지로군요. 신경을 많이 썼나봅니다, 에스트레드.”

“감사합니다.”

에스트레드는 간단하게 답했다. 라일리아는 세리나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녹색 반지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저 보석은 어디서 구한 거죠? 낯이 익군요.”

황자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황후께서 제 아내에게 주셨던 반지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황후폐하께서 주셨으니 의미도 남다른 것이고.”

" 내가 주었던 반지를?"

팔걸이를 쥔 라일리아의 손등 위로 혈관이 더욱 크게 불거졌다. 그녀의 흰자가 미세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주름이라곤 없던 도자기처럼 매끈하던 피부 위로 눈가에 자글거리며 주름들이 새겨졌다. 거짓말이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얼굴이다. 에스트레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라일리아는 멍청하지 않다.

히스토르인들을 전멸시켰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함부로 스스로를 드러낼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요...고맙군요.”

예상대로 황후는 다시 석고상같은 얼굴로 돌아갔다. 잠깐 드러났던 그녀의 민낯이 가면 뒤로 숨어들어갔다. 황자는 일부러 아내의 왼손 약지에 입을 맞추며 돌아섰다. 세리나 역시 눈치를 챘는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온통 달아오른 관중과 여름 하늘 밑에서 그들 사이의 공기만 긴장이 되어 있었다.

“이로써 두 사람의 결약이 비로소 완전해 졌음을 선포하노라!”

신관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이 은빛으로 물들었다. 실로 드물게 보이는 신성력의 광휘에 황제의 정원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탄성을 질렀다. 눈부신 하늘을 향해 신관이 넓게 두 손을 벌리자 푸른 하늘로부터 눈꽃같은 흰 빛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사한 빛조각들은 땅에 닿으면 잠시 빛나다가 사라졌다.

떨어지는 벚꽃잎들처럼 내리는 빛조각들을 피해서 라일리아는 조금 더 차양막 안쪽으로 깊이 들어앉았다. 관중 속에 있던 캐딜럿 역시 불편한 얼굴로 얼른 양산을 들어올렸다. 나이 먹은 마법사가 어울리지도 않게 양산을 쓰는 것은 우스워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법사는 신성력이 질색이었던 것이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가운데로 둘은 환하게 웃으며 걸어나갔다.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세리나가 물었다.

“이 반지는 뭐죠? 산기슭 캐딜럿의 지하 연구실에서 황후의 반지는 깨져서 없어졌습니다. 환영이 튀어나오면서 부서져버렸죠. 어떻게 된 건가요?”

“똑같은 것이 내게도 하나가 있었어.”

에스트레드는 얼굴에서 대외용 미소를 지우지 않고 주변에 손을 흔들었다.

“황후가 네게 줬던 반지 역시 바다의 눈물이었거든. 마력을 지닌 영혼을 봉인할 수 있는 반지라는 건 그 외의 보석으로는 만들기 힘들지.”

“이건 또 대체 어디서 구하신 거죠?”

에스트레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베어넘겼던 어린 소녀의 손에서 직접 빼왔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라일리아가 동왕국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동왕국 왕실의 마지막 혈통이었던 소녀의 손에서 빼내온 녹색의 반지로 일부러 황후를 도발했다. 라일리아는 과연 움직일까? 조금이라도 더 과격한 방식으로, 좀 더 실수의 가능성이 많은 형태로 공격해올까? 아직 알 수는 없었다. 과연 그의 도발이 효과가 있을지, 황자는 지켜보기로 했다.

버진로드의 끝에 와서 둘은 마차에 올랐다. 곧 수도 전체를 돌며 퍼레이드를 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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