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93화 (93/142)

<-- 혼약 -->                중앙궁 앞 거대한 정원의 대로 주변으로 흰 의자가 가득 놓여 있었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한가득이었다. 각자 가장 비싸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채 각자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사이로 벡스 레넌이 평범한 기사용 정장을 입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도 그리 튀지 않는 인상의 그는 옷마저 톤이 낮고 짙은 푸른색을 입어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거의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다소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중앙대로의 버진로드를 바라보았다.

길 위로 희고 빛나는 자갈들이 깔렸고, 단상 위로 올라가는 길에는 하얀 실크 위로 붉은 카펫이 깔렸다. 길 전체 옆으로 희디흰 카라 꽃과 백합, 붉은 메리골드와 장미가 둥근 모양으로 장식되었다. 반짝이며 허공을 채우고 있는 오색의 반짝이들은 캐딜럿 휘하의 마법사 제자들이 부린 솜씨였다. 아마도 오후가 되어 어두워지면 이 넓은 정원 한가득 마법의 빛이 밤하늘을 밝힐 것이다. 캐딜럿은 이런 일에 마력을 쓰는 것에 몹시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세리나가 그의 손목을 자를 것 같은 얼굴을 하는 바람에 재빨리 협조했다. 아무튼 고발이 잘못되었을 때 잘못을 묻겠다고 한 황자비는 그의 실수를 묵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가 본다면 좋아했을 텐데.’

세리나는 모친을 부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해는 된다. 아무리 가장을 잘한다 해도 마리아 엔티아스는 제국인이 아니었다.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본다면 세리나의 모친이 북부 대륙 출신이라는 것 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세리나와 완전히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잿빛 머리에 붉은 눈. 늘씬한 키에 모양 좋은 골격 같은 것은 그대로 닮았지만 마리아 쪽은 인상이 훨씬 강했다.

마리아 엔티아스로부터는 편지 한통도 없었다. 딸의 결혼식이었고 그 곁에 몇십년지기 친구가 있는데도 소식이 없다. 그녀는 아마 벡스 레넌이 세리나를 잘 보살필 거라고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리나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충분한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아예 벡스 레넌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직접 십여년전 딸을 그에게 부탁했으면서도 말이다.

“정말 무심한 여자야.”

용병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로마니엔의 여름답게 벌써 햇빛이 쨍했다. 높고 푸른 하늘, 투명한 햇살, 벌써부터 후덥지근해지기 시작하는 공기. 그 밑으로 희고 붉고 푸르게 펼쳐진 황궁의 정원은 마치 한송이의 거대한 꽃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레이스 양산을 쓰고 온 귀부인들 곁에서 시녀들이 부채를 부치기 시작했다. 정원 옆으로 조경된 큰 나무들 덕분에 그늘이 상당히 많이 져 있었지만 중앙 쪽은 아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오히려 대기 시간 동안은 덥고 힘든 상태였다.

벡스 레넌은 들떠서 기다리는 사람들 저 편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올라오는 것을 눈치챘다. 혼자 와서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술렁이는 쪽으로 다가갔다.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푸른 눈의 대공녀가 그곳에 있었다.

“어라.”

슈엔 로마나였다. 그녀는 두문불출한 지 꽤 오랜 기간이 지나 있어서 사교계에도 간만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원래 혈색 돌고 건강한 미인이었던 슈엔의 얼굴은 푸석하고 창백해보였다. 귀족 집안의 영애인데도 승마를 좋아해서 언제나 건강한 살빛을 유지하던 그녀와는 완전히 달랐다. 안색이 푸르고 가라앉아보였다.

“레드포 로마나 전하의 후처로 들어가더니 사이가 안좋은가?”

“원래 에스트레드 전하의 혼처 아니었던가...지금 속이 속이겠어?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황제가 될 가능성은 에스트레드 전하 쪽이…”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황후 폐하가 버티고 있잖아. 황제 폐하 역시 거의 황후의 뜻에 따르고 있다구.”

“꼭 제위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요. 아주 오래 전부터 슈엔 대공녀의 짝사랑은 유명했잖아요.”

벡스 레넌의 주위에서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억측과 비웃음과 쓸모없는 호기심이 뒤섞이는 그 말들은 딱히 소리도 죽이지 않아서 분명히 슈엔의 귀에 들렸을 텐데도 대공녀의 눈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힘겨운 걸음으로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가장 앞자리 중 하나에 앉았다. 뒤를 이어 레드포 로마나도 나타났다. 주변에서 시끄럽던 사람들의 속삭임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밸러스 대공이 다소 이상해진 후 대공가의 위세는 급격하게 꺾였는데, 슈엔마저 두문불출하며 사교계에서 대공가의 위치는 급히 하락했다. 하지만 레드포 로마나는 다르다. 그 자신이 강하기도 했거니와 클리스 로마나가 죽은 이후 에스트레드와 양강구도였다. 귀족들이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유약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닳고 닳은 자들은 외면에 속지 않는다.

슈엔의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는 레드포를 보면서 벡스 레넌은 조심히 군중 틈으로 섞여들어갔다. 막내황자는 그와 만난 적이 없어서 얼굴은 알지 못하겠지만 별로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다. 그는 용병답게 몸에 익은 태도로 한옆에 나무 곁에 서서 멀찍이 레드포 부부를 바라보았다.

슈엔은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버린 어깨와 목덜미에는 혈관이 툭툭 튀어나왔다. 흰 피부 밑으로 비치는 굵은 혈관들이 파랬다.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파란 느낌이어서 기괴한 느낌까지 들었다. 벡스 레넌은 눈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공녀는 목을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앉아있던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레드포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 혼자 걸어나왔다.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 대공녀를 보고 군중들 사이에 넓게 길이 생겼다. 수행원도 한명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슈엔은 비틀거리며 홀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터로 걸어갔다.

‘...안좋아보이는데.’

누가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은 아내를 레드포 로마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는 오히려 곁에 서있는 황후의 수호기사 케린 모나칸과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나누었다. 벡스 레넌은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감 없이 은밀하게 자리를 이탈해 슈엔의 뒤를 쫓았다.

*****

하얀 마차는 둥그랬다. 온통 금으로 장식된 마차는 코끼리의 상아로 만들어져 햇빛 아래서 찬란하게 빛났다. 그 안에 타고 세리나는 밖의 구름같은 군중을 바라보았다. 에스트레드는 황자였고 동부 내란에서 돌아올 때 개선식에서 이런 광경을 이미 보았다. 하지만 세리나 리엔 스스로가 주인공인 광경은 아니었다. 그녀는 무릎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마차는 중앙궁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황궁내의 중앙 정원을 가로질러 가 버진로드에 당도한다. 여름의 쨍하게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황궁의 정원은, 그녀가 그동안 제국이 얼마나 거대한 사교계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넓은 풀밭 옆으로 관중들이 정원을 가득 메웠다. 지체가 높은 귀족은 앞자리에 마련된 흰 의자에 앉았고 그나마도 지체가 낮은 하급 귀족들은 자리도 받지 못해 서서 황자와 그의 새로운 반려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하급 귀족은 황족의 얼굴을 보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한다. 이 기회에라도 이 고귀한 혈통의 인물과 신데렐라처럼 그에게 선택받은 소문의 황자비를 보기 위해 모인 것이다.

저 멀리 높은 단상이 희게 빛났다. 아마도 황제와 황후가 그곳에 앉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 마치 신과 같은 존재처럼, 애초에 다른 힘과 혈통을 타고난 자들. 세리나는 천으로 된 마차의 지붕을 걷고 일어섰다. 쨍한 햇빛 아래로 그녀의 풍요로운 황금색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머리 위로 올린 백은의 사슬과 섬세한 진주 장식들이 바람에 날렸다. 부풀어오른 치맛자락을 한손으로 잡고 세리나가 주변을 돌아보자 관중들 속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그녀는 마치 여신의 현신처럼 보였다. 제국인 특유의 금발이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황금색의 머리카락이다. 흰 피부 위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 여기사다운 당당한 키와 늘씬한 자태를 아이보리색의 드레스가 감싸고 휘날렸다.

마치 꿈과 같은 광경에 세리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주변으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관중들의 함성이 커졌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머지 않은 시간, 다음대의 진짜 힘을 쥔 자가 누가 될 것인지. 대중이란 많은 것을 알지 못해도 지독히 동물적으로 예민한 존재였다.

‘나는 이제, 에스트레드 로마나의 진짜 반려가 된다.’

수없이 많은 결약 속에서도 한가지 미진했던 것. 드디어 모두에게 공표하는 날이다. 에스트레드는 세리나 리엔을, 그녀는 에스트레드 로마나를 소유한다. 이제 결코 물러날 수 없는 자리까지 왔다. 세리나는 조용하지만 결코 얌전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에스트레드 한명을 손에 쥐고 살아갈 것이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용서하지 않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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