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약 --> “정말 오래 기다린 것 같습니다.”
입술을 댄 채 세리나는 작게 속삭였다. 숲속에서 처음 에스트레드에게 안긴 지 불과 반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린 느낌이었다. 마치 평생 동안 기다려온 것 같았다.
“오래 기다렸지. 십년을 기다렸으니까.”
황자는 조용히 답했다. 그는 손 안에 아내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폭 넓은 드레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는 꿈도 꿀 수 없었어요. 언감생심 탐을 낼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세리나 리엔은 수호기사였고, 에스트레드 로마나는 그녀의 주군이었다. 감히 사랑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슈엔 로마나가 당당히 에스트레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때가 떠올랐다. 슈엔은 강인하고 당당한 여자였고 황자비가 되기에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혼혈도 아니었고 지위가 높았으며 에스트레드에게 장차 많은 도움이 될 뒷배경이 큰 대공가의 영애였다. 감히 질투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으나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난 단 한번도 한눈 판 적 없어.”
그녀의 기분을 눈치챈 듯 황자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를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너만을 바라보아왔다, 세리나 리엔. 눈치 없는 고리타분한 기사라 내 마음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 여자를 말이야.”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벡스 레넌도, 레드포 로마나도 알고 있던 것을 왜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에스트레드의 말에 항의할 말이 없다.
“실수하신 걸지도 모릅니다. 눈치는 없어도 고집은 있어서 쫓아내도 뭉개고 있을 거라서요.”
세리나는 자신의 존재가 장차 황제가 된 에스트레드에게도 짐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혼혈이었고, 출신은 하위귀족 계급이었으며, 뒷배경은 아무것도 없었다. 믿을 것은 오로지 에스트레드의 마음 하나 뿐이었다. 또 하나, 세리나 스스로의 마음과 함께.
“그거 꽤 반가운 소리인데.”
황자가 쿡쿡 웃으면서 아내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콕콕 쪼는듯한 버드키스로 시작된 입맞춤은 곧 깊어졌다. 세리나의 도톰한 입술을 빨면서 그가 놀리듯이 물었다.
“지금 널 눕혀도 되나? 드레스가 더럽혀지니까 그건 좀 곤란해?”
“그렇게 어린아이같은 소리 하지 마시고…”
“어린애는 이런 짓을 하면 안되지. 아내도 있으면 안되고.”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드러난 어깨선 위로 입술을 내렸다. 눈처럼 새하얀 목덜미와 어깨 위에 빛나는 은색 파우더가 뿌려져 희게 빛났다. 그 위로 황자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댔다. 마치 빛을 흡입하는 듯한 기분으로, 그는 아내의 체향을 맡았다. 청량하고 맑고 온 몸을 감싸는 다정다감한 향기.
“아, 안고싶군.”
에스트레드가 짐승처럼 으르렁대었다. 사랑을 나누고 싶은 것은 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애써 황자를 밀어내었다.
“시간 없어요, 호보프가 알면 우릴 때려눕히려고 들 겁니다.”
“그러라고 해.”
황자는 품 안으로 아내를 꽉 끌어안았다. 팔 안에 맞춤하게 안기는 그녀의 몸이 따스했다. 마치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둘의 몸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아내의 등과 허리를 쓰다듬던 에스트레드의 손이 어깨를 스쳤을 때, 세리나가 몸을 움찍 떨었다.
“왜 그래?”
그는 그것이 부상당했던 왼쪽 어깨라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가라앉은 얼굴이 되었다.
“...아직도 아픈가?”
“아뇨 그건 아니고…”
아픈 건 아니다. 조금 찌르르한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 별로 좋지 않은 감각이어서 세리나는 눈을 찌푸렸다. 어깨의 상처는 이제 완전히 나았는데도 간혹 이럴 때가 있었다. 큰 부상이었기 때문에 후유증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불편했다.
에스트레드는 이제 부상의 흔적만 남은 하얀 어깨 위로 입을 맞췄다. 흉터마저도 화장으로 가려서 거의 흐려져 있었다.
“계승까지 전부 끝나면 한 삼개월은 너와 둘이서 한 방에서 뒹굴어야겠어.”
“...국정 운영은 어쩌시게요?”
“그따위 알게 뭐야. 호보프가 알아서 하라고 하지.”
세리나는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시간이 흐르며 황자는 점점 더 아이처럼 장난스럽고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다른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라서 아내는 아주 기뻤다.
“시간이 다 됐어요, 에스트레드님. 가야죠.”
그러나 감상에 젖을 만한 시간이 아니다. 둘의 결혼식은 과시에 가깝다. 에스트레드의 확장된 정치적 세력과 황자비와의 결약으로 인해 계승권을 얻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한 기회. 그래서 한정된 시간에도 모든 힘을 끌어모아 거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준비한 것이다.
“전하, 식이 진행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때맞춰 재촉하는 호보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는 눈썹을 구기고 세리나의 손을 잡고 문을 벌컥 열었다. 시종장이 눈썹을 팔자로 내린 채 화들짝 놀랐다. 피로에 지쳐서 불과 한달여간의 결혼식 준비 끝에 급격하게 노화가 온듯한 호보프의 얼굴이 가여웠다.
“잠시만요, 잠깐만.”
황자의 손에 끌려 나가던 세리나가 급히 그를 만류했다. 높은 구두라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 넘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에스트레드의 손에 의지한 채 구두를 벗었다가 다시 신고 걸어보았다.
“구두가 높아서 넘어질 것 같아요.”
세리나는 다시 구두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섰다. 이제 많이 익숙해진 힐이었지만 좀 힘들다. 평소보다 훨씬 균형잡기 힘든 무게의 머리장식과 드레스 때문인 것 같았다. 황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구두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건가?”
“...드레스 무겁습니다. 무겁다구요. 머리장식도 그렇고, 게다가 이 굽은...”
황자비는 한숨을 쉬었다. 거의 한뼘은 됨직한 높고 가는 굽은 아주 매끈하고 날렵했지만, 그게 착화감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아이보리색 새틴 위로 촘촘히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웨딩슈즈는 아름다웠고 동시에 아주 많이 불편해보였다.
“할 수 없군.”
황자는 투덜거렸다. 다음 순간, 세리나는 자신의 몸이 번쩍 들리는 것을 느끼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에스트레드님!”
“아, 귀 안먹었어.”
“내려주십시오!”
“어, 어, 발버둥치지마. 넘어진다고.”
에스트레드가 아내를 잡은 손에 일부러 살짝 힘을 빼자 세리나가 놀라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으며 그가 세리나를 안은 채 문을 나섰다. 호보프가 둘의 옆을 따라오며 안절부절 했지만 에스트레드는 그에게 ‘세리나의 구두나 챙겨’라고 쿨하게 말한 뒤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이미 구두를 챙겨 들고 뒤를 따라오는 안나의 얼굴에도 불안감과 웃음꽃이 절반씩 자리를 차지했다.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 넓은 중앙궁 전체가 온통 꽃과 레이스와 흰 실크 장식으로 넘쳐났다. 2층 전체를 준비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고 있어서 1층은 완벽하게 귀족들의 결혼 피로연을 위한 무도회 준비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연분홍색과 흰색이 뒤섞인 희귀한 종의 장미와 싱싱한 백합들이 중앙계단 가장 윗부분부터 난간 전체를 뒤덮었다. 꽃들의 싱그러운 향기가 넓디 넓은 궁 안의 높고 너른 공간을 가득 채웠다.
세리나를 안은 채 에스트레드는 중앙궁의 넓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가운데로 피처럼 붉은 빌로드 카펫이 깔려 그의 발걸음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의 넓고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흘러내려 에스트레드의 발등까지 덮었다. 안나가 재빨리 황자비의 부드러운 레이스 망토를 거두어 내었다. 아내를 안은 황자가 내려오는 걸음마다 일하던 사용인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여름 아침의 맑은 햇빛 속, 아름다운 금발의 황자비를 안고 내려오는 은발의 황자는 그 자체로 신적인 존재로 보였다.
재빠르게 다가온 레이디 휘에리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녀는 메리타 궁부인이 내쳐지면서 완전히 비어버린 결혼식 주관자의 자리를 맡아 준비를 해주던 터였다.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같은 부인은 에스트레드의 목에 매달린 세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것을 보고 터뜨리려던 웃음을 꾹 참았다. 은발의 황자는 언제나처럼 전혀 감정의 동요 없는 무표정하게 태연한 얼굴이었다.
“자, 이제 구두를 신으세요. 식장까지 황자전하께서 안고 데려가실 수는 없으니까요.”
휘에리는 일부러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에스트레드가 내려주자 세리나는 얼굴이 빨갛게 된 채 안나가 가지런히 놓은 구두에 발을 밀어 넣었다. 발목에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궁 안 가득한 꽃향기와 신선한 바람이 폐 속 깊숙히 밀려들었다.
멀쩡했던 심장이 느닷없는 긴장과 기대에 부풀었다. 드디어 결혼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