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90화 (90/142)

<-- 혼약 -->                “이젠 정말 지치네요, 황제 폐하.”

검은 머리 검은 눈의 황후는 천천히 걸어서 황제의 옆 소파에 앉았다. 젊은 시절 은발이 아름다웠던 황제 발렌2세는 머리가 점점 더 희어지고 있었다. 요 몇년 간 머리색은 점점 더 물이 빠지다시피 해서, 그의 머리는 거의 백발에 가까웠다. 수명이 길고 젊음이 오래 유지되는 로마나 황실의 황제답지 않게 얼굴에도 주름이 많이 생겼다. 라일리아는 그가 왜 이런 상태인지 명확하게 알았다. 다름아닌 자신이 그 이유였으니까.

로마나 황실의 인간들이 강하고 오래 사는 것은 내구성이 강한 육체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그 영혼에도 신의 축복을 받은 속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윗대의 발렌1세나 아래의 에스트레드 로마나보다는 약하지만 발렌2세 역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물의 속성을 지닌 황족이었다. 다만…

“목이 마른가요?”

라일리아는 물컵을 들어 그의 입가에 기울여주었다. 정신 지배와 함께 그의 능력을 묶어뒀기에 황제는 물의 지배자임에도 자신의 목마름 하나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황제의 저항력이 거세 라일리아가 그의 정신을 조금씩 부숴나가 침식이 심해지면서 그는 황후의 지시대로만 움직였다.

“슈엔은 슬슬 한계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

“참 약하구나. 어쩜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황후는 혀를 찼다. 앞에 앉아있던 레드포 로마나도 어깨를 으쓱했다.

“황족이라고는 하지만 페로몬의 특질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으니까요, 실험을 위해 도나 누앤만큼의 페로몬을 뽑으려고 혈액을 워낙 많이 뽑고 다시 수혈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니.”

슈엔 로마나의 상태는 거의 죽음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레드포는 그녀가 이성을 잃고 다른 곳으로 뛰쳐나가 말썽을 부리기 전에 황자궁 지하에 가두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도나 누앤 역시 그렇게 해서 지하에 가두고 실험을 계속했으니까.

“슬슬 쓸모도 없어져 가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마수로 바꿔볼까, 어차피 힘이 다 떨어져서 쓸만한 결과도 나오지 않겠지만.”

황후는 도나 누앤에게서 뽑아냈던 농축된 페로몬이 담긴 플라스크를 흔들었다. 그녀를 폭주시켜서 좀 더 소란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사실 도나누앤을 빼앗긴 건 뼈아팠다. 이번 고발로 황자궁을 수색할 수 있었다면 일석이조였는데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세리나 리엔의 몸은 생각보다 탐이 나더군요. 힘이 강하고 무엇보다 페로몬이 짙어요. 가끔 생각하는데, 만약 에스트레드를 정신지배해서 세리나의 페로몬으로 마수화 시킨다면 정말 최대의 마수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고. 근사할 것 같지 않나요.”

레드포 로마나는 씩 웃으며 턱을 괴었다. 항상 생각해왔지만 세리나 리엔은 상당히 근사한 여자다. 강인한 신체, 강인한 정신, 독특하고 강렬한 페로몬, 무엇보다 에스트레드의 여자.

둘을 먼 발치에서 구경하며 레드포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꽤 궁금했다. 그는 사랑받아본 적도, 사랑을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아주 큰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십대의 소년 소녀들이 성장하여 결국 결실을 맺고 손을 잡아 살아간다. 대체 어떤 느낌일까.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그리 실현가능성이 높진 않구나. 황제의 정신을 지배하는 데만도 힘이 꽤 들었어. 정신계파의 마법으로는 내 힘이 더이상 종속자를 늘릴 수 없다.”

라일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처럼 차갑고 가라앉은 얼굴의 어머니를 보면서 레드포는 그녀가 도마뱀같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피, 의중을 알 수 없는 눈. 몸은 비록 제비꽃처럼 아름다운 보랏빛 최상품 실크의 드레스를 입은 가냘픈 여인이었지만 영혼은 지옥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같은 여자.

“아뇨 뭐...진지하게 말한 건 아니고. 하지만 마수의 증강은 시간이 더 필요하잖아요. 고발로 결혼식 일정을 늦추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황후는 황제에게서 좀 떨어져 앉으며 앉음새를 고쳤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실크 드레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긴 검은 머리카락이 소파 위로 흩어져 내렸다. 머리카락은 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과 마찬가지로, 흑발은 모든 빛을 끌어들여 삼키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하여간 벌레 하나가 끼어있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내가 발렌2세의 컨트롤만 풀 수 있다면 그 혼약 시녀 따위를 장악하는 건 아주 쉬울 텐데...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지.”

선대에 비해 약하다고 해도 로마나의 황제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야 지배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여력이 있을 때 밸러스 대공이나 클리스 로마나에게 영향력을 미쳤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힘들었다.

라일리아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슈엔을 준비시킬 것이다. 성공한다면 결혼식에서 완전히 끝을 낼 수 있을 게고, 아니라고 해도 제위 계승식까지 혼란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

“꼬리를 잡힌 것 같지는 않나요?”

“잡았겠지, 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을 게다. 황제가 내 편이니 어찌 수작을 부릴 길도 없을 테고.”

황후는 경멸스러운 눈으로 발렌2세를 내려다 보았다. 백발의 황제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폐하의 의식을 조종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편이 낫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허수아비 같아 보여도 로마나 황실의 수장이다. 에스트레드 로마나를 제외한다면 가장 강한 황족이지. 내가 정신지배를 한다고 해도 그리 간단히 중요한 결정들을 하게 만들 수는 없어.”

발렌2세의 정신지배를 하는 것만도 오랜 기간이 걸렸다. 지배를 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묶어두거나 소극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게 전부였다. 적극적으로 제국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게 만들려 하면 반동이 튀어나왔다.

“결혼식이 망가지고 나면...그 다음은요?”

“중앙 정부가 흐트러지면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건 순식간이다. 특히 로마니엔처럼 소수민족들을 강압적으로 복속시킨 대제국은 더하지. 중앙대륙 전체에 전화가 일 것이다.”

기대가 돼서 그녀는 웃었다.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나가고, 신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로마니엔 황실의 신화가 무너질 것이다. 단신으로 로마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니 이토록 기쁠 데가.

레드포 로마나는 손가락 끝으로 불꽃을 가지고 놀았다. 다소 어둑한 방 안에서 불꽃이 타닥거리며 튀어올랐다. 작고 예뻤지만 위험했다. 황자의 불꽃은 극염의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손장난을 계속하면서 막내 황자는 여상하게 말했다.

“성공을 하든 어쩌든 결판이 날 때가 다가오네요. 기분이 어때요, 어머니? 정말 오래 걸렸잖아요.”

이미 삼십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홀로 제국의 황실까지 침입해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녀는 제발, 로마니엔이 멸망하기를 바랐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마수에게 짓밟힌 대륙에서 제국민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몰락하기를. 지독히 오래된 라일리아의 인생에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라일리아의 고향, 동왕국이 몰락해갔던 그 모습처럼 멸망하기를.

황후는 짙은 어둠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지옥같은 건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느릿하게 답했다.

“아마 아주 기쁘고, 아주...비참하겠지.”

“기쁜 건 이해하는데 비참하다뇨?”

“나는 마법사의 운명을 타고난 자. 동왕국의 마법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생명이 마법의 본질.”

황후는 이제 눈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아 메마른 눈으로 주위를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생명의 마법을 어둠으로 물들인 대가로 복수를 받는다. 사후 세계 같은 것은 믿지 않으니 지옥은 두렵지 않았지만 마법의 본성을 거스른 마녀의 심정은 참담 그 너머에 있었다.

레드포 로마나는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어찌 됩니까?”

“...무슨 말이냐?”

“제국의 멸망 이후에 말입니다, 어머니.”

황후는 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레드포의 얼굴은 반항적이지 않았지만 그리 온순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검은 눈을 들여다 보았다.

“로마니엔이 망하고 나면 저는 뭘 해야 할까요?”

“...제국 멸망이 그리 한순간에 이뤄지진 않을 게다. 계속해서 몰락에 가속을 붙여야…”

“아무튼 그 복수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 말입니다. 저는 어머니께 쓸모가 계속 있는 존재일까요?”

라일리아는 아들이 대체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그는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말에 잘 따라주었다. 복수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 당신의 아들이 맞긴 한지.”

레드포의 말투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라일리아는 반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차분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내 아들이 아니면 무엇이니.”

“많지 않습니까, 키메라도 있고, 어머니가 직접 실험하는 마수도 있고. 어쩌면 제3의 무언가일 수도 있고. 그거야 어머니가 더 잘 아시겠죠.”

“넌 내가 낳은 아들이야.”

“마법의 힘을 빌려 탈취한 육체로요, 예 그렇죠.”

“레드포!”

황자는 고개를 돌려 황후를 외면했다. 그녀는 가장 강인한 마녀였고 복수자였고 레드포의 친구이자 파트너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단 한번도 라일리아를 모친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깨를 짚는 황후의 부드러운 손길을 떨쳐내고 레드포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주 오래전부터 느껴온 비참함을 누르려 애쓰면서 그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뒤를 케린 모나칸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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