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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87화 (87/142)

<-- 혼약 -->                북부대륙의 정복기는 상당히 오래전이다. 현재 스무살인 레드포 로마나의 탄생 몇년 전이니 거의 25년 가까이 된 일이었다. 그 시기 북부 산맥의 히스토르인들은 제국의 정복에서 벗어나고자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황후 라일리아 로마나는 전쟁 진압의 선봉에 선 워-위치였다. 당시의 기록들은 황궁 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군 보고서는 오래 지나도 워낙 기밀인 탓에 아주 깊은 곳에 보존되고 있었다. 세리나는 보고서의 원본을 찾아서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역사책이나 전략서에 인용조차 되지 않는 허접한 보고서라지만 일단 이 상황에 확인은 필요했다. 당시 라일리아의 부관으로 참전했던 기사는 전쟁이 끝난 직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황후 폐하는 분명히 동부와 관계가 있어.’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라일리아 로마나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동왕국과 관계가 있었는지, 만약 동왕국 관련자라면 어떻게 노공작 에레니아의 집안까지 파고들 수 있었는지였다. 후자는 특히 말이 안됐다. 로마나 황실의 혈통은 철저하게 관리되었고 에레니아 공작의 집안은 황실 직계로 밸러스 대공과 함께 가장 짙은 혈통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었다. 라일리아 로마나 역시 열다섯살에 이미 사교계에 데뷔하여 얼굴이 알려졌다. 비록 몇번의 무도회 참석 이후 드문 마법 재능을 살리기 위해 두문불출 공부만을 하고, 그 이후에 워-위치가 된 이후 전장으로 나돌았다지만 결코 숨기거나 조작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에레니아 노공작의 늦둥이 막내 딸이 드물디 드문 마녀라는 사실 때문에 주목 역시 꽤나 받았기 때문이었다.

세리나의 긴 드레스가 먼지 쌓인 바닥을 스쳐 자국을 만들었다. 옅은 하늘색의 실크로 된 스커트 자락과 레이스 끝단에 먼지가 붙겠지만 그녀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옷차림에 크게 신경쓰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지금이야 필요할 때는 어찌저찌 제대로 귀부인의 몸가짐을 갖출 수 있다지만 황자비는 기사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승마용 부츠와 정장을 입고 방문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생 가져온 직업이 바뀌기는 했지만 지켜온 가치는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되었다.

문서 보관서는 거대했다. 다섯층에 걸친 책장들이 층층이 위로 올려져 있었고, 솜씨좋게 설계된 덕에 서로 겹치지 않게 선 선반들이 가득 각종 보고서와 책들을 담고 있었다. 나란히 꼽혀 카테고리별로 배열된 보고서들 중에서 세리나는 어렵지 않게 한권을 찾아냈다. 먼지가 가득 쌓여 탈탈 털어내야 했다.

“어지간히 방치되었구만.”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 뭔가 건질만한 내용이 있다면 황후는 진작 빼돌려 없앴을 것이다. 어쩌면 진짜 보고서는 그렇게 사라지고 여기 남은 것이 그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황자비는 허탕일 것을 알면서도 가죽표지의 잠금장치를 열고 보고서 묶음을 열었다.

이십오년이 지났으니 아무리 보관이 잘되었더라도 낡은 종이는 어쩔 수 없었다. 노랗게 변한 책장을 넘기면서 세리나는 주의깊게 페이지를 읽어내렸다. 그녀가 황궁에 입궁해서 상당히 초기에 찾아봤던 기억과 마찬가지로, 거기엔 정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저 어디에 가서 군의 기강을 세우고 위대하신 마녀 라일리아님께서 적을 무찌르시고….라는 미사여구만이 잔뜩 붙은 찬양의 보고서였다. 온통 입에 발린 소리만으로 손가락보다 두꺼운 두께의 보고서를 만들어낸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만약 자신의 부관이 이따위로 보고서를 썼다면 그 자리에서 파면이었을 거라고 세리나는 불쾌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목이 말라서 병에 넣어온 주스를 한모금 마셨다. 창가 위에 병을 조심스럽게 올려두고 세리나는 책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한심한 기분으로 읽고 있던 그녀의 머리 위로 큰 손 하나가 올라왔다.

“...에, 에스트레드님?”

세리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은발의 황자가 웃고 있었다. 도서관의 높은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아래 에스트레드의 눈부신 은발이 빛났다. 오색으로 반짝이는 책먼지 들이 그의 주위를 떠돌았다.

책에 열중해 얼굴 근육이 온통 풀어진 그녀가 귀여워서 그는 천천히 손가락 끝으로 황자비의 뺨을 쓸었다. 그는 세리나의 뒤로 붙어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제가 간단히만 훑어본다고 했을 텐데요.”

세리나는 어린 아이를 꾸짖듯 말했다.

“민감한 시기라 옛날 문서를 훑어본다는 사실은 저 하나만으로 족한… 에스트레드님.”

“아아, 그래그래. 나도 좀 쉬고 싶다고.”

황자는 조금 불퉁한 목소리를 투덜거렸다. 아내는 여전히 수호기사이던 그 시절의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 수족으로써 직접 움직이려는 버릇이 있어서 에스트레드는 그것이 가끔 신경질이 났다. 그는 심술을 애써 죽이면서 세리나의 허리를 두른 손에 힘을 주었다.

“어때, 뭔가 발견했나?”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숙여서 세리나의 너머로 문서를 빼꼼히 바라보았다. 먼지 나는 페이지 위로 중언부언한 글줄들이 써져 있었다.

“글쎄요...별다른 건.”

세리나가 한숨을 쉬었다. 나흘 뒤가 결혼식인데 그녀는 피부관리도 받지 않고 문서 보관서를 헤메고 있다. 사실 정말로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신부는 세리나 리엔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결혼식의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당히 급박하게 고발이 있었으니 당연하긴 했지만, 평생 한번 있을 결혼식인데 이렇게 손을 놓고 있어도 되나 싶었다. 모든 일은 시종장과 내무부의 손에서 전부 해결되고 있긴 했지만.

에스트레드는 천천히 세리나의 목덜미와 어깨 위로 입술을 내렸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이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에스트레드님.”

만류하는 세리나의 손을 잡고서 황자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따스하고 축축한 점막끼리 부딪히고, 그의 혀가 깊숙히 아내의 입 안을 애무했다. 달콤한 감각에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의 목에 매달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서로의 품안에서 느끼는 안락함을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기는 했지만 이렇게 일상 속에서 애정표현을 하는 건 참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황자비는 입술을 떼고 조금 웃었다.

“왜 웃어? 지금 웃어?”

황자는 자신도 씩 웃으면서 퉁박을 주었다. 어차피 결약은 몇달 전에 이루어졌고, 서로 마음마저 이미 맺었다. 결혼식이라는 게 특별할 이유가 없었다. 계승식을 위한 사전작업, 정치적으로 에스트레드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둘의 결속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일이라 세리나는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모두가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는 시점.

“나흘 뒤지요.”

“그래.”

주관자 메리타 궁부인은 황제의 명으로 결혼식으로 배제가 되었지만 혼약시녀 줄리엣 와부이는 아예 황자궁으로 들어와 안나와 함께 일을 했다. 아마도 에스트레드가 제위에 오르고 정국이 안정된 이후에 와부이 백작가를 수도로 끌어올려 함께 살도록 해야할 것이다. 지금은 앙심 품은 궁부인과 황후만 해도 위험했다. 덕분에 마음 놓고 일을 맡길 인력이 늘어서 호보프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세리나는 천천히 에스트레드의 뺨을 매만졌다. 매끄럽고 날카로운 얼굴의 선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그의 볼 위에 키스를 했다. 에스트레드는 아내의 품 안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본래 그리 평화롭지도 게으르지도 않은 사람이었지만 세리나와 함께 있는 이렇게 고요한 순간들이 금과 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은발의 황자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평한 마누라야. 어제까지도 그 조잡한 속임수들 때문에 재판장까지 갔는 데 말이야.”

“어떤 분 수호기사로 있으면서 늘어난 건 배짱 밖에 없어서요. 뭐 당장 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결혼식 직전인데 별로 수줍은 신부 같지도 않고.”

“수줍길 바라시나요?”

“그건 아니고.”

황자는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황금빛 정수리에 볼을 비볐다. 부드러운 금실같은 머리카락들이 그의 뺨 위로 흩어졌다.

세리나는 가슴 깊이 그의 향을 들이마셨다. 기분이 좋은 황자의 몸에서 그 특유의 향이 진하게 퍼져나왔다. 짙고 묵직한 남성의 향. 약간 알싸하기까지 한 페로몬이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실제로 페로몬에서 온도까지 느껴질리는 없는데 온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따스함에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서 웃으며 그의 품으로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좀 차갑군.”

에스트레드는 걱정스럽게 세리나의 왼쪽 어깨를 매만졌다. 그녀의 몸은 따뜻했지만 왼쪽 어깨가 유달리 차가웠다. 감각도 다른 곳과 달랐지만 세리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군인으로 몇년을 구르다보면 싫어도 알게 된다. 크게 다친 상처는 어차피 후유증이 남게 되어 있었다.

황자비의 몸에서도 청명하고 황홀한 향기가 솟아올라 황자의 짙고 묵직한 향과 섞여들었다. 마치 원래도 하나였던 것처럼, 두 사람의 페로몬은 서로 융화되었다. 에스트레드는 결약을 맺은 반려의 페로몬에 자극받아 몸의 피가 빨리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세리나의 녹색 눈을 들여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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