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약 --> “보여드리죠. 제가 반려에게 선물한 보석.”
그의 손에서 함이 열리고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보석이 드러났다. 백금으로 넝쿨처럼 휘감긴 푸른 광물은 밤하늘 별처럼 목걸이 전체로 흩뿌려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과연 듣던대로 푸른 보석에서 빛이 나는듯했다. 황후 라일리아가 잠깐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함을 노려보다가 다시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자, 보십시오.”
함에서 목걸이를 들어올리자 보석들이 빛을 일었다. 상자 바닥 부분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마법의 힘을 빌리긴 했습니다. 보석함 아래에 작은 빛의 구를 장치해서 보석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지요. 그것만 해도 돈이 꽤 들더군요.”
에스트레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증거물은 중앙 연단으로 옮겨져 배치되었다. 황궁 마법사 캐딜럿이 다가가 보석을 살펴보았다. 과연 보석 자체에서는 전혀 아무런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함 바닥에서 은은하게 나오는 빛응ㄹ 위한 마법구에서 미약한 마나가 느껴질 뿐이었다. 캐딜럿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주 아름답고 동왕국 고서의 묘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모양새였지만 이건 그냥 값나가는 고급 보석일 뿐이었다. 바다의 눈물 따위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는 잠깐 갈등했다. 어차피 검증자는 그였다. 고발자로서 최선을 다해 에스트레드를 궁지로 몰아넣을 것인가, 아니면 수상한 황후에게서 꼬리를 빼고 물러설 것인가.
그때 황후가 입을 열었다.
“이건 가짜 증거물품이오.”
에스트레드는 놀랍다는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는 전혀 뜻밖이라는 투로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아내에게 준 예물인데 가짜라니요?”
라일리아는 가증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모양은 정확하게 고서의 내용이나 캐딜럿이 말한 내용과 맞았다.
“저건 가짜야.”
그녀가 다시 주장했지만 황자는 흐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세리나가 발언권을 얻어 일어섰다.
“저 목걸이가 제게 주셨던 예물이 맞습니다.”
“어떻게 증명하지?”
“가짜라는 건 어찌 증명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받은 건 분명 저것인데요.””
“헛소리 마라. 모양만 똑같이 가짜를 만들어온다고 해서 속을 줄 아는가? 바다의 눈물에서는 분명히 마나가…”
거기까지 말하다가 라일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세리나는 천천히 답했다.
“어떻게 아십니까, 황후 폐하. 동왕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보석. 그 정확한 모습을 마치 직접 보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황후는 들을 가치가 없다는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황후는 마치 목걸이의 정확한 모양을 아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 목걸이는 일전 황자 전하께서 제게 보여주신 뒤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흔한 모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척 드문 스타일도 아니지요. 여기에서 마나가 느껴지시나요?...아뇨ㅡ저 역시 소드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로서 약간의 마나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만,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황홀한 금발을 틀어올린 황자비는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렸던 라일리아는 세리나를 노려보았다. 이전처럼 거대한 적대감이 파도처럼 세리나를 향해 몰아닥쳤지만, 이번에는 그녀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두 여자의 기싸움에 도열한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증인을 들라 하시오.”
진행인이 외쳤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줄리엣 와부이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섰다. 그녀는 증인석에 서서 재판장을 둘러보았다. 압도된 눈빛이었다. 캐딜럿은 아직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증인 줄리엣 와부이, 명백하게 말해주시오.”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짜고 치는 판이라면 증인 역시 할 말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증언이 반대되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라일리아의 편에 설 수는 없었다.
“목걸이는 빛이 났다고 메리타 궁부인에게 말했다고 했지요...빛이 날 때 황자비 전하의 목에 걸려 있었습니까, 아니면 함에 놓여져 있었습니까?”
“확실히 빛은 났었습니다만 함에만 놓여 있었습니다. 걸어주시진 않았고요.”
황후 라일리아는 불쾌한 얼굴로 의자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상식적으로 예물을 선보이며 신부의 목에 걸어봐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줄리엣의 증언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했다.
“함에 놓인 채 스스로 빛을 냈습니다. 아주 아름다웠어요.”
줄리엣은 순진한 얼굴로 주장했다. 그녀는 황후 측이 불러들인 증인이었다. 에스트레드 궁의 원래 사용인들은 편파적이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메리타 궁부인의 보호 아래 있는 그녀만이 증인으로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한 황후와 캐딜럿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황후파 귀족 몇명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캐딜럿이 서둘러 보석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래요...확실히 목걸이에서도 마나가 느껴지진 않는군요. 마법구에서만 약간 나타납니다. 이 정도라면 스스로 빛나는 성질을 지녔다고 보기엔 어렵죠, 마법구에서 마나가 묻어난 정도라면 몰라도요.”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거짓말도 아니어서 마법사는 수월하게 말했다. 황제는 흐리멍텅한 얼굴이었고 황후만이 사냥감을 놓친 호랑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
에스트레드가 손을 들어올렸다.
“어떻습니까, 황후 폐하. 황제 기만죄에 대한 혐의는 해소 되셨습니까?”
증인인 줄리엣 와부이가 연단에서 내려와 물러나갔다. 귀족들이 모인 홀의 양 옆이 웅성거렸다.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상황은 생각보다 싱겁게 종료가 되었다. 증인과 고발인이 전부 황후를 배신한 상황에서 황후가 결과를 뒤집기는 쉽지 않았다. 황제가 느릿하게 말했다.
“황후에게 물을 것은 아니지, 애초에 고발인은 캐딜럿이었으니.”
캐딜럿 역시 한걸음 물러섰다. 그는 매우 죄송하다는 얼굴을 하고 허리를 숙였다. 마법사의 머릿속에서는 바쁘게 계산이 돌아갔다. 황후의 마법이 욕심이 나서 에스트레드의 고발에 나섰지만 그녀의 검은 속이 의심되는 마당에 더 깊이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에스트레드도 경계 대상이었지만 라일리아는 혐오의 대상이었으니까. 이틀 전 저녁 세리나가 직접 방문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황자 측은 분명히 캐딜럿과 손을 잡을 의향이 있어보였다.
“상관 없습니다. 의심이 간다면 대상이 누구이든 문제를 제기하는 게 옳지요. 캐딜럿을 탓하지 않겠습니다.”
에스트레드는 대범하게 답했다.
황자 측 귀족들은 가슴을 쓸어내렸고 황후 측 귀족들은 다소 실망한 기색이었다. 노공작 에레니아는 미간을 꿈틀거렸다. 황자를 분명히 잡을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확실한 증언을 확보했다고 메리타 궁부인이 호언장담했던 줄리엣 와부이에게서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황궁 마법사 캐딜럿도 딴 소리를 했다. 그녀는 지팡이를 바닥에 탕탕 찍고 노여운 채 재판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황제가 일어서기도 전에 나가버린 무례였지만 워낙 나이가 많은 노공작이라 발렌2세는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혼약 시녀를 통해 말을 전하는 결혼식의 주관자 메리타 궁부인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설마 친모의 이름을 부를 줄은 몰랐던 황제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메리타 궁부인. 네 어머니이자 결혼식의 주관자인 사람.”
혹시라도 잊었나 싶어서 황제는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말했다.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관자의 역할을 취소해주시고, 근신의 명을 내려주십시오. 그렇다면 이번 일을 문제삼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
발렌2세는 장성한 아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첫째 아들은 긴 은발을 지닌 장신의 남성으로 성장해 있었고, 사실 정말 힘을 겨룬다면 황제 자신 역시 우열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나칠만큼 선대 황제를 닮은 아들. 그리고 아버지에게 언제나 정신적으로 쫓기는 듯한 인생을 살고 있던 자신.
황제는 뿌연 머릿속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뇌리 저 멀리서 검은 분노가 느껴졌다. 그의 정신은 천천히 그 검은 증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어쨌든 내 사람인 캐딜럿 역시 섣불리 움직인 잘못이 있으니.”
에스트레드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더이상 메리타 궁부인의 성가신 간섭을 듣지 않아도 되었고, 첩자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황제와 황후가 일어나서 재판장을 나가고 그 뒤를 눈치 보다가 캐딜럿이 따라 나섰다. 그러고나자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시 이상하죠?”
세리나는 조용히 남편에게 속삭였다. 황후는 바다의 눈물을 직접 본 것처럼 말했다. 동왕국 마지막 혈연이 지키던 보석은, 도무지 다른 곳에서 볼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심지어 라일리아는 목걸이 자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
에스트레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발은 생각보다 쉽게 꺾어버렸지만 뭔가 미심쩍었다. 세리나는 워-위치 시절 라일리아를 보좌했던 부관의 보고서를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