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약 --> 캐딜럿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수경을 노려보았다. 메리타 궁부인의 방에 선물한 작은 손거울은 황궁마법사의 수경 매개체였다. 잔잔한 수면 위로 흐릿하게 여자 둘의 인영이 비추었다. 황후에게 들킬까 두려워 선물한 거울은 자그마했기 때문에 형태조차 확실하지 않은 그림자만이 수면에 떠 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 역시 분명치 않았다.
황궁마법사는 귀를 기울였다.
‘다녀왔...대공녀 전하의 상태가...편지…’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답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낮은 말소리를 더욱 낮게 했는지 소리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가 힘들다. 거의 물 위로 귀가 닿을 만큼 고개를 숙이고, 캐딜럿은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몇분 동안 이어진 대화는 잠시 후 끊겼다. 세리나 리엔의 시녀의 나지막한 인사 소리와 함께 수경이 조용해졌다.
“슈엔 대공녀라.”
에스트레드와 황후 측이 결코 한배를 탈 수 없는 대립된 사이라는 사실 정도는 안다. 하지만 불안감은 계속해서 캐딜럿의 마음을 잠식했다. 황후 라일리아가 에스트레드를 쳐내는 것을 도와달라며 슬쩍 실험의 이야기를 흘리지 않았다면 캐딜럿 역시 결코 그 여자와 한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라일리아는 믿을 수 없고 뱀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황궁 마법사는 마법 지식이 필요했다. 마법이 거의 발달하지 못한 중앙 대륙에서, 그것도 로마니엔 제국에서 마법을 연구하기란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동부는 갈 수 없었다. 전쟁에 익숙한 워록이 아닌 일반 학문 마법사인 그로서는 백년 전부터 이미 전쟁에 휩싸인 동왕국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실험 매개체도 없어서 제국군이 그곳에서 수거해온 마법사들의 시체를 충분한 웃돈을 주고 뒤로 빼돌려 실험을 진행해야 했다. 십여년에 걸쳐 죽어라 연구에 매달렸지만, 그것도 동왕국의 마법 서적들을 밀수해 연구한 끝에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낸 방식이었기 때문에 연구는 진척이 쉽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꿈을 꾸었다. 누군가 힌트 하나만 알려준다면, 저 시체들에서 힘을 끌어내 다른 객체에게 넘길 수 있는 방식을…
‘어때요, 캐딜럿. 혈액을 촉매로 한 내재된 능력의 폭발에 관심이 있나요?’
라일리아가 그를 불러 했던 첫마디였다.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만 보는 황궁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황후는 느릿하게 웃었다.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유령같은 여자는 그녀의 수경 위로 영상 하나를 불러내었다.
인간 하나가 있었다. 묶인 채 주사기로 액체를 주입받은 그는 잠시 쓰러졌다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 위로 갑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 뒤로 갈기가 솟아나고,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부풀면서 인간의 신체 자체가 엄청난 크기로 부풀었다. 곧 그가 나무를 베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인간은 육체적 능력이 가장 뛰어났던 자. 만약 마법적인 능력이 뛰어난 자라면 그 부분이 자극되어 폭발하겠죠.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이건 인체 실험 아닙니까? 아무리 황후 폐하라 하셔도…’
‘서로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맙시다, 캐딜럿. 우리가 필요없는 말을 하면서 사교적인 시간을 보낼 사이는 아니잖아요.’
황후 라일리아가 웃었다. 그녀는 어둡고 우아한 여자였다. 마법사로서 느껴지는 그녀의 강함은 그 힘 자체가 어딘가 음습한 기운을 띄우고 있었다. 캐딜럿은 그 힘이 탐이 났다. 힘과 동시에 라일리아가 움켜쥐고 있는 지식. 마법사의 본능은 언제나 탐욕스러웠다. 그 지식만 바라보고 캐딜럿은 황후에 대한 반감을 딛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만약 황후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거라면…”
캐딜럿은 불안하게 손을 비볐다. 슈엔은 레드포 로마나의 반려다. 세리나 리엔과 슈엔 로마나가 서로 연락을 한다는 건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 여자가 절대로 순순히 내게 지식을 내놓을 리가 없지.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다.’
황궁 마법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라일리아에게 열등감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에도 젊고 아름다운 라일리아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저 이번 일에 그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황후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바다의 눈물’은 마법적인 보석이다. 증거 검토시에 결국 보석의 진품 여부 판별은 정식 지위를 가진 황궁 마법사 캐딜럿이 할 수 밖에 없다. 황후 역시 그 부분을 알고 그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말하자면 진짜 바다의 눈물이 아니더라도 거짓 증언을 해달라는 청탁이나 다름 없었다.
‘그럴 가치가 있을까? 아니, 그런다고 해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까?’
캐딜럿의 머릿속이 혼란해져 오기 시작했다. 황후는 무슨 분탕질을 칠지 모르는 여자였고 오랜만에 만난 황제는 기묘하게 무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쁜 년, 빌어먹을 년!”
결국 마법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발작적으로 화를 내는 그의 귀에 수경 속에서 또다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빨리 수경 위로 엎드렸다. 이번 목소리는 조금 더 확실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오. 세리나 리엔 전하께서 대공녀께요? 하하, 뭐 그거야…’
‘편지라니 태평하지요?’
‘어차피 두분은 같은 신세니까요. 두분 다 황후 폐하께서 선물한 귀중한 차는 잘 드시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캐딜럿은 한참 생각했다. 황후는 귀중한 차를 슈엔과 세리나 모두에게 선물했다. 라일리아에게 슈엔은 며느리였고 세리나 역시 같은 위치라고 했다.
‘설마 황자비와 황후가 서로 손을 잡은 것인가.’
눈에 거슬리는 황제파를 치워버리기 위해 라일리아가 손을 쓴 것일 수도 있었다. 캐딜럿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모시는 제자 중 한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황자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라고?”
지금 그 여자가 여기 왜 온단 말인가. 캐딜럿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거칠게 열린 문 앞에 제자와 세리나 리엔이 약간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발의 여자는 곧 침착하게 캐딜럿을 훑어보았다. 황궁 마법사는 눈을 있는대로 찡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먼저 방안으로 들어갔다.
“너는 밖에 있어, 황자비 전하, 들어오시오.”
*****
마법사의 방은 넓고 침침했다. 일부러 햇빛을 피하도록 설계된 구조는 태양의 방향으로부터 돌아앉아 습하고 어두웠다. 지하 연구실이 생각나는 퀘퀘한 공간이었다.
세리나는 캐딜럿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산밑 지하 연구실에서 키메라에 잡힌 채 능욕당하던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의 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소파에 앉은 그녀는 나온 차를 한모금 마셔 입을 축였다. 캐딜럿은 기분 나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캐딜럿.”
“그러시겠죠. 우리가 그저 사교적으로 놀 사이는 아니니까.”
어딘지 라일리아가 생각나서 마법사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세리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둘러 말할 생각은 없었다.
“황후께 무엇을 받기로 하셨습니까?”
“무슨 소리죠? 받긴 뭘 받습니까.”
“황후로부터 고발과 검증에 대한 대가 말입니다.”
“뭘 착각하시나 본데, 나는 그 보석이 정당하게 황제 폐하께 바쳐지지 않은 데 대한 정당한 처벌로써…”
“마법력을 늘리는 실험에 대해 전수받기로 하셨나요?”
캐딜럿은 흠칫했다. 그가 움찔하는 작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세리나는 눈을 빛냈다. 짐작이 맞았다.
“난 당신과 협상을 하러 온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걸 알려주러 왔을 뿐이에요.”
“무엇을 말입니까.”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황자비의 눈치에 캐딜럿은 거래를 부정하지 않았다. 만약 황후와 세리나가 손을 잡고 있다면 거래를 부정해보았자 그의 꼴만 우습게 될 것이다. 그는 수상하게 세리나 리엔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자는 차분하게 앉아서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실험 말입니다. 당신의 힘을 늘릴 수는 있지만 일시적이죠. 동시에 육체는 파멸할 겁니다. 인간의 형태를 다시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에요.”
“...무슨 소리인지…”
“말 그대로. 원하던 마법력을 가질 수는 있겠죠. 하지만 당신의 이지는 사라지고, 인간이 아니게 될 겁니다.”
캐딜럿은 손바닥 안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진짜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실험법이다. 결국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의 마법력을 높이는 것이었으니까.
“진짜인지도 모르겠고...왜 내게 그런 걸 알려주시는 겁니까, 전하?”
“그 실험을 받게 되면 안좋은 꼴이 벌어지거든요. 어둠숲 쪽 마수가 최근 들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는 것,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죠.”
“그게 무슨 상관인…”
“그 마수들이 황후의 실험을 통해 나타난 결과물들이니까.”
황궁 마법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그의 눈을 마주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만약 당신이 실험을 받아들인다면 또 한마리의 마수가 황궁 안에서 사냥당하겠죠. 내 손에든, 에스트레드 전하의 손에든. 그래도 좋다면 황후와 계속 협력하세요.”
용건은 끝났다며 황자비는 깔끔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대접하기 위해 나온 차가 채 식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배웅도 없이 마법사의 방을 나갔고, 캐딜럿은 잠시 굳은 채로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여자의 긴 드레스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 뒤로 사라졌다.
이틀 뒤 약식 고발이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죄가 입증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식이 불과 며칠 뒤였기 때문에 정식으로 고발 재판이 이루어지기 전 사전 검증과 같은 자리였다. 과연 어느 쪽에 설지 캐딜럿은 결정을 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