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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79화 (79/142)

<-- 혼약 -->                우기가 지난다고 해서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로마니엔의 수도에는 여름에 언제나 때아닌 소나기가 쏟아지곤 했다. 줄리엣은 비를 피해서 아무 나무 밑으로나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궁부인의 후원을 뛰쳐나와 걷다보니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처음 궁에 들어와서 에스트레드를 만나기 직전이 생각났다. 메리타 궁부인은 다정한 얼굴로 줄리엣의 머리를 매만져주며 생전 처음 보는 보석 장식들을 꽂아주었다. 그녀는 줄리엣이 몹시 아름답고 어리니 모든 일이 아주 쉬울 것이라고 했다. 에스트레드의 눈에 들어 그의 반려 자리를 꿰어차면 지금의 황후 라일리아처럼 천하를 호령하며 살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한번 눈에 들어 잠자리만 같이 하더라도 지금의 궁부인처럼 후궁 한켠에 자리를 얻어 편안하게 일생 동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줄리엣은 스스로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고 자신의 혈통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살면서 자신보다 강한 기운과 페로몬을 가진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황실의 여인들이야 다르겠지만, 적어도 줄리엣이 여태까지 살아온 좁은 세계에서는 그랬다.

‘잘못 선택했어.’

티파티에서 에스트레드에게 봉변을 당한 이후에 모두 접고 돌아갔어야 했다. 집안을 살리겠다는 욕심으로 궁에 남은 것이 화근이었다. 메리타 궁부인은 똑같은 감언이설을 되풀이하며 줄리엣을 꼬여냈다. 비록 반려가 결정되긴 하였으나 너에겐 아직도 후궁의 기회가 남아있다고. 청첩장에 글씨를 위조한 것과 차를 선물한 것이 모두 그 길에 이르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줄리엣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사기꾼. 뱀 같은 여자.’

손이 떨렸다. 궁부인만 믿고 들어온 황궁이었다. 유일한 연줄이고 기댈 곳이었는데, 메리타 궁부인과 모나칸 후작은 줄리엣을 그저 장기말로 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만약 지금 그녀가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일이 끝나기도 전에 줄리엣은 횡액을 당했을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 몸을 숨겨야 해.’

지금 에스트레드 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황자는 잔인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다. 그가 줄리엣의 배신을 안다면 단숨에 그녀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황자에게 그의 측근을 제외한 자들이란 벌레와 같을 뿐이었으니까.

줄리엣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수도에 그녀가 아는 사람은 메리타 궁부인 뿐이었다. 비에 푹 젖은 채로 줄리엣은 기억 속을 더듬었다. 그녀는 이윽고 뭔가를 결심하고 입술을 물었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줄리엣은 달려나갔다. 황궁 바깥 쪽을 향하는 길이었다.

*****

에스트레드는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돌아왔다. 세리나는 조용히 안나와 레이디 휘에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더운 여름임에도 침실 안은 서늘하게 냉기가 돌았다.

“쥐새끼들이 분탕질 치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아.”

황자의 안색을 보고 세리나는 그가 무척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는 그가 이렇게 기분이 드러나는 일은 드물었다.

황제 측의 마법사 캐딜럿은 아예 작심한 것처럼 이미 촘촘하게 망을 깔아둔 상태였다. 물론 정세에 그다지 밝지 않은 마법사가 한 짓은 아닐 게다. 황후를 극도로 증오하는 캐딜럿의 평소 성격으로는 믿을 수 없었지만 분명히 상황상 황후 라일리아와 손을 잡았을 것이다. 상단 게오르그의 은행 계좌와 비밀리에 운용되던 상점들도 갑작스럽게 차압이 들어왔다. 명목상은 감찰단의 조사를 위한 것이었는데, 특별한 물적 증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명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신속하게 치고 들어오는 공격이 오랜만이라 에스트레드는 불쾌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황제는 황후와 한통속이야.”

그동안 아끼던 말을 그가 꺼내놓았다. 최근 황제 발렌2세가 워낙 조용했던 터라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그 침묵 끝에 내놓은 것이 이것이었다. 황제가 이미 황후에게 넘어갔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할 줄은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벡스 레넌이 방문했습니다.”

“벡스가? 왜? 또 뭔가 길드 지원금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던가?”

에스트레드는 불쾌한 얼굴로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말로 쥐새끼 같은 짓을 하는 자가 있긴 하더군요.”

“무슨 뜻이지?”

황자비는 용병대장과 나누었던 말을 전달했다. 위조된 편지와 용병대장의 방문. 에스트레드는 눈썹을 올렸다. 그에게도 용의자는 명확하게 보였다.

“줄리엣 와부이로군.”

“네.”

“어머니도 한패겠어.”

에스트레드는 히죽 웃었다. 과연 그의 모친 다웠다. 갑자기 결혼식의 주관자로 임명받았다며 그에게 친밀한 척 하며 다가오기에 의아했지만 그런가보다 했다. 과연 권력욕으로 가득 찬 여자였다. 친아들까지 팔아먹을 줄은 에스트레드로서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 여자가 뭔가 더 했던 것은 없어? 잘 생각해봐.”

세리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아까도 생각했던 부분이라 그녀는 무리없이 답을 내었다.

“차를 선물했습니다. 일전의 그 붉은 찻물을 내는, 동부의 귀한 찻잎이었습니다.”

“마셨어?”

“그 자리에서 레이디 휘에리와 나눠 마셨지요. 이후로도 몇차례 더 우려마셨지만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꼴이었다. 황제의 명령 하에 주관자가 된 메리타와 혼약 시녀가 된 줄리엣, 정치적 공세를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둔 황후와 모두를 대변해서 물 위로 나선 캐딜럿.

“편지를 가로채어 벡스 레넌을 엮어넣을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용병대장이 세간의 예의를 전혀 지키지 않는 인간이라는 걸, 그들이 몰랐던 게 천만 다행이지요.”

“그렇군.”

“황후 폐하도 함께라면 바다의 눈물을 알아본 것이 당연할 겁니다.”

에스트레드는 잠깐 세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벡스가 보석의 출처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동왕국의 마지막 잔당들에게서 가져오신 것이라고.”

“입이 싼 친구야.”

“모르는 것보다 낫죠.”

“어차피 그 보석은 네것이니까 출처야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전하...”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가끔 에스트레드는 아주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었다. 그는 당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제게 미리 주시지 않으셔도 되었습니다. 아니, 가장 귀한 전리품은 사실 황제 폐하께 바치는 것이 군법입니다.”

“무슨 상관이냐.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니 내 아내가 가져야지. 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보석이다.”

어린아이같은 치기 때문에 꼬투리가 잡혔는데도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눈치였다. 타박을 포기하고 세리나는 그냥 남편의 손을 잡았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우리 결혼은 할 수 있는 건가요? 결혼까지 가는 길이 너무 험하네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불과 몇달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몇년은 족히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부 내란에 보내졌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있었다.

복잡한 머리를 하고 에스트레드는 아내의 손을 끌어 품에 안았다. 늘씬한 키의 그녀는 역시 장신인 에스트레드의 품 안에 꼭 맞았다. 그녀를 안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다소 가라앉아 황자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처음과 꼭 같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뺨이었다. 세리나는 복잡한 그의 심경을 알고 상냥하게 황자의 머리를 끌어안아주었다.

“피곤하시겠습니다.”

“그래.”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숙여 세리나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달콤한 그녀의 체향이 콧속 깊숙히 후각을 자극했다. 몸속 혈액이 순식간에 덥혀지는 기분이었다. 로마나 황족들의 욕구와 능력을 폭주시키는 세리나 리엔의 체향.

하지만 비단 그녀의 특질이 아니었더라도 에스트레드는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황자는 확신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 눈길을 빼앗겼지만 세리나의 미모만이 그의 마음을 가져간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건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널 사랑한다.”

에스트레드는 불쑥 말했다. 아주 무드없고 갑작스러운 사랑고백에 세리나는 덤덤하게 답했다.

“저도 사랑합니다.”

“재미없군.”

황자는 투덜거렸고 세리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대답 밑으로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리는지를 안다면 에스트레드가 결코 재미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리나는 애써 뛰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붉게 뛰는 심장을 전부 보여준다면 에스트레드가 질려서 도망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을 뻗어 지친 남편을 끌어안고 도닥여주었다.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기울여 아내의 입술을 훔쳤다. 세리나는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는 에스트레드의 키스에 입술을 열어주었다. 입술을 빨고, 입천장을 훑으며 남편은 여자의 입안을 애무했다. 고른 치열과 젖은 점막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눈을 감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했다. 후각과 미각이 전부 상대에게로 좁혀져 세상이 온통 그와 그녀로만 가득찼다.

“...얼른, 우리도 움직여야하지 않을까요.”

입술이 떨어지고 세리나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그녀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하룻밤에 걸친 회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여서 따스하고 부드러운 아내의 몸에서 위안을 받고 싶었다. 황자는 아내를 끌어안고 침대로 누웠다.

적당히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방 안에서 피부는 기분 좋게 달아올랐다. 세리나는 남편의 미간에 입을 맞췄다. 다소 굳어져있던 그의 눈썹 사이가 아내의 위로에 부드럽게 풀렸다.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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