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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78화 (78/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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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을 때였지만 에스트레드는 당연하게 세리나가 자신의 것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그 꼴을 보고도 둘이 사랑에 빠지지 않은 척 하는 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그 황자님은.’

아니, 어쩌면 알았어도 신경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에스트레드의 세상은 심플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가 신경쓰는 존재 극소수와 그렇지 않은 자들. 벡스 레넌은 자신이 극소수에 들어갈거라고 생각할만큼 오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냐고 했던 벡스 레넌에게 에스트레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죽이지 않아야할 것은 또 무슨 이유냐고. 자고로 마법사란, 그리고 동왕국 왕실의 핏줄이란 마지막 한명까지 전부 없애는 것이 조부 발렌1세의 유지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할말이 없어 용병대장은 쓰러져 죽은 어린 소녀의 시체를 내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쟁이었고, 벡스 레넌 역시 마지막 본거지까지 점령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부관이자 수호기사인 세리나 리엔을 굳이 다른 점령지로 보낸 것도 에스트레드였다. 동왕국 잔당의 마지막 본거지에는 그만큼 어린애와 여자, 노인들이 모여 숨어있었다. 에스트레드는 적어도 레너드 볼프의 핏줄들을 하나라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세리나는 반대했을 것이고, 그는 당연히 그녀를 다른 점령지로 보내버렸다. 대규모 군의 접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이었지만 사령관 대행자격의 세리나 리엔은 뒤에 머물러 안전하게 지휘할 수 있는 전선이었다.

동부내란 진압기에 에스트레드는 스물한살의, 갓 청년기에 들어선 사내였다. 전쟁이 끝나갈 때쯤 그는 스물 네살이 되었다. 애초에 동부로 보내질 때 막내 황자 레드포 로마나의 제위 경쟁자를 없애기 위한 황후의 계략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터무니 없는 병력으로 죽음의 땅에 보내졌던 남자는 태연하게 살아돌아왔다.

“아무튼…’바다의 눈물’은 황자비 전하께 드릴 작정이셨습니다. 처음 그 보석을 취할 때부터 그렇게 결정하고 계셨죠. 그래서 극비리에 보관을 하고 계셨던 것이고.”

“그렇군. 그런데 받은 편지에 유통자를 찾아오라고 했다는데, 왜 자네는 혼자 온 거지?”

“제가 유통...아니, 보관을 맡고 있었으니까요.”

벡스 레넌은 에스트레드의 가장 큰 우군 중 한명이었다. 전쟁 지원군으로 합류 이후 나름대로 에스트레드를 마음에 들어 한 용병대장은 향후 황자의 제위 경쟁에 힘을 빌려줄 것을 약속했다. 동왕국 마지막 핏줄을 끊어내는 그 순간에도 같은 자리를 지켰던 그에게 에스트레드는 보석의 보관을 명했다.

“게오르그의 오베이가 아니라 자네가 온 이유가 있었군.”

세리나는 팔짱을 끼었다. 벡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목걸이와 귀걸이의 존재가 벌써 알려지게 된 거죠? 황자 전하께선 보석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고 저 역시 비밀로 유지했는데요.”

“글쎄...좀 희한해. 여러가지로.”

당시 황자궁의 홀에는 오래된 시종들과 수행원들 외에 줄리엣만이 있었다. 하지만 먼 발치에서 본 목걸이의 모습을 보고 줄리엣 와부이가 바다의 눈물을 알아챘을 리는 없다. 그랬다 하더라도 그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뒤에 캐딜럿이 있었을 것은 확실했다.

‘캐딜럿이 아닐지도 모르지.’

세리나는 턱을 괴었다. 마법사의 돌이라고 불리는 바다의 눈물. 그것만 본다면 줄리엣의, 혹은 메리타 궁부인의 뒤에 있는 것이 캐딜럿일 수 있다. 하지만 에스트레드가 그것을 가져온 것이 동부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황후 라일리아가 관련성이 높아진다. 환영이 나타났던 반지, 동부의 붉은 차, 캐딜럿의 지하연구실에 있던 마법사의 시체들. 모든 길이 라일리아가 동부와 매우 높은 연관이 있다고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줄리엣 와부이는 후궁 안에 있는 메리타 궁부인의 거처로 찾아갔다. 아직 벡스 레넌의 방문을 알리는 편지는 오지 않았고, 줄리엣은 황자궁 안에 있기가 불안했다. 그녀가 이 드넓은 황궁 안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어쨌든 후원자인 메리타 뿐이었다. 후궁 안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조심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면서 줄리엣은 얌전한 걸음걸이로 메리타 궁부인의 거처로 향했다. 누구의 눈에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아무도 초라한 옷차림을 한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궁부인의 거실 문 앞에서 줄리엣은 양손을 꼭 마주잡았다. 이대로 그녀에게 아무 성과 없이 들어간다면 또 싫은 소리를 들을 것이 자명했다. 갈 곳도 없지만 들어가기도 싫었다. 이제 더운 여름이라서 문을 전부 치우고 창살로 된 덧문만이 남은 입구 쪽에서 줄리엣은 한동안 서성였다. 에스트레드의 궁은 차가운 냉기가 감돌고 있어 전혀 몰랐지만 밖의 날씨는 이마에 땀이 찰 만큼 더웠다.

입구에 몸을 숨기다시피 하고 망설이던 줄리엣의 귀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궁부인의 거실에는 이미 손님이 와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선 그녀는 혹여라도 지나가는 시녀의 눈에 띄어 모양새가 더 이상해질까 싶어서 아예 입구에 있는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기다리다가 손님이 돌아가면 들어갈 작정이었다.

“...공적으로...폐하께서, 좋아하시고 계십니다…”

목소리는 남자였다. 줄리엣은 그 목소리를 기억했다. 모나칸 후작. 멋쟁이 수염을 기르고 있는 귀족 남자. 지난번 메리타 궁부인을 방문해서 그녀에게 보석의 정체를 알려주었던 남자였다.

“어머, 그거 다행이네요…”

궁부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벽 너머의 소리라 원래는 들리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더운 날씨 때문에 곳곳을 창살로 바꾸어놓은 덕에 띄엄띄엄 소리가 들렸다. 줄리엣은 자신도 모르게 벽에 딱 달라붙어서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좀 더 확실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그 용병대장이 방문한다는 편지를 증거로 잡으면...황자와 용병길드를 동시에 수색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차피 수도 내의 아지트를 공유할 테니 상단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도 시간 문제겠죠. 황제 폐하께서 반란죄의 죄목을 들고 나오신다면 아무리 황자 전하라 해도 제위 계승자격 박탈은 시간 문제일 터.”

모나칸 후작이 말했다. 메리타 궁부인은 깔깔 웃었다.

“어머, 후작님, 에스트레드는 그래도 내 아들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시군요.”

“이런 이런, 죄송합니다. 귀부인께 제가 이게 무슨 소리인지.”

후작과 부인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황자 전하가 잘못된다는 말인데, 메리타 궁부인께선 왜 저렇게 웃으시는 거지…?’

의아함이 치솟았고 줄리엣은 좀 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로선 알 수 없는 앞뒤 정황을 알게될지도 몰랐다.

“제 위치는 후작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것만 믿고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거에요. 제 아들이 황위에 오르는 그 영광마저 저버리면서 말이에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부인의 그 귀한 충심을 제가 어찌 저버리겠습니까. 황후 폐하께서도 기뻐하고 계십니다. 황제 폐하도 마찬가지시구요.”

“에스트레드는 안쓰럽지만 어쩌겠어요, 선대 황제이신 발렌1세와 지나치게 닮은 아들을 낳은 제 탓이지요.”

메리타 궁부인은 몹시 다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아들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몇마디 안되는 대화 속에서도 줄리엣은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반대하는 편에 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친어머니면서 아들의 제위 계승을 방해한다니? 게다가 내게 분명히 황자를 꼬여내라 하지 않았던가...황제가 되면 그 후궁으로 들어서 총애를 차지하면 된다면서. 대체 무슨 일이지.’

줄리엣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들킬까봐 더 몸을 오그려 구석에 숨으면서 벽에 바싹 붙었다. 이 대화를 더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그 시녀 아가씨는 뭔가 소득이 있다고 합니까?”

“아뇨 아직...청첩장과 찻잎 선물까지는 했는데, 그 다음 편지를 아직 가로채지 못하고 있네요. 용병대장은 생각보다 행동이 느려요.”

“그 아가씨도 쓸만하군요. 나름대로 시키는 건 다 하네요. 그 천한 와부이 백작가 출신인데 나름 황실의 혈통도 좀 섞인 듯 하고.”

모나칸 후작이 웃었다. 줄리엣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그대로 있었다면 뭐 이웃 늙은이한테라도 후처 자리로 들어가서 몸은 편했을 텐데...그 비천한, 귀족가문이라 이름 붙이기도 힘든 집안 출신이면서 그건 또 싫은 모양이더라구요.”

메리타 궁부인의 말에는 멸시가 진하게 섞여 있었다. 궁부인이 또각거리며 실내를 걸어다니는 소리가 났다.

“이제 여기까지 온 이상 그대로 두긴 어렵잖아요? 줄리엣 와부이의 처분은 어쩌실 건가요?”

“글쎄요, 꽤 미인이던데 제 집안에 들어앉혀서 침실 봉사나 하게 할까요?”

“어머, 후작님, 그런 농담을.”

궁부인이 까르르 웃었다. 후작 역시 웃어댔다. 두 사람의 경박한 웃음이 거실을 울리고 벽을 지나 줄리엣의 고막을 찢었다.

“중간에 증인으로 쓸 일이 있을 겁니다. 일단 혼약 시녀로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쓸모야 많죠. 와부이 백작가의 재정상태로 봐서는 우리 말을 거절하기는 힘들거고요. 일단 줄리엣 양 본인 역시 욕심이 꽤 있는 사람으로 보이니까.”

모나칸 후작이 다시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그 말 끝은 이랬다.

“쓸모가 없어진 후엔 처분해야죠. 그래야 뒤끝이 없을 겁니다. 먹이로 주든지, 땅에 묻든지, 뭐 그거야 그때 봐서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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