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약 --> 줄리엣 와부이는 긴장한 얼굴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하라는대로 했을 뿐이었다. 청첩장에 몇 줄 글을 썼고, 황자비에게 차를 선물했다. 어떤 것도 그리 나쁜 짓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양심에 거리낄만한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혼약 시녀로 들어올 때부터 양심은 버리기로 했다. 그녀는 설사 에스트레드와 세리나가 결약을 맺은 반려라고 해도 그 틈을 파고들기로 작정했다. 메리타 궁부인의 부추김이 있기는 했지만 줄리엣 자신 역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와부이 백작가의 흥망이 그녀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더이상 빚을 지거나 하면 와부이 백작가는 작위와 영지마저 박탈당할 지경이었다. 줄리엣은 스스로의 미모와 매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세리나 리엔은 황자의 곁에 오랜 기간 수호기사로 지내다가 극적으로 황자비에 간택된 여자였다. 그녀가 모르는 에스트레드의 많은 것을, 세리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희박한 가능성을 알면서도 줄리엣은 어쨌든 결심했다. 온 기회는 잡아야 한다고. 이웃 영지의 육십세가 넘은 영주가 제안한 후처의 자리에 자신을 맡기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메리타 궁부인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곧 네 증언이 필요한 자리가 있을 게다. 별 건 아니니 본 대로만 말하면 된단다. 대체 뭘 증언하라는 것인가. 황자궁 안에서 줄리엣이 목격한 것 중 어떤 것도 부정적인 면은 없었다.
그리고 메리타 궁부인은 또 하나의 지시를 내렸다.
“편지 하나를 빼돌리면 된단다.”
잘 지켜보아야 한다. 메리타가 당부했다. 청첩장이 도착했을 날로부터 이삼일 내에 도착할 방문을 알리는 편지를 빼돌려야 한다고 했다. 황궁 밖에 사는 자, 상단에 관계된 자, 높은 귀족이 아닌 자. 결혼 직전이라는 핑계로 상인들이 드나들 것이나 분명히 그 외의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수도의 용병대장이라든지.
방문 전에는 언제나 방문의 일시와 목적을 적은 편지를 보내는 것이 통상적인 예의였으니 제대로 촉각만 곤두세우면 빼돌리는 것은 일도 아닐게다. 황자비와 그가 말을 나누기 전에 벡스 레넌의 방문 날짜를 알아내야 했다. 내용에 따라 증거로 삼을 수도 있었다. 줄리엣은 앞뒤 정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편지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손이 떨렸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결혼 때문에 시종장 호보프는 바빠서 체통을 버리고 반쯤 뛰어다녔고 황자궁 안 누구나가 바빴다. 줄리엣은 결혼식장에 쓰일 도자기 꽃병을 들고 복도 안을 걸어갔다. 정문 쪽으로 나있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그녀는 저 멀리서 키가 큰 검은 머리의 남자가 긴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누구지?’
잘생긴 얼굴이었다. 미남이었는데 기묘하게 평범한 인상. 가벼운 가죽 갑주를 입은 남자가 지나가면서 줄리엣에게 윙크를 하고 미소를 지었다. 다분히 희롱조인 그의 태도에 그녀는 약간 불쾌한 기분으로 멈춰서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남자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줄리엣은 수도의 유명한 용병대장 벡스 레넌을 직접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곁을 스쳐간 방문객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
세리나는 거실 밖에서 방문객을 알리는 시종장 호보프의 목소리를 들었다.
“황자비 전하, 수도의 용병대장 벡스 레넌이 도착했습니다.”
“벡스가…?”
느닷없는 방문이었다. 하기사 용병대장은 그리 예의를 차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다시 말하면 통상적인 예의 같은 건 아예 말아먹은 사람이라 방문을 미리 알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세리나는 들어서는 용병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씩 웃으면서 성큼성큼 걸어와 세리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이코, 오랜만입니다 황자비 전하.”
“벡스.”
황자비는 고개를 끄덕여 목례했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자 전하는 어디 계시죠?”
“일이 복잡하게 되어서...지금 대책회의 중이시네.”
“...그래요?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라,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그보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시다니 많이 게을러지셨네요. 새벽 네시라도 회의라면 장군들의 귀를 잘라서라도 깨우던 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벡스는 턱을 쓰다듬었다. 세리나는 눈썹을 모았다. 그녀는 잠자코 용병대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 전하께서 부르셨나?”
“아닙니다.”
“의외군. 여기는 디저트 외에는 볼 게 없다고, 답답하다며 뛰쳐나간 사람이 볼일도 없이 여기 또 오지는 않았을 테고.”
벡스 레넌은 조금 이상한 얼굴이 되어서 세리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제게 용건이 있는 것은 황자비 전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내가?”
세리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용병대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용건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용건 말인가. 금시초문이군.”
“이상한 일이군요.”
그는 호보프가 가져다 놓은 주스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청첩장을 태워버리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세리나의 글씨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는 황자비 전하의 편지를 받고 들어왔습니다. 전하의 친필이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만…”
“편지라니, 무슨 말이지?”
“얼마 전 청첩장 보내셨지요? 거기에 군용 기밀 잉크로 용건 하나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황자비 전하의 서명과 함께.”
“내 글씨로?”
“전장에서 전하의 보고서를 상당히 많이 봤죠. 잘 알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어떤 느낌인지 알긴 합니다. 얼추 비슷했습니다.”
세리나는 가만히 자신의 찻잔을 들여다 보았다.
“용건이라고 했지. 뭐였나?”
“‘바다의 눈물’의 유통자를 데리고 들어올 것.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써있었지요. 올때는 황자 전하가 모르도록 꼭 방문 약속을 잡아서 오라고도 했고.”
“재미있군.”
황자비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일이 진행되는 방향은 상당히 뻔했지만 교활했고, 한편으로 흥미로웠다. 캐딜럿과 메리타 궁부인은 분명히 함정을 파두고 있었다. 일은 상당히 속도를 내서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황제와 황후를 알현한 지 불과 이틀만에 벡스 레넌이 당도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황자 전하도 회의에 들어갔다 하시고, 편지를 보낸 것은 황자비 전하가 아니셨던 듯 싶고? 뭐 저를 가운데 둔 음모라도 진행되는 중인가요?”
“황궁 안에서야 언제나 음모가 진행되고 있지.”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태까지 십여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물 밑으로 이렇게나 날을 세운 공방이 오가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삼 에스트레드의 수호기사라는 자리가 꽤나 평화로웠구나 싶었다. 황자의 반려 자리를 잡은 이상 더는 물러설 수도 없었지만.
농담 같은 말투에 비해 신중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벡스 레넌에게 황자비는 간략한 그간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지금 보니 용병대장은 방문 약속을 잡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게군.”
“예약 따위는 열살 이후로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용병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귀족가에서 본다면 무례에 기절할 일이었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 ‘바다의 눈물’ 이라는 것. 고위의 마법사만이 채취하여 가공할 수 있는 보석이라던데, 에스트레드 전하는 언제 그걸 얻으신 거지?”
“말씀 안해주셨습니까?”
“곧바로 회의에 들어가서 여태까지 철야 중이시다.”
이것을 정치적인 공세의 일환으로 여긴 에스트레드는 귀족 회의를 열었다. 황자 측의 최측근 귀족들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는 회의였다. 빈한한 리엔 후작가 출신의, 황실의 혈통도 전혀 섞이지 않은 세리나 리엔을 반려로 택한 것에 에스트레드의 지지 가문들은 불만을 표출했었다. 그녀가 앉아있기 쉬운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황자는 아내를 방에 두었다.
벡스 레넌은 한숨을 쉬었다.
“황자 전하께서 또 솔직하지 못하실까 걱정이 되니까 제가 다 말씀드리죠.”
용병대장은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바다의 눈물’은 흔한 게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국의 가장 높은 귀족이나 황족들 몇몇만이 실물을 간신히 본 적이 있을 정도죠. 제국 내에는 극히 드문 마법사들만이 채취하고 가공이 가능한 보석이니까.”
“난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도 이틀 전 알현때 처음 알았다.”
“당연한 일이죠. 아무튼, 보통의 방법으로는 구하는 게 불가능한 보석이라는 겁니다. 상단의 유통 어쩌고 한 건 아무래도 게오르그와의 관계를 잡아내려고 한 소리일 테고요. 귀빈에게는 왕의 머리라도 잘라 팔아버릴 상단이라고 소문난 곳이니까.”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동안 머리속에서 서서히 일의 윤곽을 잡아왔고 벡스 레넌의 난데없는 방문으로 요행히도 함정을 피했다. 이제 그 출처를 알 차례였다.
“에스트레드 전하는 동부 내란 진압 시기에 그 물건을 손에 넣으셨습니다.”
“내란기라...그렇군. 동왕국은 마법사가 많은 땅.”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돈으로 구할 수 없는 가장 귀한 물건을 전리품으로 가지고도 에스트레드는 그것을 황제에게 바치지 않았다. 군법 위반과 반란 명목으로도 엮어넣을 수 있는 죄였다.
벡스 레넌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황자가 세리나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다의 눈물’을 지키고 있던 것은 동왕국 최후의 왕 레너드 볼프의 마지막 혈육, 그의 손녀인 어린 소녀였다. 갓 열 서너살 남짓한 어린아이였다. 에스트레드는 마법을 발동시켜 동귀어진하려는 볼프가의 마지막 핏줄을 가차없이 베었다.
벡스 레넌은 아직도 허공에 튀던 소녀의 붉은 피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에스트레드 로마나는 소녀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 보석을 손에 넣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은 반드시 그의 아내가 가져야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