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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76화 (76/142)

<-- 혼약 -->                “폐하의 명대로. 하오나…”

세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황궁 마법사 쪽을 바라보았다.

“잘못된 정보로 인한 조사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캐딜럿.”

어쩔 수 없이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면 싸움에 능하지 않은 자 쪽으로 세우는 것이 기본이다. 그녀는 심리전이나 정치전에 능하지 못했지만 그쯤은 알고 있었다. 캐딜럿은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황궁 마법사가 코웃음을 쳤다.

“잘못된 정보라 하셨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는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황자비 전하.”

그는 황자비라는 단어에 강조를 하며 또박또박 발음했다. 도발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백발의 마법사를 보면서 세리나는 잠깐 가늠을 했다. 황후 라일리아와 황제는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말입니다. 만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금발의 전직 여기사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저는 항상 마법과 마법사에 신뢰가 없어서 말입니다.”

마법사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표정이었지만 큰 소리로 외쳤다.

“잘못된 정보라면? 그럴리도 없거니와 만약 그렇다면 내가 목을 내놓을 일이지. 어찌 황자 전하께 내 섣부른 판단으로 누를 끼치겠습니까?”

“그거 재미있군요.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이번 일이 황자 전하께 누를 끼치는 일인 것만은 확실하지요.”

황자비는 어깨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캐딜럿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뒤편에 서있는 황궁 마법사가 위치상으로는 더 높았으나 마치 세리나가 내려다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목을 내놓겠다고 하셨습니까.”

황자비가 낮게 되물었다. 캐딜럿은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지만 순간 즉각적으로 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투와 눈빛에서 수틀리면 정말 목을 거둬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기껏해야 내 키메라에 잡혀서 수치를 당하던 계집 주제에.’

마법사는 기싸움에 밀리지 않으려 어금니를 물었다. 젊은 계집 주제에 황자의 위세를 등에 업고 노마법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키메라에 잡혀서 다리를 벌리고 능욕당하던 황자비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마법사도 사내라 아랫도리가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세리나의 흰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황자 전하께 거짓된 정보로 누를 끼친 게 맞다면 기꺼이 내 목을 내드리지.”

캐딜럿은 도전적으로 말했다. 황자비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황제와 황후에게 말했다.

“마법사의 목까지 바라지는 않습니다. 두분 폐하께서 친히 캐딜럿의 손목을 걸어주시겠습니까?”

다분히 황궁 마법사를 희롱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황제의 눈썹이 재미있다는 듯 올라갔고, 캐딜럿의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해졌다. 그는 뭔가 소리를 치려다 황제의 한쪽 손이 올라간 것을 보고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좋다. 이 조사건을 주장한 이가 캐딜럿이었으니, 그가 공과를 모두 갖는 것이 바람직 하겠지. 만약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의 손목을 가져가라.”

“폐하!”

황제의 말은 진심이었다. 캐딜럿은 낮은 소리로 황제를 불렀지만 그는 마법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법사에게 손이란 목숨과도 같다. 수인을 맺고 마법진을 그리고 마나를 다루는 모든 행위가 손에서부터 이루어진다. 그런 손목을 내주겠다는 것은 차라리 죽이겠다는 게 나은 형벌일 정도였다.

“그러나 염두에 둬라. 이번 일이 사실일 경우, 에스트레드의 입지는 다각도로 좁아질 수 있다. 네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면의 공세도 있을 것이다.”

황제가 경고했다. 세리나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에스트레드 전하와 함께 성실히 조사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세리나는 동요 없이 치마를 펼쳐들고 인사했다. 그녀가 흘긋 황후 라일리아 쪽을 바라보았을 때, 라일리아 역시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세리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에스트레드가 황자궁의 안 거실에서 시위하듯 앉아있었다. 그는 예민한 기분으로 손 안에서 얼음 폭풍을 만들어서 돌리고 있었다. 그나마 에스트레드는 상당히 침착하고 컨트롤이 잘 되는 편이었지만 본래 로마니엔의 황족들이란 지극히 기분에 좌우되는 자들이다. 그 역시 거기서 자유롭지는 않아서, 황자는 몹시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전부 얼려버리고 붉은 피를 보고 싶은 기분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신경이 죄다 곤두서서 날카로웠다. 그는 사냥도 나갈 수 없었고, 상단의 회계 상태를 둘러볼 수도 없었고, 벡스 레넌과 만나 용병조직에 관한 일을 이야기나눌 수도 없었다.

불쾌함이 치솟았다. 발빠른 시종이 물어온 소식에 의하면 세리나만을 불러들인 것은 에스트레드 자신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의 한 가지인 듯 했다. 초조하게 아내를 기다리던 그는 세리나가 들어서서야 간신히 손 안의 얼음 폭풍을 잠재웠다. 에스트레드는 재빨리 다가가 창백한 안색의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황자비는 풍성한 금발머리를 남편의 가슴에 기댔다.

“별일 없었느냐.”

에스트레드가 조심히 그녀의 작은 얼굴을 양손에 담았다. 그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서 세리나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에스트레드의 체온을 가까이에서 느끼자 그제서야 좀 살 것 같았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세리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관계만 담백하게 나열한 그녀의 말 속에서 에스트레드는 기묘한 점을 발견했다.

“캐딜럿이 황후와 뜻을 같이 한 건가? 그는 라일리아와는 같은 방에조차 있지 않겠다며 격렬하게 싫어했던 자인데.”

“같은 방에서 매우 가까이 잘 견디더군요.”

세리나는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내적으로 캐딜럿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의 키메라인지 뭔지에 잡혀 험한 꼴을 당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전장이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렸을 것이다. 애초에 마법사 역시 전시에는 군의 소속이니까 그 쯤 목을 따버리는 것을 일도 아니었을 텐데. 세리나는 아쉽게 생각했다.

에스트레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 목걸이와 귀걸이가 바다의 눈물인 것을 누군가 벌써 알 리야 없었을 텐데.”

홀에서 세리나에게 목걸이를 선사한 이후 그녀는 침실에서만 그것을 해본 이후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었다. 보석은 사파이어와 몹시 닮아있다. 바다의 눈물은 아는 사람이 극소수인 보석이었다. 일반 호위병이나 시녀들로서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자는 팔짱을 끼었다. 그의 얼굴은 싸늘한 무표정으로 덮여 있었다.

“정말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보석이었습니까?”

“맞아. 아주 귀한 물건이고,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보석일 것이다. 당연히 내 여자가 그 보석을 가져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에스트레드는 잘라 말했다. 어쩌면 어린애 같기도 하고 폭군 같기도 한 그의 말에 세리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막혔던 그녀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 유통과정과 출처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다각도로 접근하는 듯 싶었습니다.”

“왜 그 보석의 정체가 벌써 흘러나간 거지.”

"정치 공세의 꼬투리가 될 만한 것이라 일부러 잡아낸 것 같던데요."

황자비는 고개를 저었다. 캐딜럿과 황후는 아예 작정하고 자리를 만든 것 같았다. 황자는 세리나의 주변 사람들을 주의깊게 검토해 보았다. 드레스를 고를 때 주변에 있던 것은 신뢰할만한 자들 뿐이었다. 모두 황자궁에서 오래 일하고 에스트레드 자신의 가신과 같은 자들이었다. 주인이 위세를 잃으면 어찌될지 정확히 아는 시종들과 수행원들이 치명적인 정보를 함부로 발설할 리야 없었다. 단 한명만 빼고.

“줄리엣 와부이, 그 여자인가.”

애초에 첩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메리타 궁부인 자체가 첩자로서의 자질은 제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골라온 줄리엣 와부이는 그저 에스트레드의 옆자리를 노리는 흔한 귀족 여자 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닐지도 모른다. 황자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다의 눈물을 그 가난한 와부이 백작가 출신의 여자가 알아봤을 리는 없을 텐데.”

바다의 눈물은 귀한 보석이다. 황실의 몇몇과 대귀족들 정도만 간신히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사파이어라고만 하고 선물한 목걸이를 먼 발치에서 보고 바다의 눈물이라고 정확히 알아채는 건 불가능하다.

“저는 메리타 궁부인이 걸립니다...아, 물론 전하의 모친이십니다만, 최근 생소한 인물이 측근으로 들어온 것은 단 둘 뿐이죠. 궁부인과 줄리엣.”

세리나 역시 그 점을 지적했다. 메리타 궁부인의 권력욕은 온 세상이 다 알 정도였다. 그녀는 그악스럽게 세상을 살았고 그래서 여태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앞으로 오랜 기간 버텨낼 수 있다면, 혹은 권력의 한 조각이라도 잡을 가능성이 있다면 얼마든지 아들을 팔아넘길 수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쪽에서 조사를 한들 유통과정을 알아낼 수는 없다. 아마도 게오르그와 내 관계를 밝혀내려고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애초에 상단 따위를 거치지는 않았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구했고, 믿을 만한 자에게 보관을 맡겼었다. 아무리 상단을 뒤져도 경로는 찾지 못할 게다.”

에스트레드는 아내를 끌어안고 침실로 이끌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조사 과정 전반은 에스트레드가 알아서 총괄할 것이다. 세리나 자신이 해야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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