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약 --> 벡스 레넌은 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의 나이를 알 수 없는 남자는 용병길드 삼층에 마련된 자신의 방에 앉아있었다. 수도의 용병길드란 제국 내의 용병들을 전체적으로 관할하는 본부와 같았다. 두명 뿐인 용병대장 중 한명은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고 수도에 남은 건 벡스 레넌 뿐이었다. 대낮인데도 방은 어둑했고 그는 과거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자궁에서 나온 지도 벌써 한달째였다. 우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비가 쏟아져 내렸다. 방 안 공기중으로 차갑고 습한 기운이 떠돌았다. 그는 손가락에 끼운 청첩장을 빙글 돌렸다.
“살다보니 용병 주제에 황자 전하의 청첩장도 받는군.”
질 좋은 크림색 종이 위에 얇은 실크를 덧입히고 금이 섞인 잉크로 멋드러진 글씨가 써있었다. 결혼식의 일시와 참석할 수 있는 장소. 벡스 레넌은 상당히 측근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식의 진행이 되는 황궁 중앙홀로 좌석을 배치받았지만, 아마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도 거의 대부분 홀 밖이나 길거리에서 황자 부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건 귀족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용병대장은 점잖은 얼굴의 시종이 가져온 청첩장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그가 흥미있는 것은 청첩장이 아니다. 아니 물론 결혼식에는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벡스 레넌은 거친 손가락으로 청첩장의 실크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는 그곳에 마시던 오렌지 주스의 방울을 조금 묻혔다. 곧 숨겨진 글씨들이 나타났다.
“그 황자님 젊어가지고 은근히 구닥다리란 말이야.”
전쟁 시에 주로 쓰는 비밀 서찰의 방식이다. 산도가 높은 액체에 반응하여 색을 드러내는 잉크를 사용하는 것으로 꽤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글을 쓴 것이 의외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눈썹을 올렸다. 갈색의 잉크로 드러난 서명은 딱딱한 글씨체의 세리나 리엔의 것이었다. 연애편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전쟁 보고서에나 어울릴 법한 멋 없는 글씨. 벡스 레넌은 전쟁터에서 몇번 봤던 세리나의 글씨를 알아보았다.
대충 읽어본 그는 청첩장을 대충 접어서 벽난로 안에 넣었다. 종이가 화르르하며 타들어갔다. 재만 남았다가 그나마 흩어져버린 잔재를 보면서 벡스 레넌은 피식 웃었다.
“황자 전하는 진짜로 수호기사한테 푹 빠지셨구만.”
에스트레드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세리나는 이런 식으로 벡스 레넌에게 연락하는 방법을 절대 알지 못햇을 것이다. 수도의 용병길드를 손에 쥐고 있는 용병대장이 에스트레드의 아군이다. 정치적 세력이 약해 재력을 쌓는데 치중하던 에스트레드가 용병대장을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키면서 수도의 용병길드는 황자의 사병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에스트레드를 처음 만났던 십대 후반부터 이미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했던 은발의 황자를 떠올리며 벡스 레넌은 혀를 찼다.
“어지간히 간도 크고 건방진 애였는데.”
그의 편에 서게된 것도 황자의 거래를 받아들여서라기 보다는 순전히 흥미 때문이었다. 이 특이하고 뛰어난 인간이 대체 어디까지 가는지. 그리고 전쟁터에서 만난 그의 수호기사 세리나 리엔과 황자의 앞날도 궁금했다.
아니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은 하지 말자. 용병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서 허공에 말했다.
“아-아, 마리아가 보고싶네.”
황자가 중심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이, 세리나 리엔이 중심이었다. 벡스 레넌은 세리나가 커가는 모습을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성인이 된 후 단단한 수호기사가 된 모습을 꽤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전쟁터에서는 세리나가 모르도록 그녀의 뒤를 지켜주었고, 그래서 그녀가 등 한가운데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세리나가 에스트레드와 결국 한길을 걷게 되어서. 둘 다 어지간히 고집불통이라 곁에서 지켜보기도 답답하고 조마조마했다. 카스가드 백작과 레이디 휘에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황자 부부 역시 일상에서 소박한 행복을 찾으며 평생토록 함께 하기를 바랐다.
“아, 거기 디저트류가 진짜 맛있었는데.”
황자궁에서 먹었던 케이크와 쿠키들을 기억하면서 벡스 레넌은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황자와 그의 디저트 취향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면에서 다행이냐하면, 앞으로 상당히 오랜 시간 함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여차하면 용병대장은 여생을 황자의 궁에 의탁해버릴 것이다. 결혼식과 제위 승계를 무사히 치르고 나면 에스트레드는 그를 그저 내치지는 않으리라.
세리나 리엔은 황자가 선물한 ‘바다의 눈물’을 전해준 사람에게 자신 역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보석의 유통자를 찾아달라는 뜻이었다. 사실 바다의 눈물이란 귀하다기보다는 터부시되는 보석에 가깝다. 어떻게 구했는지 대놓고 말하기 꺼려지는 종류의 물건이라는 뜻이다. 심해의 중심까지 다가갈 수 있는 자들이란 극소수의 뛰어난 마법사들 뿐이었고, 그중 바다의 눈물을 획득한 운좋은 자들은 몇손가락 안에 꼽았다. 그 중 하나가 동왕국의 마지막 왕 레너드 볼프였을 것이다.
“좋아. 그럼 세리나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볼까.”
용병대장은 오렌지 주스를 마저 쭉 마시고 망토를 둘렀다. 비가 오니까 꽤 질척거리고 불유쾌한 길이 될 것이다.
*****
메리타 궁부인은 곁눈질로 세리나 리엔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세리나는 곁에 선 메리타와 줄리엣이 몹시 신경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을 내칠 수도 없었다. 결혼식이 며칠 남지 않았고, 두 사람은 아무튼 결혼식의 주관자와 혼약 시녀였으니까. 세리나는 줄리엣의 피로를 염려해서, 메리타 궁부인의 경우는 꺼려지는 마음에서 결혼 절차에 가능한 둘을 배제하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알현은 정말 오랜만이죠?”
몸단장을 도와주며 안나가 물었다. 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대한 결혼식을 위해 일부러 우기가 끝난 직후로 날짜를 잡았기 때문에, 비는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밖에서 밝은 햇빛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요즘 폐하께선 누구도 잘 안만나시고 방에 계시니까…”
“전에도 간혹 그러시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기간이 길었어요.”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나를 아예 보지 않을 작정이셨나.”
세리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머나, 호호, 세리나님. 누구나 안만나셨던 건 아니고, 저는 지난번에도 한번 뵈었어요. 뭐 저는 폐하의 아내니까 당연하긴 하지만.”
메리타 궁부인이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까지나 황제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황실 안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는데도 그랬다. 안나는 한심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세리나는...세리나도 별로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둘은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 옷은 좀 추운데…”
어깨가 넓게 파진 드레스를 입고 세리나는 중얼거렸다. 흰 피부에 약간 소름마저 돋아 있었다. 자꾸 한기를 느끼는 증상이 언젠가부터 심해지고 있었다. 뒷목덜미가 뻐근해서 손으로 주무르면서 그녀는 숄을 요청해서 어깨에 둘렀다. 양모로 도톰하게 짠 천을 둘렀는데도 별반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열은 없으시죠?”
안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열은 없는 것 같아...오히려 반대로 지나치게 없는 기분인데.”
농담처럼 가벼운 어조였지만 기운이 없었다. 줄리엣이 조심스럽게 데운 물통을 가져다가 세리나의 무릎위에 올려놓아 주었다.
“고마워. 손이 좀 녹네.”
황자비가 미소를 지었다. 줄리엣은 자신도 모르게 뺨을 붉히고 물러섰다. 언젠가부터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한 세리나는 줄리엣에게 친근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시녀 안나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초리로 줄리엣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조심히 뒤로 물러났다. 줄리엣은 그렇게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메리타 궁부인과 한배를 탔다는 것 때문에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아, 줄리엣. 줄 게 있어.”
세리나가 손짓하자 안나가 입을 삐죽이고 큰 상자 하나를 내어왔다.
“별 건 아니지만...청첩장의 처리도 그렇고, 호보프가 줄리엣의 칭찬을 많이 했어. 일도 야무지고 정말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백작영애가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라고 하면서.”
줄리엣은 자신의 앞에 놓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함께 상자를 들여다보던 메리타 궁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줄리엣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드레스를 꺼내 들어올렸다. 화사한 살구색에 풍성한 스커트 자락이 아름다운 옷이었다.
“황자비 전하...이건?”
“작지만 내 선물이야.”
세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함께 지낸 지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줄리엣은 상당히 귀여운 아가씨였다. 작고 풍만한 몸매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외형적으로도 매력적이었지만 위축되었음에도 간혹 드러나는 당돌함도 있었다. 안나도 그랬지만 세리나는 자신의 나이 또래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아가씨들이 여동생처럼 사랑스러웠다. 백작가의 귀한 아가씨가 황궁에 들어와서 자신의 시녀 노릇을 하느라 팔자에도 없는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안쓰러운 기분도 있었다.
그녀는 줄리엣이 언제나 두벌의 드레스를 번갈아 입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깨끗하게 빨아 곱게 입었기 때문에 눈치채기는 쉽지 않았지만 소맷자락은 상당히 낡아서 모슬린 앙가장트로도 잘 가려지지 않았다. 세리나는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줄리엣의 선물로 골랐다.
“아마도 가봉을 해야할거야. 내가 신체 사이즈를 정확히 알지는 못해서 레이디 휘에리가 대신 주문해준 것이긴 하지만…”
줄리엣은 드레스를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의 인사를 해야하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새 옷을 산 지가 몇 해는 지나 있었다. 그녀에게는 드레스가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었으니까. 황자비의 하사품이니 수치스러울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황자비 전하. 정말로요.”
드레스를 꼭 끌어안은 줄리엣을 보고 세리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라도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선물일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폐하의 알현을 마치고 나서 돌아오면 함께 또 차를 마시자. 날이 좋아지면 함께 할 시간이 모자랄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