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73화 (73/142)

<-- 혼약 -->                줄리엣은 호보프가 써낸 청첩장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이 수많은 종이들을 접어서 곱게 봉투에 넣어 인장을 찍어야했다. 원래 안나와 함께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주방에 일이 생겨 그쪽으로 뛰어내려간 후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황자의 결혼식이다. 이 넓은 제국 사교계의 어지간한 귀족가문에는 거의 다 청첩장이 들어간다. 시종장 호보프가 워낙 달필이고 부지런한 이라서 청첩장의 글씨를 전부 그가 썼다고 하는데, 접어서 봉투에 넣는 것 역시 아주 아래의 하녀들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황자의 결혼 청첩장이니 만큼 시종장과 황자궁 시녀들이 모든 일을 해내야 했다. 얼결에 혼약 시녀가 된 줄리엣 역시 거기에 동참했다.

다른 시녀들이 각자의 업무에 열중하고 있을 때도 줄리엣은 청첩장을 만지작거려야 했다. 혼약 시녀인 줄리엣의 업무가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들은 끝이 안보였다.

빈한했던 집안에서 온갖 일을 다 해봤던 그녀였다. 이정도 일로 그리 지치거나 눈물 날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대신 청첩장 하나를 들어올렸다. 수도의 용병대장 벡스 레넌에게 가는 초대였다. 지난 밤이 생각났다.

“청첩장을 접고 있다고 했죠?”

어젯밤 메리타 궁부인이 웃으며 그녀에게 지시했다. 궁부인의 웃음은 뱀과 같았다.

“거기에 이 내용을 적으세요...여기, 내가 준 잉크로. 이 필체를 따라서 적으면 돼요.”

줄리엣은 조금 겁이 나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감히 황자의 결혼식 청첩장에 손을 댄다. 심지어 용병대장에게 가는 청첩장이었다.

“어차피 벡스 레넌은 세리나의 필체는 정확히 모르니까. 들킬 염려는 없어요. 바다의 눈물을 보관하던 상자만 가져다 달라는 거니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하면서 메리타 궁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줄리엣이 지금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 궁부인은 한배를 탄 셈이었다. 그녀는 손에 든 청첩장을 내려다 보았다. 희디 흰 백색의 청첩장을 열고, 줄리엣은 결국 메리타 궁부인이 준 잉크병을 개봉했다. 펜을 잉크병에 찍어내는 그녀의 손이 조금 떨렸다.

내용은 정말 별 게 아니었다. 다르게 말하면 줄리엣이 전혀 알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바다의 눈물을 보관했던 상자를 가져다 달라니, 어째서 이런 것을 쓰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메리타 궁부인이 샘플로 준 세리나의 필체는 이미 어젯밤 한참을 연습해서 꽤 익숙했다. 과거 그녀가 써냈던 전쟁 보고서의 한페이지를 뜯어낸 듯한 샘플이었다. 신중하게 써내려가자 펜의 잉크는 아주 옅은 흔적만 남기고 써지다가 물기가 전부 마르자 아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괜히 안심이 되어 줄리엣은 한숨을 쉬었다.

메리타 궁부인이 지시한 것은 두 가지였다. 그 중 하나의 임무가 간신히 끝났다. 그녀는 얼른 빳빳한 종이를 접어서 봉투 안에 넣었다. 완성이 된 청첩장들은 곧바로 전달을 위해 시종들이 가지고 나갔다.

*****

세리나는 어쩐지 안절부절하는 줄리엣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오후의 자그마한 티파티, 너무 서먹한 그녀와 조금쯤 친해지고 싶어서 마련한 자리였다. 지금은 우기라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서 실외 대련이나 훈련은 전혀 할 수가 없었고, 한다고 해도 실내 연습장에서의 간단한 훈련이 전부였다. 황자비 생활을 한다고 해도 몸을 단련하는 것을 게을리 하는 건 세리나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당연하게 모래바닥의 대련장을 뛰었고, 지금 같은 날씨에는 실내 연습장에서 하드레드나 가끔 에스트레드와 검을 겨누었다.

그녀 뿐 아니라 레이디 휘에리와 안나도 조금 이상한 눈치로 줄리엣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가끔 티스푼을 떨어뜨렸다. 그것도 바닥에. 백작 영애는 뭔가 불안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리나는 그것이 익숙지 않은 자리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생각했다. 작고 풍만한 몸매의 줄리엣 와부이는 작은 동물같은 구석이 있어서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밖에 비가 너무 많이 와요. 좀 맑으면 기분도 좋을 텐데.”

세리나는 부드럽게 줄리엣에게 말을 걸었다. 백작 영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황자비의 말에서 상냥함을 느꼈는지 그녀의 대답은 한결 편안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황자비 전하. 우기는 정말 너무 길어요.”

“드레스를 입고서는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온통 흙탕물이 튀기니까요. 아가씨들의 예쁜 옷에 누가 되는 날씨죠.”

레이디 휘에리 역시 유쾌하게 말했다. 그녀는 와부이 백작가가 얼마나 빈한한 가문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거기에서 간신히 황궁으로 들어온 줄리엣이 지금 얼마나 불안할지도 알았다. 마음이 넓고 다정다감한 백작부인은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안나는 조금 뾰루퉁한 얼굴로 앉아서 쿠키만을 씹었다. 그녀는 자신 외의 시녀가 이 자리에 함께 앉아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날도 너무 으스스하고…”

세리나는 팔을 감싸안았다. 벽난로를 피우고 두꺼운 숄까지 둘렀는데도 몸이 차가웠다. 특히 깨끗하게 낫지 않은 왼쪽 어깨에서 얼음이 피어나는 것처럼 냉기가 솟아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관이나 의료술사들도 당연히 다 나아야하고, 이미 거의 다 나았다고 공언한 상처였는데도 그랬다. 그녀는 에스트레드의 묵직하고 진한 페로몬이 그리워졌다. 반려와 함께 있으면 마치 온실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안온했다.

“황자비 전하, 몸이 괜찮으신 것은 맞아요? 요즘 너무 바빴으니까 피로가 쌓인 것 아녜요?”

레이디 휘에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기라 서늘하긴 했으나 세리나처럼 옷을 둘둘 말다시피 하고 앉아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실제로도 나머지 세 여자는 얇은 드레스만을 걸치고 앉아있었다. 벽난로의 훈기 덕분에 그다지 서늘할 일도 없었다.

“글쎄, 좀 이상하네요. 너무 추워요.”

“우리를 보세요. 황자비 전하처럼 숄로 싸매지 않아도 괜찮은 날씨인데…”

세명이 걱정스럽게 황자비를 바라보았다. 과연 세리나의 안색은 상당히 창백했다. 부드러운 금발을 반쯤 묶어 뒤로 올린 황자비는 희고 약해보였다. 평소 강인하게 빛나던 녹색 눈동자도 지금은 부드럽고 섬세했다. 어깨 위로 잔뜩 두른 숄 위로 솟은 길고 하얀 목도 불안정해보였다. 아름다웠지만 굳은 석고상 같이 피곤한 아름다움이었다.

결혼식이 가까워져 오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일정에, 아무리 전직 기사라도 피로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황궁 안은 축제 직전이라고 하기엔 뭔가 기분 나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황후는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물밑으로는 계속해서 뭔가가 움직였고, 사람들은 라일리아와 에스트레드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에 소리 높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누구 한명이라도 먼저 발을 내디뎌야 하는데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고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스트레스라면 황자가 가장 많이 받겠지만 세리나 역시 그 곁에서 만만치 않은 압박을 받았다.

“머리가 조금 아프긴 한데, 신관의 약을 받고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춥기만 하지 괜찮아요.”

세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 휘에리는 무척 다정해서 어머니를 연상시켰다. 물론 실제 그녀의 어머니는 전혀 다정한 타입이 아니었지만.

“체온이 떨어지신 거에요?”

안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몇달 동안 계속 좀 체온도 떨어지고 추위도 많이 타. 이젠 좀 나았으면 좋겠는데.”

“체온...아, 그렇다면.”

그제야 생각이 난 것처럼 줄리엣이 가져온 바구니를 뒤졌다. 거기에서 자그마한 양철통을 꺼낸 그녀가 조심스럽게 두손으로 세리나에게 받쳐올렸다.

“이게 뭔가요?”

“귀한 차입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요.”

세리나는 양철통을 열어 향기를 맡고 표정이 굳었다. 곁에서 호기심에 바싹 몸을 당겨앉은 레이디 휘에리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동부의 차네요. 이 비싼 것을...”

“예, 맞아요.”

“어떻게 이것을 구했나요? 전 지난번에 정말 엄청난 값을 주고 샀는데요. 세상에.”

레이디 휘에리는 순수하게 감탄했지만 줄리엣은 잠깐 안색이 변했다. 휘에리는 괜히 값이 비싸다는 사실을 지적해서 줄리엣의 가난한 집안에 대해 자격지심을 불러일으켰나,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녀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어머나, 물건이란 게 어떻게든 손에 들어오고 나가고 그렇죠. 이렇게 귀한 걸 황자비 전하께 선물할 생각을 하다니.”

“예, 예...그냥 전 이것을 황자비 전하께 바치고자…”

줄리엣은 어물어물 말을 얼버무렸다. 세리나는 잠깐 고개를 기울이고 양철통 속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달콤하고 짙은 향기가 올라왔다. 이 말린 잎을 우려내면 피처럼 붉은 찻물이 우러나올 것이다.

“실은, 이 식물의 산지가 동부 뿐은 아니거든요. 저희 집안 영지 부근 산맥에서 군락이 발견되어서...원하신다면 계속 가져다 드릴 수도 있어요.”

줄리엣은 용기를 내서 말을 이었다. 레이디 휘에리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군락이요? 세상에, 와부이 백작가도 운이 트였네요. 줄리엣이 가져다 준다면 우리야 좋죠.”

안나가 말린 잎을 티포트에 넣고 우려냈다. 백색 자기잔 안으로 붉은 찻물이 휘돌았다. 세리나는 천천히 그 찻물을 입에 대고 향기를 음미했다.

줄리엣은 그 모습을 보며 손가락 하나를 더 접었다. 메리타 궁부인이 지시한 두가지 중 두번째 임무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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