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71화 (71/142)

<-- 혼약 -->                “그래서, 그 여자에게 드레스와 보석을 선물하는 장면을 그대는 보기만 했다고?”

메리타 궁부인이 줄리엣을 날카롭게 질책했다. 줄리엣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그녀는 원래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황궁에 들어와서 채 익숙해지지도 않은 상태에 궁부인의 질책을 듣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다.

“제가 뭘 어쩔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황자 전하와 황자비 전하께선 한 공간에 계셨고 호위병이나 기사들도 하께 있었고요…”

줄리엣은 작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번 거절당했던 미천한 가문 출신의 아가씨가 황자비의 혼약 시녀로나마 들어가 앉은 것이 행운이라고 할 텐데, 거기서 더 나가 줄리엣이 대체 뭘 한단 말인가. 황자비가 자신의 시녀만 데리고 자신을 시중들게 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것도 대가문의 영애 쯤이나 되어야 가능할 일이다.

“어떻게 황자는 주관자인 나와 혼약 시녀를 두고 자기들끼리만 드레스를 고르고…!”

메리타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분노가 차오르고 신경질이 났다. 결혼식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중요한 절차다. 하지만 드레스와 결혼식을 위한 반려의 반지와 예물을 고르는 것은 가장 성대하고 화려한 절차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자신이 아는 상인과 장인들의 물건을 끌어오기 때문에 각종 이권이 가장 많이 개입된 부분이기도 했다. 황자는 상단 게오르그의 지배인과 친했기 때문에 게오르그에서만 물건을 끌어다가 대었고, 덕분에 수도에서 게오르그의 입지는 결혼식 준비와 함께 더 커지고 있었다. 게오르그에 줄을 대지 못한 귀족들은 자금난에 대출할 곳이 없어 허덕일 정도였다.

“황자 전하는 기묘하게 게오르그와 친밀하단 말이죠. 뭔가 정치자금을 대는 것이 그쪽 상단이라고 짐작들은 하고 있습니다만.”

메리타 궁부인의 거실에 앉은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중년의 남자는 멋지게 콧수염을 길게 길러 다듬어 멋을 낸 상태였다. 그는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이번에도 게오르그 쪽에서 물건들을 끌어왔겠죠? 상부상조하는 사이인 것 같기는 한데.”

“어머, 그렇죠, 모나칸 후작.”

메리타 궁부인은 금방 태도를 바꾸어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남자가 앉은 소파의 곁에 바싹 다가붙어 앉아 그의 팔 위로 친밀하게 손을 올렸다. 궁부인의 태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자세로 모나칸 후작은 대충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것만으로도 메리타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거의 그에게 안길듯한 자세로 더 가까이 앉았다.

그는 황후의 수호기사 케린 모나칸의 아버지였다. 라일리아의 가장 가까운 최측근 중 한명이며 최근 황궁 경비대의 총괄 자리를 맡은 자.  모나칸 후작은 그 누구보다도 황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딸 케린 모나칸 보다도 가까울지 몰랐다.

“뭔가 알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황실에 속한 자들은 민간 상단에 직접 손을 대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제국법이니까요, 게오르그와 에스트레드 전하의 관계가 어떤지 우리가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제1황자전하께선 물론 부인의 아드님이시지만 법은 법이죠.”

로마니엔은 민간의 상단과 황실이나 군대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특히 어느 한쪽이 지배적인 상황이 되는 것을 철저히 막았는데, 과거 한때 군과 상단을 전부 장악했던 황족 방계의 인물이 반란을 꾀했던 역사적 사건 때문이었다. 재력과 무력이 합쳐지는 상황 자체를 막고자 한 것이다. 군의 인물이 상단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황실의 일원이라면 일단 정도 이상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고 부를 쌓는 것에 제한을 두었다.

“물론이에요, 후작. 나는 나의 아들 에스트레드를 사랑하지만 법은 법이니까요.”

메리타 궁부인이 교태있게 답했다. 나이가 잔뜩 먹어서도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모나칸 후작 정도는 얼마든지 꾀어낼 수 있을 만큼 젊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자신은 제국의 황제마저 유혹했던 여자였으니까.

그녀에게는 계산이 서 있었다. 에스트레드는 친아들이지만 그는 자신을 싫어했다. 메리타 역시 아들이 무서우면서 동시에 싫었다. 얼굴을 보면 불쾌함부터 들었다. 외모는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속에는 시커먼 괴물이 들어앉은 아이를 어떻게 낳았는지 모르겠다 할 정도였다. 이대로 에스트레드가 황제가 된다 해도 별다르게 화려한 미래는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것은 확실했다. 만약 아들이 미래를 약속해줄 수 없다면, 메리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살길을 찾기로 했다.

황후 측에는 메리타 궁부인의 존재가 쓸모가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첩자 노릇이라도. 물론 메리타 궁부인은 첩자 한길만을 노릴 생각은 없었다. 만약 줄리엣이 에스트레드를 꾀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대로 황후 측과의 연을 끊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그녀가 혼약 시녀로서 가져오는 정보들을 제공해서 레드포 로마나가 제위에 오를 상황하에서 숨구멍을 틔울 것이다.

‘그러려면 저애가 정신을 좀 차려야 할 텐데.’

메리타 궁부인은 줄리엣을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중년 부인의 눈빛에 작고 풍만한 아가씨가 어깨를 움츠렸다. 모나칸 후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줄리엣이 그 자리에 있어서 우리가 진행상황이라도 알 수 있는 거니까 너무 닦달하지 말아요, 부인.”

“정말 예의가 없지 않습니까, 세리나 리엔 그 여자애 말이에요.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주관자도 부르지 않고 드레스를 고르고 보석을 받다니.”

메리타 궁부인이 투덜거렸다. 모나칸 후작은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띄우고 답을 하지 않았다. 주관자인 궁부인을 부르지 않은 것은 세리나 리엔이 아닌 에스트레드의 짓일 것이다. 제1황자가 그의 어머니에 대해 가지는 부정적인 감정은 이미 황궁 내에서 유명했다. 황후와 모나칸 후작 역시 메리타 궁부인에게 큰 기대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소소한 정보를 빼내오는 정도의 역할만 해준다면 좋았다. 의외의 것에서 꼬투리를 잡을 일들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결국 고른 옷과 보석은 뭐였지?”

하지만 결국 메리타 궁부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최근 들어 세리나는 사교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었고 불과 몇달 사이에 그녀가 입는 옷들이 은근하게 유행하고는 했다. 세리나 자신은 옷차림에 크게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니라고 들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옷차림은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었다. 레이디 휘에리와 에스트레드의 감수를 거쳐 탄생한 스타일이니까 당연할 것이고, 어쩌면 외모의 문제일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그녀의 드레스와 스타일을 따라했다. 심플하고 우아하게 라인이 잡혀 잘 달라붙는 상의와 리본이나 벨트로 가늘게 강조한 허리, 풍성하게 여러 겹으로 흩날리는 스커트. 거기에 아름다운 목선을 강조하는 여린 목걸이와 단순한 디자인의 반짝이는 귀걸이가 세리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제국인에게 흔한 편이라 별로 인기가 없었던 금발도 인기가 올라 다른 색의 머리를 지닌 사람들이 일부러 염색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주 예쁜 크림색 드레스였어요. 남부 지방의 장인이 만든 레이스와 다이아몬드 가루를 이용해서 짜낸 원단으로 만든 옷이라고…”

단 한번도 제대로 만져본 적 없는 고가의 드레스였다. 그런 옷들이 지천에 널려있던 홀을 기억하면서 줄리엣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쉽게 주눅이 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씁쓸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보석은?”

모나칸 후작이 재촉했다. 줄리엣은 고개를 들어 다시 기억했다.

“파란색...아주 예뻤어요. 사파이어라고 했는데, 백금으로 주위를 두른 것 같았고...멀리서 봐서 잘 보이지는 않았는데 가늘고 단순한 디자인이었구요.”

"푸른 보석? 혹시 아주 작고 유달리 반짝이는 것이었나요?"

줄리엣의 기억 속에서 홀의 모든 것이 빛났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황자비의 목걸이는 빛을 스스로 품고 있는 것처럼 깊은 광채를 냈다. 모나칸 후작은 눈을 굴렸다.

“그 목걸이, 사파이어가 아닐 거 같은데.”

“그건 어떻게 아시죠?”

모나칸 후작이 콧수염을 비틀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에스트레드 전하가 사파이어같이 흔하디 흔한 보석을 아내에게 선물할 리가 없죠. 사파이어라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다른 보석이 하나가 더 있어요. 바다의 눈물이라고 하는 해저 깊은 곳에서 캐내는 광물이죠.”

“오...비싼 거겠군요.”

“비싸죠. 희귀한 만큼...해저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마법사 정도니까요. 그것도 아주 뛰어난. 마법력을 총동원해서 바다에 뛰어들어야 닿을 수 있는 깊은 심해에서 운이 좋으면 한조각씩 건져올리는 게 바다의 눈물입니다. 깊은 바닷속 빛이 전혀 없는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어 마법사들을 끌어들인다고 하죠.”

모나칸 후작은 히죽 웃었다.

“다시 말하자면, 바다의 눈물은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몇 개 되지 않아요. 그것이 황자의 손에 들어가게 된 배경을 한번 추적해보면 알겠죠. 그게 그냥 사파이어인지 아니면 희귀한 광석인지, 황자가 대체 어떤 경로로 보석을 손에 넣게 된 것인지 말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