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약 --> 슈엔이 당황한 얼굴로 드레스 자락을 넓게 펼치며 인사했다. 레드포 로마나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말에서 내려 둘에게 다가왔다. 유약한 인상의 청년은 세리나에게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형수님. 뵌 지 꽤 된 것 같군요.”
“레드포 전하.”
세리나 역시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레드포는 둘을 훑어보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임에도 어딘가 뱀 같은 데가 있어서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아직 이른 아침인데요.”
비가 간신히 멎은 이른 아침이다. 우기라도 여름이라 벌써 후덥지근하게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에스트레드의 황궁 근처는 주인을 닮아 여름에도 적절한 냉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견딜만 했지, 아마 다른 곳은 시종과 시녀들이 얼음 음료와 부채를 대령하느라 골이 빠지고 있을 것이다. 그 한가운데서 레드포는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뽀송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찌 오긴, 제 아내를 데리러 왔습니다.”
“대공녀께서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대공녀와 레드포의 중간 쯤에 서서 세리나가 약간의 미소를 띄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하지만 레드포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슈엔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내 시종이 형님의 궁에서 그대를 보았다고 전하더군. 직접 데리러 왔지.”
“레드포 전하의 시종이요?”
“그렇습니다. 형님께 전할 물건이 있어 제가 잠시 시종을 보냈었지요.”
“언제 말씀이십니까?”
세리나는 어조를 높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아침이라면 말이 안된다. 지하 챔버에는 외부인이 전혀 접근하지 못한다. 내부인이 정보를 누설했든지 아니면 첩자를 심어놓은 것이다.
“어젯밤입니다.”
“....”
“제 아내가 형님의 정원에 방문하여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걸 시종이 봤다더군요.”
슈엔이 움찔했다. 그녀는 분명히 지난밤 스스로의 발로 걸어들어온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납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드포의 시종이 슈엔의 방문을 봤다고 한다. 납치가 아닌 것이다.
“자다말고 왜 뜬금없이 나와서 이곳으로 왔지?”
순진하고 유약한 얼굴을 하고 레드포 로마나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는 슈엔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세리나는 긴장해서 잠깐 숨을 멈췄다.
하지만 슈엔은 고개를 저었다.
“제1황자비 전하께 결례를 범하고 사과를 하지 못했던 적이 생각나서요. 어제 말씀을 나누다보니 말이 길어져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오...좋은 사이로군. 친분이 생겼어?”
레드포가 감탄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의 모든 행동이 연극처럼 느껴졌다. 슈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 아, 잘생긴 형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든가, 굉장한 미모라든가, 혹시 그런 이야기들을 했나?”
레드포가 짖궂은 농담처럼 물었다. 슈엔이 너무나 오랜 기간 에스트레드를 짝사랑해 온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부정하지 않고 대공녀는 미소를 띄웠다.
“아무래도요. 여인들이 나눌 이야기란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오, 정숙하지 못한 로마니엔의 숙녀들이여. 남편이 멀쩡히 두눈 뜨고 살아있는데 말이야. 아니 물론 형수님께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형님은 형수님의 반려시니까요.”
막내 황자는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슈엔의 방문에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두 여자 중 누구도 그에게 속지 않았다. 사실 레드포는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 또한 둘 다 알았다.
세리나와 작별하고서 레드포는 끌고 온 또 한마리의 말에 슈엔을 앉히고 함께 자신의 황자궁으로 향했다. 천천히 산책하듯 말을 걸리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형님의 궁은 어땠어? 아, 결혼 전에 언제나 드나들었던 곳이니까 낯설지는 않았겠군.”
“네...제1황자비 전하께서 들어오신 뒤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습니다만.”
“혹시 지하 챔버도 내려가 보았나?”
슈엔의 어깨가 흠칫 굳는 것이 눈에도 보였다. 레드포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레드포와 시선을 마주했다. 새파란 눈동자는 표정을 알 수가 없어서 막내황자는 조금 호감이 생겼다. 슈엔 로마나 역시 그렇게 만만한 성격은 아니다.
“챔버에 내려갈 일 같은 건 없었습니다. 지극히 내밀한 공간일 텐데, 그저 잠시 방문한 제가 어떻게 지하에 갈까요.”
“흠, 다른 형님들의 궁 지하는 어떨까 궁금했는데.”
레드포는 자연스럽게 투덜거렸다. 슈엔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레드포의 궁에 닿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
“생각보다 재미없군. 슈엔 성격에 제대로 들이받고 형님 성격에는 그대로 슈엔을 해부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케린 모나칸이 느리게 물었다.
“뭘 말이야?”
레드포가 시치미를 뗐다. 그녀는 황후의 말을 전하러 레드포의 거처에 들른 참이었다. 필요없다며 몇년 전 수호기사를 해고해버린 레드포가 간혹 수호기사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케린이 대신하곤 했다. 그녀는 레드포를 내려다 보았다.
“수면 시간에 슈엔 로마나에게 수혈을 하면서 그녀의 페로몬이 불안정해진 것은 하루이틀 일은 아닙니다. 밤중에 이지를 잃고 돌아다니는 걸 일부러 에스트레드 전하의 궁쪽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제가 봤습니다.”
“고양이처럼 잘도 돌아다니는군. 그 능력으로 버림받은 마을에서 좀 잘하지 그랬어, 꼴사납게 마수의 브레스에 기절해서 잡히기나하고 내가 직접 가서 빼내오게 하다니.”
막내 황자가 투덜거렸다. 케린은 멋적은 얼굴로 턱을 긁었다.
“그건 죄송합니다. 어느정도 유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습을 당해서…”
“됐어. 참 빨리도 사과하는군.”
레드포는 턱을 괴고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가 태어난 이후 감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져온 상대가 케린 모나칸이었다. 그녀는 다정하면서도 거리를 유지했다. 그 모습에 가끔 막내 황자는 심술을 냈다.
“왜 슈엔을 멋대로 풀어놨냐고? 뻔하잖아, 지금 너무 재미가 없어.”
레드포의 손 안에서 화려한 화염이 타올랐다. 공중을 떠다니게 한 뒤 청년은 불꽃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머니는 의욕 충만한 거 같지만 말이야. 난 아니거든. 그 시대를 겪은 건 어쨌든 어머니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황자 전하의 어머니십니다.”
“나를 이꼴로 만들어낸 건 어머니잖아. 다른 인간의 육신을 탈취해 나를 낳은 영혼을 내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하.”
“아, 됐어. 그 문제로 어머니와 싸운 건 벌써 사춘기 때 지나가 버렸으니까. 이제 내가 알아서 한다구.”
레드포는 심술궂게 말했다. 더 말을 이으려는 케린 모나칸에게 손을 들어 막으면서, 그는 계속해서 불꽃을 가지고 놀았다. 어둠 속에서 화염이 보석처럼 빛났다.
*****
눈을 뜨니 결혼식이 코앞이었다.
세리나는 황자궁의 가장 큰 홀에 앉아서 다소 기가 찬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족히 수십벌은 되는 각양각색의 드레스들이 각자 화려함을 빛내면서 걸려 있었다. 상인 오베이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세리나 리엔 제1황자비 전하, 게오르그의 상인 오베이가 인사드리옵니다.”
대륙 각지로 다니며 각국의 귀족과 왕실에 상질의 물건만 공급하는 고급 상인 오베이답게 기름칠한 듯 매끄러운 매너였다. 그녀는 에스트레드를 바라보았다.
“...결혼의 준비는 호보프와 레이디 휘에리가 맡아서 해주시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게다가 주관자이신 메리타 궁부인께서 이걸 아시면.”
“결혼 당일에 입을 드레스야. 이걸 고르는 것까지 남에게 맡기겠다는 건 아니겠지?”
에스트레드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세리나 리엔이 겉모습부터 그렇게 미인이 아니었다면 사랑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 내면을 알게 되면서부터 어차피 사랑은 시작되었겠지만.
“하지만 황후 측도, 캐딜럿도, 슈엔 대공녀도...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드레스를 고르는 것은…”
“물밑으로 진행되는 적들의 음모를 파훼하는 것만큼 네 드레스도 중요해. 평생 한번 뿐인 결혼식이다.”
“결약은 이미 단단하니 사실 결혼식은 중요하지 않지 않습니까.”
“결혼식이 중요해. 너도, 나도, 한번만 하는 것이다. 결약이야…”
황자는 세리나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매일밤 침대위에서 계속 하잖아. 물론 그것도 동등하게 중요하지만.”
”전하…”
세리나는 적응이 안돼서 한탄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며칠이 지났다. 에스트레드는 이제 대놓고 애정표현을 했다. 예전에도 썩 거리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사실 지금 드레스나 보석을 고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충분히 로맨틱해야 하는 결혼식 직전의 기간이자 서로 마음을 터놓은 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하지만 산재한 비밀들이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대충의 윤곽은 드러나고 있었다.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황후 라일리아 측은 동왕국의 잔재와 관계가 있다. 그것도 동왕국 최후의 왕 레너드 볼프의 힘과. 도나 누앤에 이어 슈엔 로마나 역시 개조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오히려 제위의 승계를 위해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황제 발렌2세의 상태가 계속해서 침묵에 가까워서 누구도 그의 정확한 심사를 알아낼 수 없었다.
“정신 차려, 지금부터 드레스들을 오베이가 내보일 것이다. 원하는 모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야 해.”
“저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만…”
“나는 상관 있어. 내 아내가 누구보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우니까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하는 에스트레드를 바라보며 세리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황자의 신경줄은 끊어지도록 가늘다가도 쇠심줄처럼 굵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한심한 표정으로 자리에 늘어져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