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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68화 (68/142)

<-- 혼약 -->                “당연히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만...혹시 어젯밤 일은 기억나시는 게 없는 건가요?”

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말했다시피 나는 내 침실에서 레드포 전하와 잠이 들었어요. 왜 자꾸 그런 걸 묻죠?”

슈엔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정색했다. 어젯밤 일이라니 설마 레드포와의 잠자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는 세리나가 못마땅했다.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저러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세리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요즘 몸이 이상하지는 않으신가요? 어지럼증이 있다든지, 신체 상태의 변화가 있다든지...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만.”

“없습니다, 그런 것.”

슈엔은 딱잘라 말했다. 사실 요즘 들어 현기증이 나고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슈엔은 그게 혹시 임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곧 레드포에게 말해볼 작정이었다. 당연히 지금 세리나에게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가요, 제1황자비 전하?”

세리나가 에스트레드와 함께 한 지는 이미 몇달이 지났다. 아직 회임의 소식은 없었다. 만약 슈엔이 먼저 아이를 가진다면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로마니엔에서도 후계의 생산은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슈엔은 세리나가 그 때문에 자신을 납치했다고 생각했다.

벽에 부딪힌 것처럼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지만 세리나는 고개를 한번 젓고 슈엔에게 말했다.

“레이디 도나 누앤을 아시죠?”

당연한 소리를 또 묻고 있었다. 레드포 로마나의 전처이자 슈엔의 오라비, 오르젤 로마나의 살해범으로 지목받고 내쳐진 여자. 슈엔은 눈썹을 올렸다.

“레이디 도나 누앤, 제 오라비인 오르젤 로마나를 살해한 범인인 여자 말씀이십니까?”

현 남편의 전처이자 혈육의 살인범을 아냐고 묻다니 이건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거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슈엔은 세리나의 뺨을 때릴 기세였다. 하지만 세리나는 말을 이었다. 반드시 그녀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사실이 있었다.

“레이디 도나 누앤이...현재 어떤 모습인지, 아십니까?”

“죄인이 어떤 꼴인지 제가 알게 뭔가요. 보나마나 처참하겠죠. 중죄를 지은 자의 말로는 뻔한 게 아닙니까.”

남편의 전처인 것은 상관 없다. 레드포 로마나는 에스트레드처럼 완벽하게 잘 맞는 페로몬의 상대를 찾아 결합하지 않고 정치적 세력을 선택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의 반려로 앉은 것을 슈엔은 잘 알았다. 오르젤 로마나 역시 그녀에게 별로 각별한 오라비는 아니었다. 어차피 의절되기 전에도 그의 천박함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두개가 합쳐진 여자를 세리나 리엔이 언급하는 건 문제가 달랐다.

“중대한 자리에 앉아 살인을 저지른 여자에요. 내가 알아야 하는 게 대체 뭐죠? 제1황자비 전하, 무슨 의도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슈엔은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적의를 담고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반대로 세리나는 차분한 얼굴로 대공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자코 의료실의 문을 열어서 앞서서 걸어나갔다.

“저를 따라와 보세요.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풍성하게 빛나는 금발에 덮인 등이 앞서는 것을 보고 슈엔은 그녀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리나 리엔의 술수에 넘어갈 만큼 자신은 만만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가지고 대공녀는 보란 듯 오만하게 턱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의료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있던 호위병마저 사라진 텅 빈 지하 공간 속에 건물 주인의 냉기가 공기를 감싸고 돌았다. 차가움에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잠시 기다리세요.”

지하 가장 깊은 곳의 챔버에 다다라 세리나가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에스트레드에게 배운 대로 챔버 입구에 자신의 손을 댔다. 두터운 얼음 벽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저건, 누구죠?”

방 안 한가운데 침대에 여자가 누워 있었다. 긴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는 다소 늙어보였지만 그 얼굴을 슈엔은 알고 있었다. 감찰단 지하의 감옥에서 어떤 자들이 도나 누앤을 탈옥시켰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여기에 있을지 상상도 못한 대공녀는 숨을 들이켰다.

“아니, 도나 누앤….세상에, 그 범인이 당신이었나요? 당신의 수하들이 이런 짓을 한 건가요? 대체 왜? 지금 내게 범죄 사실을 고백이라도 하는 겁니까?”

“쉿.”

슈엔이 말을 쏟아내는 중간에 세리나가 손가락을 입에 올렸다. 꾸준히 제공 된 수많은 짐승의 피 속에 도나 누앤의 얼굴은 색을 다소 되찾았다. 그녀는 여전히 지쳐보였고 눈을 뜨지 못했지만 자신의 얼굴은 드러났다. 슈엔이 말을 잇지 못하고 도나 누앤의 챔버 안을 지켜보는 동안 방안 한구석에서 검은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 슈엔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안을 보려고 노력했다. 너무 검고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곧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슈엔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방금 들여보낸 소 한마리가 그림자 덩굴 속에서 해체되고 있었다. 뼈와 살과 피가 허공 중에 흩어져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오, 세상에.”

슈엔은 신음했다. 그림자의 끝은 도나 누앤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소가 차례로 해체되고 그 피와 살이 빠져나갈 때마다 도나 누앤의 피부에 조금씩 더 생기가 도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저게….대체 무슨…”

“보시는 대로입니다. 레이디를 구출해서 왔을 때 이미 저 상태였죠. 우리 측에서는 그녀가 많은 횟수의 신체 개조를 당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세리나는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만...최근에 현기증을 느끼거나 몸에 이상이 생기시진 않았나요?”

“왜, 왜 그런 걸 묻죠?”

“아니면 잠을 자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곳에서 깨는 일이 있다든가요.”

슈엔은 당혹해서 말을 더듬었다. 실제로 어지러움이 잦았고 몸도 간혹 무거웠다. 밤에 잠이 들면 슈엔이 눈을 떴을 때 화장대 앞일 때도 있었다. 그것을 대공녀는 자신이 피로하기 때문에, 혹은 임신의 가능성으로 판단해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대공녀는 잠시 논리적으로 판단할 의지를 잃었다.

“감옥에 갇히기 전에 이미 신체개조는 시작되었을 겁니다. 하루 아침에 될 문제는 아닐 테니까요. 레이디 도나 누앤은 지금 끝없이 피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짐승을 삼키는 양이 엄청나죠.”

인간을 짐승으로 대체한 때로부터 그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구태여 그 말은 덧붙이지 않고 세리나가 말을 이었다.

"개조의 시작 시점은 분명히 감찰단 감옥에 갇히기 전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슈엔은 챔버의 벽 쪽에서 한발 물러섰다. 도나 누앤의 몸 속으로 소의 살과 혈액이 거의 다 빨려들어갔다.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보이는 동시에 여전히 식욕이 느껴졌다. 누워서 눈을 감은 얼굴에서조차 욕망이 느껴질 정도라니, 슈엔은 기가 막혔다.

“조심하세요. 믿는 것은 대공녀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저는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디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슈엔 대공녀는 여전히 충격에 빠진 눈빛이었다. 이대로 돌려보내기엔 위험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총명하고 눈치가 빠른 그녀가 자신의 신변에 어떤 위협이 닥쳐오고 있는지를 알아채길 바랄 뿐이었다.

*****

가타부타 말 없이 슈엔 대공녀는 지하 챔버에서 나올 수 있었다. 세리나는 조용히 황자궁 출구까지 그녀를 따라나와 배웅했다. 방금 본 충격적인 장면 때문에 슈엔은 손을 조금 떨고 있었다.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세리나는 가만히 슈엔의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빌려준 겉옷과 드레스를 입은 대공녀는 분명히 심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스트레드의 신관과 의료사들이 밝혀낸 바, 황후 측이 마수화 실험에 쓰는 방식은 전적으로 혈액에 의존한다. 도나 누앤의 피를 빼내 대상 개체에게 넣는다. 그 양이 많기 때문에 먼저 개체의 피도 뽑아낸다. 하지만 지금은 도나 누앤처럼 강한 특질을 가진 모체가 없기 때문에 충분한 수혈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슈엔이 모체든 객체든 어느 쪽이든 빈혈로 인한 현기증은 있을 수 밖에 없다.

슈엔은 잠자코 입술을 물었다. 그녀 역시 바보는 아니다. 곁에서 지켜 본 레드포 로마나는 충분히 믿을만 하지 못한 자였다. 레드포의 황자궁 안에서 슈엔 자신은 이방인일 뿐이었다. 정치적 세력의 결합. 그렇게 시작된 결약이자 반려 사이였기 때문에 그 정도의 미묘한 겉돔은 견딜만 하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레드포의 황자궁 내부에 슈엔이 갈 수 없는 지역이 있었다. 궁의 지하. 레드포의 말로는 그곳에 죄인들을 가둬놓았기에 고귀한 숙녀가 접근할 곳이 안된다고 했지만 슈엔 역시 그게 전부리라고 순진하게 믿지는 않았다. 지금 본 광경으로 미루어볼 때 지하는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그때 경쾌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슈엔. 여기 있었군.”

중앙궁으로 통하는 넓은 대로 한가운데 말을 탄 갈색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레드포 로마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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