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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61화 (61/142)

<-- 비밀 -->                “그럼 제 특질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건가요?”

“그래. 첫눈에 알아보았다. 열셋이었지? 처음 만난 때가.”

“예.”

“아마 황제 폐하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보냈겠지.”

말하자면 속사정은 좀 더 길었다.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말을 줄였다. 세리나의 어머니인 마리아 엔티아스와, 발렌1세와, 하여튼 좀 많은 사람들이 얽힌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황자는 천천히 세리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얇은 비단 잠옷 한겹 아래, 왼쪽 어깨를 감싼 흰 붕대가 자꾸만 신경쓰였다. 원래 상처란 열이 나는 게 정상이다. 이처럼 제대로 낫지 않고있는 상처라면 더했다. 붉고 뜨거워야 하지만 세리나의 상처는 계속해서 창백하게 질리기만 했다. 그녀가 자는 동안 불러다 댄 신관이나 의술사들은 계속해서 상처는 나아가고 있다는 말만 했다.

‘클리스 로마나의 손톱.’

세리나의 상처는 레이디 도나 누앤을 구출하는 도중 생긴 것이었다. 폭주한 클리스 로마나. 에스트레드가 걱정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클리스 로마나의 행태와 폭주를 볼 때 그는 이미 황후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 분명했다. 세리나의 손에 죽은 오르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후는 결코 일반인과 같다고는 할 수 없는 로마나의 혈통들마저 실험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사실 페로몬과 체향에 유달리 민감한 로마나 황족들의 성질로 볼 때 일반인보다 오히려 좋은 실험대상일 수 있었다.

에스트레드는 자신의 궁 지하 챔버에서 차갑게 식은 채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레이디 도나 누앤을 생각했다. 그가 포섭한 의학자와 신관들이 틈만 나면 그녀에게 붙어 혈액과 페로몬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물론, 며칠마다 한번씩 어딘가에서 데려온 신원이 불분명한 버림받은 인간들을 제물로 삼으면서. 세리나의 상처와 황후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에스트레드로서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였다. 레이디 도나 누앤은 이미 그 자신이 많이 변이된 상태였다. 최소한 황후가 어떤 방식으로 도나 누앤에게서 혈액을 채취하고 변형시켰는지를 알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을 거쳐야 막는 방법도 알게 될 테니.

황자는 다른 이들의 눈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로마니엔은 피의 역사 위에 세워진 제국. 그 피가 누구의 것이든, 얼마나 많은 이의 것이든, 에스트레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정당한 길이다. 그에게는 그랬다. 아마 황후 라일리아도, 역대 황제들도 역시 그럴 것이다.

황자는 아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밖에 장대비가 쏟아지며 습도도 높아지고 있었지만 에스트레드가 쳐놓은 기운의 막 덕분에 방안의 습기들은 전부 얼어서 밖으로 밀려났다. 다만 공기가 조금 차서 벽난로에는 불이 타고 있었다. 얼음의 황자가 사는 궁전은 어쩔 수 없이 한기가 돌 수 밖에 없었다.

세리나는 에스트레드의 품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에스트레드의 체온이 몸을 덥히는 것 같아서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황후는 왜 그런 계획을 진행중인 것일까요. 레드포 로마나 전하의 제위의 계승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글쎄…”

레드포 로마나를 가까이에서 본 것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하지만 성인식 직후 스치듯 본 레드포는 에스트레드가 느끼기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유약하고 부드러워보이는 소년의 얼굴 뒤로 타오르는 불꽃의 힘을 숨기고 있다. 에스트레드 자신이 레드포와 진심으로 싸운다면 지지야 않겠지만 반드시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만약 제위를 노린다면 레드포 로마나의 능력을 키우고 정치 파벌을 운용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장차 제국을 지배하고자 한다면 다스릴 나라에 마수를 풀어놓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중앙대륙을 지배했던 제국 중 가장 강성했던 나라가 마수의 대량 출현으로 십년도 걸리지 않아 멸망했던 역사도 있을 정도였다.

에스트레드는 수십번도 더 생각해본 문제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황후는 현재 제국의 상태 그대로 레드포가 제위를 이어받기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혹은…

그때 밖에서 시종장 호보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자 전하, 메리타 궁부인이 뵙고자 하십니다.”

“어머니가? 왜?”

에스트레드의 얼굴 전체로 귀찮다는 표정이 퍼졌다. 문을 열고 들어선 호보프가 허리를 숙였다.

“전하의 결혼식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며 방문하셨습니다. 홀에서 기다리고 계신데, 어찌 전달해드릴까요.”

여태까지 에스트레드는 그의 어머니를 황자궁 안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황자궁 안에 발걸음 들이는 것조차 마땅찮아 했으니 당연했다. 호보프는 당연히 주인이 매몰차게 내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나가지. 기다리시라고 전해라.”

*****

“어머나, 에스트레드.”

손님용 거실에 앉아 혼자 차를 마시던 메리타 궁부인이 활짝 웃었다. 치아가 보일 정도로 웃는 가식적인 미소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황자는 의례적으로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의 방문입니다, 어머니.”

“여러가지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세리나가 부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와보지 않을 수가 있어야죠.”

그녀는 친근하게도 황자비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결혼식 전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후궁 중에서도 지위가 낮은 메리타와 제1황자의 정부인이 될 세리나는 격이 다르다. 격식 있는 호칭 없이 함부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에스트레드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를 뱃속으로 낳은 어미라도 메리카 궁부인은 뱀처럼 교활한 여자였다. 그녀가 제안한 상대를 거절한 후 발길도 하지 않던 모친이 갑자기 나타나 황자궁에까지 찾아온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이유나 들어보고 내치는 쪽이 나았다.

메리타 궁부인은 순진한 척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세리나를 좀 볼 수 있나요? 병문안이라도 하고 싶은데. 맛있는 딸기 쿠키도 가지고 왔어요.”

“내 반려는 지금 회복을 위해 누워있습니다.”

“누워있더라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요? 곧 내 며느리가 될 아이 아닌가요?”

며느리라는 말에 에스트레드의 은색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들을 걸고 넘어져 세리나와의 관계 설정을 하려는 메리타 궁부인이 자꾸 심기를 건드렸다.

“절대 안정이 최우선이죠.”

“하지만…”

“어머니.”

에스트레드는 소파 팔걸이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냉랭하게 식은 은청색 눈동자가 궁부인의 주름진 얼굴을 훑었다. 이대로 내쫓을까, 아니면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게 자비를 베풀까. 그의 감정없는 시선에 메리타 궁부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여기 오신 이유가 무엇이죠?”

만약 정말 병문안이랍시고 쿠키 따위를 싸들고 온 거라면 지금 당장 내쫓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메리타 궁부인은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손을 얌전하게 모았다.

“결혼에 관련된 문제를 상의하러 왔습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어머나, 하지만 앞으로는 저와 상의하셔야 할 텐데요.”

슬슬 한계점이 다가왔다. 말끝마다 방긋방긋 웃는 메리타 궁부인의 꼴이 자꾸만 에스트레드의 신경을 긁었다. 그녀는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아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황자, 나는 황자의 어미입니다. 그대의 결혼에 내가 관여하는 건 당연해요.”

메리타 궁부인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더이상 말하지 않고 에스트레드가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리려 했을 때, 궁부인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내게 황자의 결혼식을 감독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제국 내 상황이 복잡하여 내무부가 세세한 부분까지 감독할 수 없다면서요.”

황자는 무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원래 이런 국가 중대사는 황실에서 가장 높고 귀한 귀부인이 관장하는 것이 정석이지만...황후 폐하께선, 황자도 아시잖습니까. 아무래도 이해관계가 상충되죠. 황제 폐하께서 그것이 걱정되는지 제게 이 막중한 임무를 주셨습니다.”

메리타 궁부인은 뻐기는 투로 말했다. 아무리 황자의 결혼식이라 하나 모든 것을 그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절차와 예식을 관장하고 감당하는 귀부인이 한명을 두는 것이 관례였고, 에스트레드는 당연히 사교계에서 가장 발이 넓고 예의범절에 도가 통한 레이디 휘에리를 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제 발렌2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정식으로 제게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전하의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겠다는 제 마음을 아시겠지요?”

차갑고 싸늘한 아들의 결혼에 대해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쁨에 메리타 궁부인의 얼굴이 빛났다. 결혼식 자체에 대한 권한이 곧 권력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그 과정에서 세리나를 구워삶아 제 편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만약 그게 여의치 않다면…

‘가슴 아프지만 다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으니까.’

메리타는 에스트레드의 무감정한 얼굴을 훑어보았다. 애초에 자식에 대한 애정도 그리 크지 않았다. 조금 더 욕심을 채울 수 있다면 다른 방식도 고려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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