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60화 (60/142)

<-- 비밀 -->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케린 모나칸 말입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세리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도 서로 마음이 통한 직후의 날인데, 나름대로 로맨틱한 인사를 기대했던 에스트레드는 김이 새서 약간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표정하겠지만 세리나는 그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약간 움찔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아직 어둠숲 버림받은 마을에 감금해놓으셨다 했지요. 황후가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났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에스트레드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는 포근했던 잠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긴 다리를 꼬고 황자는 흐트러진 은발을 쓸어넘겼다. 밖은 이미 다시 흐려져 비를 뿌리고 있었다. 로마니엔의 우기는 길고 질기다.

“황후는 꽤 자주 어둠숲으로 자신의 기사들을 보냈다. 어둠숲은 위험하고 길을 잃기 쉬우니까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 철칙인데 벌써 며칠 째 연락이 되지 않고 있지.”

“마수에게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러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나는 황후가 어둠숲에서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황후는 내가 그걸 막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서로 목적은 알고 있어. 그런 지 이미 몇년이 되었다. 서로 결정적인 꼬리를 잡지 못하고 뱅뱅 돌고 있을 뿐.”

세리나는 시종장 호보프가 가져다 놓은 따뜻한 티포트와 찻잔을 직접 가지고 황자의 앞 테이블에 놓았다. 차를 따라주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제가 참 둔한가 봅니다. 벌써 몇년 째라니…”

세리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하지만 이건 문제가 좀 다르다. 모시는 주군이 이미 몇년 째 정적과 각을 세우고 있는 것을 그저 윤곽만 알고 있었다니. 물론 그가 황후와 대립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는 황궁 안의 시종 아이라도 아는 일이었다.

“글쎄...그건 내가 일부러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까. 네 잘못이 아니다.”

황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따뜻한 그의 손이 세리나의 서늘한 손끝을 데워주었다. 유난히 몸이 차서 에스트레드는 걱정이 좀 되었다. 아내의 페로몬 역시 전보다 조금 약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양손을 잡아보자 왼쪽이 확연하게 차가웠다. 그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끝을 주무르며 온기를 돌려주려고 애썼다. 에스트레드는 자신의 속성이 하필 얼음이라 그녀의 체온을 올려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차를 마시면서 에스트레드가 그녀에게 간략하게 들려준 그의 결론은 세가지였다. 첫째, 세리나가 혼혈이자 그 페로몬에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지금 황후의 실험 혹은 계획에 중요한 키포인트다. 둘째, 로마나 황실에서도 또 하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황제 발렌2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수없다. 셋째, 관련자들은 전부 동부 점령지와 관계가 있다.

“공동에서의 그 환영이 말했습니다, 자신이 동부 마법사들의 수장이라고요.”

“동부 마법사들의 수장이라.”

“동왕국 최후의 왕이었던 레너드. 그라는 말일까요?”

에스트레드는 생각에 잠겼다. 동부 왕국 최후의 왕, 선대 황제였던 발렌1세에게 처참하게 참수당한 자. 레너드 볼프. 제국의 역사가들은 정사에서 그를 교활하고 악마적이었던 최악의 마법사로 기록했고, 음유시인들은 간교하고 음흉한 마족의 수하인 레너드를 무찌르는 발렌1세의 무용담을 노래했다. 제국의 패권이란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 대륙 전반에 동부 왕국의 마지막 왕은 그렇게 기록이 되었다. 세리나와 에스트레드 역시 그런 역사를 배우고 자랐다.

마법사들의 왕국이었던 동왕국은 그 왕이 왕국 전체 마법사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만큼 볼프 가의 혈통에는 뛰어난 마법사의 피가 흘렀다. 민족마다 나라마다 특색이 있는 이곳 중앙대륙에서 북부 산맥의 에스턴 왕국은 강인하고 특출난 무사적 자질로, 남부 사막의 타리아 족은 사막을 건너는 대상인의 기질로, 동부 바닷가의 동왕국은 그 빼어난 마법사의 능력으로 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각각 쌓아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무너뜨린 발렌1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레너드 볼프를 죽인 건 내 조부인 발렌1세라고 하지. 나와 비슷한 얼음 속성의 능력자였다고 하고.”

또한 일말의 자비도 없는 성격이었던 남자.

발렌1세는 로마니엔 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얻어낸 정복 군주였다. 빼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화려한 은발을 늘어뜨린 천사같은 미모였다고 전해지는 그는, 그러나 제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군주이기도 했다.

“내가 열 두엇 쯤 되었을 때 황제 폐하가 나를 보고 꼭 자신의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었지.”

로마나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자들의 특징은 서로를 꼭 빼다 박았다. 하지만 평생동안 약점 하나 없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독살당한 발렌1세와는 달리, 에스트레드 자신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아니, 약점이라고 말하면 뭔가 이상하다. 세리나는 강했으니까. 하지만 로마나 혈통들과 같은 철옹성과 같은 강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에스트레드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말해두지. 앞으로 몸을 조심해야한다. 스스로를 보호해라.”

“무엇에서 보호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적들에게서.”

눈을 크게 뜬 세리나에게 황자는 손을 들어보였다.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다. 어느 쪽이 진짜 위협적인지 아직 알 수 없어. 직접적인 위협은 황후에게서 오고 있긴 하지만.”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트레드가 말을 이었다.

“네 특질에 관련된 것이다. 너의 페로몬은 로마나 황족들에게만 향기롭고 좋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힘이 약한 자들은 체향을 알아채는 것 역시 둔해서 그렇지 모두에게 유혹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알지는 모르겠지만, 천일화의 향기와 많이 닮아있지.”

“레드포 로마나 전하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군. 천일화의 향을 우리들이 뿌리고 다니는 이유를 알고 있지?”

“힘을 북돋우고 스스로의 체향 자체를 키우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손목을 가까이 끌어당겨 그 안쪽 부드러운 곳에 코를 박았다. 좀 더 짙고 깊은 체향이 올라왔다. 그는 몸의 모든 욕구가 서서히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체액에는 페로몬이 농축되어 있어. 가장 짙게 농축된 것은 역시 혈액이다.”

황자의 엄지손가락 끝에서 세리나의 손목 박동이 뛰었다. 얄팍한 피부 밑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소리를 느낄 수 있다니, 새삼스러워서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을 훑었다.

“대상의 페로몬과 능력을 향상시키는 체향을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게 너의 특질이지. 게다가…”

“게다가?”

“능력 뿐 아니라 욕구를 상승시킨다. 아주, 아주 높이 말이지.”

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향기가 천일화와 닮았다는 레드포의 말 한마디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줄은 몰랐다. 에스트레드는 그녀가 충격받지 않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말했다.

“황후가 진행하고 있는 계획은, 평범한 인간의 안에 너와 같은 특질인 자들의 혈액을 투여하여 마수로 변이시키는 것이다. 능력과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채 한계를 벗어나 닥치는대로 폭주하는 괴물로 만드는 거지.”

“....”

“레이디 도나 누앤이 황후가 발견한 가장 정확한 특질을 가진 자였을 게다. 그래서 지금 그런 꼴이 되어버린 거야. 레이디 휘에리 역시 비슷한 류지만 그렇게 짙은 체향은 아니고, 지나치게 이목을 끄는 위치이기 때문에 포기했겠지.”

세리나는 갑자기 쏟아져 내린 충격적인 말들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인간을 마수로 변형시키는 방법에 자신과 동류인 피가 쓰인다고? 그렇다면 레이디 도나 누앤은 모든 혈액을 전부

빨려서 지금 그 지경이 되어버린 것인가. 황후는 세리나 역시도 제물로 쓰려는 것인가.

하지만 세리나는 그녀의 체향에 대한 말은 가끔 듣기는 했지만 살면서 그렇게 많은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약간 의아해져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저는 여태까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전하와 결약을 맺기 전까지요.”

“그거야 당연하지.”

에스트레드가 투덜거렸다.

“내가 내 체향으로 너를 감싸다시피 해서 지냈으니까. 아마 네 곁을 지나는 사내들은 전부 코를 막아야 했을 거다. 네게서는 아주 지독하게 강한 로마나 황족의 방어가 피어오르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야.”

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겪었던 일들의 아귀가 조금씩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다소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에스트레드는 조심스럽게 손에 담았다. 자그마하고 부드러운 뺨을 남자의 손에 묻으면서 세리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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