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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59화 (59/142)

<-- 비밀 -->                순간 세리나는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앉은 자리에서 휘청 균형을 잃는 그녀를 보고 에스트레드가 깜짝 놀라 아내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현기증 때문에 눈 앞이 새하얗게 변해서 여자는 허우적거리며 남자의 어깨에 매달렸다. 에스트레드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다독거렸다.

“아니,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무슨 반응이 이래?”

에스트레드는 투덜거렸다. 세리나는 피가 빠져나간 것 같은 정수리를 붙들었다. 잠도 덜 깨서 헛소리처럼 들이대고 물은 것이긴 하지만 설마 진짜로 단번에 대답을 해줄줄은 몰랐다. 언제나처럼 꽁하게 돌아앉아 아닌 척할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지금도 이게 꿈인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잠도 덜 깬 마당에 무작정 던졌던 질문이라 이런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거 꿈 아니죠…”

“꿈 같아? 깨워줘?”

심술이 난 남편이 아내의 양 볼을 꽉 잡았다. 희고 매끄러운 볼이 찹쌀떡처럼 잡혔다. 뺨이 잡혀서 입이 붕어처럼 나온 채로 세리나가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아뇨, 아뇨...꿈이라도 깨우지 말아주세요. 조금 더 꿀래요.”

에스트레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손에 힘을 주고 그녀의 뺨을 주물렀다. 얼굴이 빵떡처럼 되고도 세리나는 꿈 꾸는 듯한 눈을 풀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말한 에스트레드 역시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혼자 꿈 속으로 도망치다니 치사했다.

“무슨 꿈을 꾼다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데.”

“순순히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전하가 현실일 리가 없으니까요.”

“뭐?”

“여태까지 저는 기사였습니다. 전하는 내 주군이었고…”

세리나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에스트레드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반려라고 해도 저는 대역인 거였고...떠나야 하는 사람인데…”

그녀는 잠이 덜 깬 듯 횡설수설했다. 어처구니도 없고 안쓰럽기도 했다. 사실 에스트레드 본인 역시 주군과 기사의 관계로 지낸 지 이미 십년이었으니 거기에서 벗어나기도 힘들었다.

이미 처음부터 그녀가 자신을 짝사랑한다는 사실 같은 건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이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엔 자신의 위치가 너무 불안정했다. 영원의 끝까지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과 언제든 안전하게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 에스트레드의 심장 속에서는 언제나 두개의 가지가 엇갈렸다.

결국 잡기로 결심했던 그때, 되지도 않게 역할 제의랍시고 제안했던 것도 비상구를 열어두려고 발버둥쳤던 결과였다. 그녀의 발목을 잡으려는 남자의 본능과 만약의 사태가 생겼을 때 그녀를 탈출시키려는 이성적인 판단. 에스트레드는 자신이 비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 벡스 레넌이 한 말이 진짜였다니.”

세리나가 황자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린 말에 에스트레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벡스 레넌이, 뭐?”

“그가 그랬거든요. 둘이 삽질 좀 그만 하라고. 꼴보기 싫다구요.”

“...쓸데없이 참견이군.”

“쓸데없는 건 아닙니다...그가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저도 이렇게…”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이런 식으로 여쭤볼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아무리 잠이 덜 깼어도...”

“호오.”

에스트레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벡스 레넌이 의외로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사실 그 자신 역시도 상당히 놀란 참이었다. 언제나 참기만 하던 고지식한 세리나 리엔이 이렇게 단번에 마음을 드러내고 그에게 물음을 던질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거군?”

에스트레드는 흐흥하고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세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용병대장 덕분에.”

상대의 감정에는 상당히 둔한 세리나였으니까 뭔가 힌트는 필요했을 것이다. 눈치 빠른 에스트레드는 이미 처음부터 세리나의 감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십년의 세월을 짝사랑에 고민하며 살아온 것이다. 황자는 자신이 상당히 비겁하고 못됐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혀를 찼다.

황자는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로 끌어올렸다. 단단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그는 아내의 부드러운 금발을 쓸어내렸다. 열어놓은 발코니에서 맑은 바람이 흘러들었다. 길디 긴 우기 중 잠시 비가 멎는 귀한 날이었다. 오전의 투명한 햇살이 방 안을 가지런하게 수놓았다.

언제나 보던 얼굴인데도 새삼스러웠다. 세리나는 멍한 기분으로 자신의 시야와 같은 눈높이의 에스트레드를 바라보았다. 화사한 은발이 흘러내려서 어깨로 떨어졌다. 그는 가로로 긴 눈을 찡긋거리며 세리나를 마주 보았다. 그의 은청색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혹은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에스트레드의 차가워보이는 눈 속에서는 여태까지 그녀가 기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따뜻한 감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

‘왜 여태까지 알지 못했을까.’

어제와, 그저께와, 일주일 전과...같은 사람이고 같은 눈이다. 항상 바라보고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세리나는 에스트레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남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얼굴을 숨겼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서,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십년간의 가슴앓이가 그저 앓이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다. 새삼스럽고, 기쁘고, 따뜻했다. 기꺼이 자신을 안아주는 에스트레드의 체온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오늘 유달리 더 안온하게 느껴졌다.

황자는 천천히 그녀를 다독였다. 세리나는 의심스러운 기분이 되어 황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이 사람이 캐딜럿이 만들어낸 키메라는 아닌지, 아니면 황후가 만들어낸 환영이 아닌지 말도 안되는 의심이 불쑥 치밀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에스트레드의 뺨을 만졌다. 전 같으면 손대는 것 하나도 큰 마음 먹고 내밀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원래 자신의 것인양 자연스럽게 만질 수 있는 것에 세리나는 조금 놀랐다.

“... 말씀을 정말 믿어도 됩니까?”

그녀는 남편의 뺨을 매만지면서도 의심스럽게 물었다.

“안믿겨져?”

“당연히. 십년 동안 마음고생해보면 아실 텐데요.”

“나도 했어, 마음 고생.”

에스트레드가 세리나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세리나의 짙은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 보면서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은 약간 수줍게도, 쑥스럽게도 들렸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서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쳤다. 도톰하고 말랑한 세리나의 입술은 평소보다 체온이 낮은 듯 서늘하게 느껴졌다. 아직 깨어난 지 얼마 안되는 터라 몸이 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구해냈을 때 머리의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았고 눈에 띄는 외상 역시 없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산의 지하에서도 몸 성히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운이 좋은 일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세리나가 벌린 입술 사이로 혀를 섞어왔다. 조심스럽고 수줍은 움직임에 에스트레드는 불이 붙을 것 같은 자신을 자제했다. 그는 여자가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입맞춤을 리드했다. 서로의 치아와 젖은 점막이 혀끝에 느껴졌다. 입술이 벌어지고 서로가 섞이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귓가에 들려왔다.

세리나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머리가 멍하고 울렸다. 이 행복감이 자신의 것인지 아직은 도저히 믿을 수도 없었다. 그와 매일같이 관계를 가지고 밤을 지새면서도 한번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 적 없는 행복이었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둘의 체향으로 가득찼다. 밑에서부터 천천히 쌓여올라온 공기의 층은 둘의 페로몬을 한껏 담고 있었다. 그녀가 코로 숨을 들이켜기만 해도 온통 에스트레드의 향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에스트레드에겐 그녀의 향기가 느껴질 것이다. 완벽하게 외부 세계와 단절된 둘만의 세상이었다. 세리나는 그때 비로소 결약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반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짝.

왼쪽 어깨가 찌르듯이 아파왔다. 그녀는 통증을 무시하고 에스트레드를 끌어안았다. 남편은 아내를 완전히 자신의 품 속에 넣었다. 세리나는 자꾸만 가라앉는 정신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앞길에 방해가 되더라도….제가 전하의 걸림돌이 되더라도.”

여자가 에스트레드의 손을 꽉 잡았다. 결단과 소유욕이 느껴지는 손짓이었다. 에스트레드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저는 이제 전하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주군으로서도 제...남편으로서도.”

“놓지 마라.”

자꾸 까무룩하게 넘어가려는 정신을 붙들면서 세리나가 황자의 말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황자가 아내를 단단히 받쳐 지지하면서 속삭였다.

“나 역시 너를 놓지 않는다. 너도 마찬가지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록 행복한 오전의 공기 속으로 아주 천천히 잠이 찾아왔다. 믿어지지 않는 행복을 즐기려 깨어있기 위해 그녀가 애를 썼지만 부상당한 몸에 찾아오는 수면은 아주 깊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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