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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58화 (58/142)

<-- 비밀 -->                부드러운 미풍이 코끝을 스쳤다. 어딘가에서 달콤한 꽃향기가 나고 있었다. 세리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 풍성한 온기와 향기 속에서 길을 걸었다. 주변이 온통 향기롭고 풍요로웠다.

꿈인가, 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어둡고 추운 곳에서 있었다. 이렇게 따스해진 몸은 오랜만인 것 같았다. 뺨을 기댈 수 있는 단단한 가슴에 안긴 것도…

곧 얼굴을 감싸는 큰 손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여 왔다.

“...정신이 들어?”

세리나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뜨고 있다고 생각했던 눈은 아주 단단히 감겨 있었다. 밝은 햇살 속에서 그녀는 뻑뻑한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올렸다. 천천히 눈 앞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걱정을 잔뜩 담은 은청색 눈동자였다. 그의 아름다운 은발이 아침 햇살을 받아 마치 후광처럼 에스트레드 뒤에서 빛났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은청색의 머리카락은 세리나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오전의 투명한 햇살을 두르고 성자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더듬더듬 손을 뻗어서 남자의 뺨을 만졌다. 매끄럽고 단단한 피부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세리나의 손짓에 에스트레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무래도 손끝이 찼다.

황궁 마법사의 지하공동은 산 밑이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을 확장해서 만들어놓은 공간이라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곳에 거대한 에너지가 터졌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산기슭의 지하에서 살아나오는 것은 아무리 에스트레드라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폭풍의 힘으로 자신과 세리나의 몸을 감싼 뒤 그대로 위로 뛰어올랐다. 무너지는 바위들이 그들을 피해가는 행운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묻혀버렸을지도 몰랐다. 대포처럼 쏘아올려진 두 사람은 무너져내리는 산기슭을 뚫고 나와 그대로 어둠 숲 위를 날았다.

세리나는 에스트레드의 품안에 안겨서 눈을 깜박였다. 아주 천천히 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억들도 서서히 물이 스미듯 뇌리 속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목이 말라서 찢어질 것같았다. 눈치를 챈 에스트레드가 얼른 물컵을 입가에 대주었다. 차갑고 맑은 물이 입 안으로 흘러 목안으로 삼키자 조금 살 것 같았다.

물을 마시고 세리나는 다시 몸을 편안히 뉘였다. 그녀는 팔을 눈 위에 올렸다. 아침 햇살이 밝아서 차라리 이편이 눈이 편했다.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나직한 여자의 목소리가 뭘 뜻하는지 에스트레드는 알고 있었다. 그는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다쳐서 붕대를 감아놓은 왼쪽 어깨가 차가웠다.

“공동 안에 수장되었던 사람들...저는 황후의 아지트를 발견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동굴의 주인은 황궁 마법사 캐딜럿이었습니다, 에스트레드님.”

“그래. 나도 캐딜럿의 얼굴을 보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황제 쪽에서도 오랜 기간 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어. 아바마마는 이미 이상해진 지 상당히 오래되었으니까.”

황제 발렌2세는 젊은 시절 상당한 야심가였다. 이미 그의 부친 발렌1세가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넓혀놓은 영토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역시 발렌1세의 많은 아들들, 즉 자신의 형제들을 숙청하고 제위에 올랐던 발렌2세가 동부와 북부를 잔인하게 제압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스트레드는 희미하게나마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황제는 언제나 로마니엔에 마법사가 적은 것에 의문을 표했다. 몇년 전부터는 제국에 마법 아카데미를 세우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발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라면 좀 더 빠르고 단축적인 계획을 원했겠지.’

마법 아카데미를 세운다고 해도 효과는 몇십년 이후에나 발휘될 것이다. 백년지대계 같은 것은 성격 급한 발렌2세의 취향이 아니었다.

황궁에는 마법사가 극도로 적었다. 황자는 황궁 마법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발렌2세의 구미에 맞출 만한 유일한 마법사인 캐딜럿이 뭔가 꾸미고 있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분명히 두 명 사이에 거래가 있었다. 캐딜럿 역시 나이가 상당히 많은 마법사였으므로 사실 조부인 발렌1세 때부터 일을 꾸몄을 가능성도 있었다. 로마나 황실의 평균 수명은 상당히 짧은 편이고 마법사들은 일반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사는 편이었으니까.

세리나는 그의 품안에서 눈을 들어 황자를 올려다 보았다. 창백한 그녀의 안색이 안쓰러워서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체온을 쟀을 때는 정상이었지만 미묘하게 피부가 차가웠다. 머리의 상처는 다행히 큰 편이 아니고 단지 찢어졌을 뿐인 상처라 이미 거의 아물어 있었다. 세리나가 잠이 든 사이 에스트레드가 신관을 불러 거의 억지를 부리면서 그녀를 고쳐 내라고 떼를 쓴 덕이었다. 찢어진 상처에 신성력을 쏟아부어 급하게 상처를 치료하면서 신관은 황자의 애처가적인 성격에 몰래 혀를 찼다.

“캐딜럿과 견습 마법사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위급용의 워프게이트를 이용한 것 같다.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에스트레드가 뒤늦게 뛰어들어와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키메라에게 능욕당하던 자신을 보지 못해서 세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수치심과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이라도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연못 밑에 있던 사람들은…”

“시체들 말인가?”

에스트레드는 무신경하게 되물었다. 눈이 마주쳤던 경험 때문에 일부러 죽음을 뜻하는 단어를 피해 골라 물었던 세리나가 움찔했다. 황자는 뒤늦게 도착해서 연못 아래를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환영이 에너지를 터뜨리는 바람에 연못의 물이 끓어넘치고 시체들이 튕겨져 올라오는 광경은 보았다. 세리나가 다소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그...환영. 남자의 환영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동부의 마법사들이라구요.”

에스트레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간의 조사를 통해 황후 라일리아 로마나가 동부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스트레드 자신을 집요하게 노리는 그녀의 마수 역시 동부 내란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역시 가능했다. 에스트레드는 내란 출전 당시 힘이 닿는 한 완벽하게 반란을 진압했으니까.

‘제국 측에서야 반란의 진압이지 만약 동부의 사람이 본다면.’

그는 애초에 일부러 역지사지의 정신을 발휘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의 동기를 찾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위치를 바꿀 수 있었다. 동부인들에게 제국과 황제 에스트레드는 갈아죽여도 시원치 않을 철천지 원수일 것이다.

‘하지만 황후가 외부인일 수 있는 건가.’

라일리아 로마나는 황실 방계 가문의 여자였다. 로마나의 성을 지녔다는 것은 방계라도 그만큼 황실의 적통에 가까운 혈통을 지녔다는 뜻이다. 황실의 혈족은 가문과 족보를 통해 완벽하게 관리된다. 라일리아 로마나 역시 에스트레드의 조부 발렌1세의 모친 쪽 가문인 여공작 에레니아의 딸이었다. 대가문의 출신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전쟁터에서 만나 결약을 맺었다고 한들 단숨에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로 조사를 한 족보와 혈연관계도 완벽했다. 고집 세고 완고한 여공작 에레니아는 결코 제국에 흠집이 될만한 일에 동조를 할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아직 많은 것이 추측일 뿐이다. 정보는 많은 것이 좋지만.”

에스트레드는 손끝으로 세리나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금발이 그의 흰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쳤다. 보드라운 그녀의 목덜미에서 청량하고 맑은, 백합 같은 체향이 솟아올랐다. 황자는 아주 오랜만에 맡는 것 같은 아내의 향기에 신경을 느슨하게 놓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세리나는 주변을 떠도는 공기의 향이 바뀐 것을 알아차렸다. 달콤하고 따사로운 공기였다.

하지만 또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직 불안정한 몸이었지만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편안하고 따스했던 에스트레드의 품 안에서 벗어나는 것은 싫었지만 그래야 했다. 세리나는 혼자 일어나 앉아서 에스트레드와 거리를 두었다.

“이제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저는.”

“세리나.”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에스트레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며칠 만에 잠깐 해가 난 참이었다. 쏟아지는 오전의 햇살 속에서 세리나는 석상처럼 앉아있었다. 화려하게 흘러내린 금발과 녹안,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는 정말 조각상 같았다. 일견 생명력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에스트레드는 잠깐 입술을 물었다.

“여쭙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알아, 나중에 다 설명해 주겠다.”

“지금은 안되는 건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제 힘으로 알아내면 되니까요.”

“아직 추측에 불과한 것이 많고, 지금은 네 몸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래. 다 나으면 알게 될 게다.”

“제가 건강할 때도, 시간이 있을 때도 설명해주지 않으셨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많은 것이 궁금했다. 대체 이 일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그와 결약을 맺은 자신의 특질이란 건 대체 뭔지, 황후와 캐딜럿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물밑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인지...

세리나 리엔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나 앉은 에스트레드의 주변으로 은발의 성스러운 후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상황이 될지라도. 이미 너무 오래 전에 붉은 연심이 시작되었고 마음은 그 끝을 모르고 달음박질쳤다. 에스트레드의 미래, 자신의 역할, 때가 되면 물러나기로 했던 결심. 황제가 될 남자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방해가 될 뿐일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없애려고 했던 마음은 이제 더이상 세리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과거 에스트레드의 수호기사였으나, 지금은 그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녀는 더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세리나는 하나만 묻기로 했다.

“제 힘으로 알아낼 수 없는 질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전하. 그건 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 뭐지?”

“저를 사랑하십니까?”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직선으로 답을 요구하는 여자가 이번엔 그를 향해 답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대답을 거절하지 않았다.

에스트레드는 손을 뻗어 아내를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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