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55화 (55/142)

<-- 비밀 -->                페로몬, 체향이라 불리는 것은 인간의 특질을 압축해서 나타내는 특성이다. 보통 성적인 결합에 작용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사실 인간의 정수에 더 가깝다. 황족들만이 가지고있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고 다만 로마나 황족의 페로몬이 매우 특수한 계열이며 강할 뿐이다. 마법사나 의술사들의 연구도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지만 아직은 미지의 세계에 가까웠고 황궁 마법사 캐딜럿은 거기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인간의 예의범절로 페로몬은 워낙 개개인의 성적 취향에 연관되어있어 내놓고 말할만한 부분은 아니었다. 연구를 위해 황궁에 머물면서도 캐딜럿은 로마나 황족들의 페로몬에 대해 제대로 묻거나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황족들의 페로몬 특성을 연구할만한 샘플들은 여럿 얻을 수있었고 다른 이들보다는 훨씬 앞선 연구를 진행했다. 황족들을 제외한다면 캐딜럿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세명이었다. 레이디 휘에리, 레이디 도나 누앤, 기사 세리나 리엔.

그 자신이 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후각을 이용해 그 세명의 향기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다소의 친분이 있었던 클리스 로마나의 말에 의하면 분명 어딘가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얻는 데 성공한 것은 레이디 휘에리의 머리카락 샘플 뿐이었다. 도나 누앤은 레드포 로마나의 궁에서 아예 나오질 않았고 세리나 리엔은 곁에 다가갈만하면 에스트레드가 기묘한 눈길로 바라보며 싸고 돌았기 때문이었다.

‘어쩐 일로 저 여자가 여기 온 거지…’

캐딜럿은 초조함과 기대감에 손을 비볐다. 지금의 자원 지원도 당연히 공짜로 받는 건 아니었다. 황제 발렌2세가 젊은 시절 이미 그에게 요청했던 연구의 대가로 받는 것이다. 아직도 그리 제대로 된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곳 실험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구는 이미 몇십년 째 계속되고 있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남에게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연구라면 이렇게 어둠숲 깊은 곳 지하에 꼭꼭 숨어서 할 리가 없다. 캐딜럿은 불안하게 위를 올려다 보았다. 태평하게 대화를 받아주는 세리나 리엔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아직 수면 밑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역시 저 위쪽 출구에서 빛이 비치는 수면을 뚫고 그 밑을 알아보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캐딜럿은 발 밑의 연못을 흘긋 내려다 보았다.

수면 밑에서 푸른 인간의 얼굴이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 멍청이들이 빨리 저 여자를 잡아와야 할 텐데.’

여자라도 기사 출신이다. 잡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알아서 견습들에게 포박의 주문을 알려주었다. 셋이나 올려 보냈으니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실험의 결과로 상당히 마력이 강해진 이들이었다. 견습이라고 데리고는 있지만 사실 마력 자체는 캐딜럿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부족한 것은 마법 자체를 다루는 섬세함일 뿐.

캐딜럿은 세리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리엔 경, 내 견습들이 늦는군. 수련생들이라 아무래도 모든 게 서툴거든.”

“아-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 가만 계시오. 내가 올라가지.”

빌어먹을, 내가 왜 비상 마법의 즉석주문을 배워두지 않았지? 캐딜럿은 속으로 불평을 삼키면서 캐스팅을 시작했다. 원래 마법의 주문은 길고 복잡하다. 전쟁에서 주로 활동하는 워록과 워위치들은 즉시 발동이 가능한 전투 특화 주문들을 여러개 발명하여 지니고 다녔다. 물론, 그 주문들에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비밀로 여겼다. 캐딜럿이 여태까지 배우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위에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 고함과 비명이 난무했다. 캐딜럿을 주문을 외우느라 속으로만 욕설을 중얼거렸다. 간단한 비상 마법이라도 그가 거의 쓰지 않는 마법의 분야인지라 캐스팅이 오분 이상 걸린다.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수인을 맺고 주문을 외우는 중간, 위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중에 주문을 멈추거나 집중력을 흐트릴 수 없는 마법사는 짜증스럽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견습 중 한명이 비명을 지르며 출구 밖으로 밀려나 높은 공동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떨어져 내린 바닥으로 구름 먼지가 일었다.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한층 더 초조해진 캐딜럿의 주문이 빨라졌다. 저 견습 마법사들은 일반수련생이 아니다. 그가 피를 깎는 노고를 통해 만들어낸 연구의 결과로 도출한 결과물들인것이다. 한명 한명이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가 거의 주문을 끝낼 무렵 또 한명이 비명과 함께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분노에 찬 노호성을 지르며 마법사가 공중에 몸을 띄워 출구로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출구로 올라가 본 통로 안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결박 마법은 절반만 성공했는지 세리나 리엔의 왼쪽팔이 묶여 뒤로 돌아가 있었다. 가벼운 드레스만을 입은 여자의 한 팔과 두 다리가 완벽한 씨름기술을 펼쳐보이며 견습 마법사의 목을 조였다. 출구로 날아오른 캐딜럿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세리나는 상대의 숨통을 조인 다리에 힘을 주었다. 기어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질식으로 인해 견습 마법사가 정신을 잃었다. 아직 새파란 어린애라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 죽지는 않았을것이다.

‘...라고는하지만, 캐딜럿의 실험실에서 벌써 세명째 죽이는군.’

고블린까지 ‘명’이라고 쳐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종인듯 했으니 별로 잘한 짓은 아니다. 그러나 세리나는 무작정 자신에게 결박 마법부터 던지고 깔아뭉개려는 견습 마법사들에게 그냥 당해줄마음은 없었다. 상대가 정신을 잃자 마법도 힘을 잃어 꺾였던 왼쪽 팔이 풀려났다. 애초에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던 어깨가 욱씬거려왔다. 붕대를 감아놓은 상처 부위에서 차가운 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거칠군, 리엔 경.”

“거칠기는 마법사님의 손님 대접이 더 거치신듯 합니다.”

세리나는 차갑게 말하면서 다시 나무 몽둥이를 손에 쥐었다. 이따위 몽둥이로는 마법사에게 대항하기 힘들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황궁 마법사는 두명의 사망자와 한명의 부상자가 나온 현장을 보면서 눈을 불태웠다. 소중한 연구 자산들이 망가졌다는 사실에 마법사가 노호성을 질렀다.

“잘도 내 제자들을 죽였어, 여기사여!”

문답무용이다. 제대로 된 대화가 될 리 없다는 판단 하에 세리나는 나무 몽둥이에 기를 실어 그대로 허공에 뜬 마법사에게로 던졌다. 워록 출신이 아니라 즉각적인 대응에 느린 캐딜럿이 허둥대며 실드를 올렸고 습기를 머금은 나무 몽둥이가 세리나의 검기를 담고 산산히 부서져 나갔다. 시야가 가려진 순간 그녀는 바닥을 박차고 뒤로 달렸다. 코너만 돌면 꽤 긴 통로다. 하지만 비상 마법에 능하지 못한 캐딜럿이 통로 내에서도 바람을 유지해야 하는 비상 마법으로 날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늙은 마법사의 느린걸음 따위는 얼마든지 이길 수있었다.

“거기 기다려…!”

분노에 찬 외침을 뒤로 하고 세리나가 코너를 도는 순간, 눈 앞에 거대한 덩어리가 나타났다. 채찍같은 줄기가 뻗어와 여자의 흰 발목을 휘감고 들어올렸다. 세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차냈지만 다시 더 뻗어온 줄기들이 그녀의 사지를 결박했다.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녹색의 덩어리를 보고 세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줄기에 휘감긴 팔목과 발목이 채찍에 맞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아팠다.

“...잘했다, 잘했어.”

그 뒤로 캐딜럿이 헐레벌떡 뛰어와 녹색의 덩어리를 쓰다듬었다. 뭉글거리는 형체 없는 덩어리가 그에게는 얌전하게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그가 손수 키워낸 키메라였다. 공중에 매달린 채 얼굴이 시뻘개진 세리나를 향해 캐딜럿이 웃었다.

“정말 말썽꾸러기로군. 어떻게 결계로 숨겨진 입구를 뚫고 들어올 수가 있었지?”

늙은 마법사는 그 짧은 거리라도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잠시 골랐다. 뭔가 말을 꺼내려던 세리나의 입이 녹색 줄기로 막혔다.

“시끄러워, 아무 소리도 하지 마라. 그렇게나 정성을 들여 키워낸 견습들이 둘이나 죽었어.”

캐딜럿은 화를 내며 녹색의 키메라를 이끌고 출구 쪽으로 향했다. 그는 또 한참 비상 마법의 주문을 외운 뒤 공동의 바닥에 세리나를 매단 키메라와 함께 안착했다.

“정말...이 나이에 달리기를 하게 만들다니.”

캐딜럿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도 섞여 있었다. 그가 오랜 시간 탐내 오던 샘플 중 하나인 세리나 리엔이 손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마법사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기뻤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그녀를 쳐다봤다.

“여기 누가 보낸 거지? 리엔 경. 에스트레드 전하이신가? 대답해봐라.”

입을 막아놓고 대답하라니 속이 터져서 세리나는 손가락 끝으로 간신히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마법사가 손을 들자 키메라가 스르륵 줄기를 풀어냈다. 간신히 자유로워진 입가와 욱신거리는 뺨 근육을 움직이면서 황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 에스트레드 전하께서 저 밖에 근접해 오셨지요. 저를 찾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셔서요.”

“...가만두지 않겠다고?”

“실은 전하의 심기를 건드려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도망친 터라…”

“도망친 거라고?”

마법사는 정상과 광인 중 광인에 좀 더 가까운 자다. 세리나가 여기서 잘못 대답을 했다간 견습 마법사들을 죽인 죄를 톡톡히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열심히 말을 골랐다.

“반드시 저를 찾겠다고 전하께선 다짐 또 다짐을 하셨다는군요. 사지가 멀쩡한 채로 찾아주는 자에게 거액의 상금을 내리겠다고도 하셨구요.”

“거액의 상금이라…”

“여기 들어오기 직전까지 제 뒤에 바짝 따라붙었으니 지금쯤 아마 거의 찾아내셨을 겁니다.”

제1황자 에스트레드 로마나는 같은 황궁의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캐딜럿 역시 에스트레드를 몹시 꺼려했다. 불편하고 공포스러우면서 적대하고 싶지 않은 자.

에스트레드가 여기를 모른다고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이 자리에서 세리나는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황자가 그녀를 찾고 있고, 그녀를 돌려주면 캐딜럿이 오히려 상을 받게 될 거라고 그를 꼬이려 애썼다.

캐딜럿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치지만 않는다면 된다는 것이지...나 역시 전하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럼요, 물론…”

“다치지는 않을 테니 그 입 다물고 있어라.”

...잠깐.

캐딜럿이 키메라에게 손짓과 짧은 주문으로 명령했다. 키메라에게서 녹색의 촉수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와 세리나의 몸에 빨판을 내어 달라붙었다. 많은 줄기들이 드레스 밑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깨닫고 그녀가 경악했다.

마법사는 전혀 성적인 욕구가 없는 담백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연구 샘플을 채취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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