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54화 (54/142)

<-- 비밀 -->                무서울정도로 긴 동굴이었다. 길은 자꾸 내리막으로 이어져 아래로 향했다. 공기 중 떠도는 희미한 빛의 입자들로 눈앞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밝은 것도 아니다. 사람 셋이 지나갈만큼 좁지 않은 동굴 안은 걸어갈수록 습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간혹 작은 박쥐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스치고 낮게 날아갔다. 머리는 대충 꼬아서 묶어버렸지만 젖은 옷을 입은 몸이 추워서 자꾸 떨렸다. 세리나는 손에 쥔 나무몽둥이를 고쳐잡으면서 조심스럽게 코너에 몸을 숨기고 꺾어지는 부분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로 희미한 빛이 조금 더 강해진 출구가 보였다. 넓고 밝아보이는 것이 외부로 향하는 듯 했다.

그녀는 바닥 쪽에 서 있는 난쟁이 같은 녹색의 존재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고블린?’

원래 동굴에 사는 종족이다. 하지만 고블린은 떼로 다니는 군락생활을 한다. 상당히 긴 동굴을 지나왔는데 이 깊은 쪽에서 한마리를 발견한다는 건 좀 희한한 일이었다. 만약 이곳이 고블린의 군락지라면 입구부터 보초를 선 고블린이 가득해야 했다. 심지어 저 고블린은 멋진 은쟁반까지 들고 있었다.

그녀는 고블린을 제외하고는 굴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미처 세리나의 기색을 알아채지 못한 고블린의 긴 귀 뒤쪽을, 여자는 사뿐하게 잡아 바닥에 쑤셔박았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목을 조르면서였다. 은쟁반이 굴러 떨어지며 바닥으로 굴러갔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고블린의 힘이 예상 외로 세서 그녀는 그대로 고블린의 목뼈를 부러뜨렸다. 퍼걱하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의 목구멍 속으로 단말마의 비명마저 삼켜졌다. 손을 떼자 늘어진 녹색 시체가 경련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자 옆쪽으로 고블린이 다니는듯한 사람 키 절반만한 통로가 보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블린의 시체를 옆쪽 갈라진 통로 사이에 밀어넣고 돌을 주워 최대한 숨겼다.

세리나는 다시 몽둥이를 주워들고 조심스럽게 출구로 다가갔다. 울퉁불퉁한 끄트머리에 몸을 구부려 숨기고 그녀는 눈만 내밀어 밖을 바라보았다.

‘...밖이 아니잖아?’

조금 밝아서 밖으로 이어지는 출구라고 생각했던 곳은 예상 위로 지하의 거대한 공동이었다. 땅 밑에 이렇게 거대한 공간이 있나 싶을만큼의 공간이었다. 밑에는 푸른 물이 고인 호수와 그 물들이 흘러들어간 연못들이 여러개였다. 호수에도 연못에도 전부 수면 밑으로 뭔가 흐릿한 그림자들이 보였다. 그녀는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찌푸리다가 연못 옆에 서있는 사람 몇명의 모습들을 보고 그 얼굴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 중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세리나는 눈썹을 모았다.

‘...캐딜럿님?’

분명히 그였다. 흰머리, 흰 수염, 주름진 얼굴과 반대로 강건한 몸. 황궁마법사 캐딜럿. 로마니엔 황실에서, 황후를 제외한다면 유일한 마법사였다. 그의 아래에 있는 견습 마법사들은 아직 실제 상황에 나설 수 있는 진짜 마법사는 아니었고, 몇명의 워록과 워위치들이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식석상에 나서는 일은 없었으니까 유일하다는 말이 맞았다.

캐딜럿은 주변 로브를 입은 남자들에게 지휘를 하면서 바삐 뭔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지시를 받은 남자들이 연못으로 시약병에 담긴 액체들을 붓거나 하면서 지시를 따랐다.

‘하지만…’

세리나는 인상을 썼다. 분명히 그녀는 여기서 뭔가를 발견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황후에 대한 것이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대표적인 반 황후파 인물인데…’

황궁 마법사 캐딜럿은 제국 유일의 마스터급 마법사다. 연구에 미친 마법사답게 전투에는 능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빼어난 학문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괴팍한 성격의 그가 황실의 일원으로 합류한 것은 황제 발렌2세와의 인연과 더불어 그 연구의 자유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에도 반쯤 미친 꼴로 황궁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을 정도로 괴팍한 노인이었다. 그는 황후를 처음부터 끔찍하게 싫어했다. 어째서인지는 말하지 않고 그저 싫어할 뿐이었다. 세리나는 그게, 사실 여자인 라일리아 로마나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캐딜럿의 아집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캐딜럿님이라면 명확한 황제파다. 황자들 사이에선 누구의 편도 고르지 않았던.’

연구에 모든 자원을 지원받는 황궁 마법사의 자리를 떠나지는 못했지만, 황후가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 캐딜럿은 황실 공식 행사에 아주 가끔씩만 얼굴을 내보였다. 최근 몇년간은 그조차도 없을 만큼 거의 은둔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여긴 황후가 아니라 캐딜럿님의 실험실이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게 말이 된다. 공중에 떠도는 빛의 입자들도, 마치 사람을 시중드는 것처럼 보였던 은쟁반을 든 고블린도. 세리나는 맥이 탁 풀렸다. 황후의 아지트일 줄 알고 잔뜩 긴장한 채 조심조심 걸어온 것이 어처구니 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큰 소리를 내서 캐딜럿에게 인사를 하고 도움을 청할까 하다가 자신이 죽인 고블린에 생각이 미쳤다. 괴팍하고 거의 미친 게 의심되는 지경인 마법사가 상대다. 혹시라도 저 고블린이 캐딜럿의 중요한 실험체였다거나 한다면…

세리나는 잠깐 고민하면서 밑의 캐딜럿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 뭔가를 감지한 것처럼 마법사가 고개를 쳐들고 정확하게 세리나 쪽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면서, 그가 무언가를 지껄였다. 갑자기 발각당해 세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멋대로 자신의 실험실에 침입한 침입자를 향해 캐딜럿이 소리를 지르면서 손가락 끝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세리나는 자신의 목소리가 충분히 크기를 바라면서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캐딜럿님! 저 세리나 리엔입니다!”

“뭐?”

흰 머리의 마법사가 뭔가 주문을 외우려다 멈췄다. 저 멀리, 시중을 드는 고블린들을 위해 뚫어놓은 작은 출구 쪽에서 나타난 금발머리의 여자가 다시 한번 외쳤다.

“세리나 리엔입니다! 저,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만…”

그녀는 뭔가 찔려서 돌무더기에 숨겨놓은 고블린의 시체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제가 길을 잃어서요!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리나 리엔? 제1황자의 수호기사 말인가?”

“예에...그 이후에 직위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습니다마안…”

캐딜럿은 연구만 생각하는 괴팍한 마법사다. 은둔한 지 벌써 몇년 째라 그녀의 소식을 모르는 게 당연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서 세리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황자의 수호기사가 왜 여기에 와 있나!”

“침입은 죄송하지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소리를 질러서 대화를 하려니 벌써 목에 무리가 오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는지 캐딜럿이 고개를 젓다가 다시 외쳤다.

“거기서 기다리고 계시오! 모시러 올라갈테니!”

공동 밑에서 황궁 마법사는 견습에게 그녀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견습은 바삐 공동의 벽에 뚫려있는 수많은 통로 중 하나로 사라졌다. 올라오는 뭔가 다른 길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 일인지 세명이 한꺼번에 달려서 사라졌다.

황후의 아지트가 아니라서 아쉽긴 했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 그녀에겐 롱소드도 나이프도 동료도 아무것도 없었다. 캐딜럿은 괴팍한 인종이긴 했지만 제1황자의 수호기사로서 안면이 있는 그녀를 홀대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방랑자의 마을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것이 분명했다. 다만, 죽은 고블린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하겠지만.

멋대로 뛰어나오긴 했는데 이 빗속에서 돌아갈 길이 걱정이던 세리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부끄러움의 한숨을 쉬었다. 분노는 찬비에 이미 식어버린 것 같았다. 에스트레드의 얼굴을 다시 보아야 하는데 생전 처음 그에게 화를 내고 뛰쳐나온 터라 어떻게 대해야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견습 마법사가 올라오길 기다리면서 밑을 구경했다. 캐딜럿은 그녀를 주시하면서 말을 걸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소?”

그새 마법을 썼는지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마법이란 편리하군, 하면서 세리나가 답했다.

“방랑자의 마을에 왔다가 나오는 길에 길을 잃었습니다. 우기에 어둠숲이라, 길을 제대로 찾는 게 이상하죠.”

그녀의 대답 소리도 똑같이 편안하게 넓은 공동을 울리며 캐딜럿에게 전달되었다. 캐딜럿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서 기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세리나는 다소 이상한 기분이 되어 황궁 마법사의 발밑 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공동의 밑바닥에 깔린 수많은 연못들 위로 마법구들이 인공적인 빛을 냈다. 수면에 밝은 빛이 비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녹색이 깔린 연못 밑으로 언뜻언뜻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 형체를 인식하고서 눈을 찌푸렸다.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다시 확인해도 분명히 맞았다.

연못의 밑에 누운 형체들은 인간이었다. 순간 그녀의 왼쪽 손가락에 앉은 평범한 반지에서 작은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

“...찾아냈군.”

혼자 앉아 책을 읽던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빛을 잃고 있던 그녀의 검은 눈이 또렷해져 있었다. 황후의 앞으로 둥근 원이 생겨나 황궁 마법사 캐딜럿의 얼굴을 떠올렸다. 라일리아는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셀 수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원한들. 적대감. 증오. 캐딜럿에게 향한 것은 아니다. 그같은 조무래기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사실 특정한 상대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굳이 따지자면 로마니엔 그 자체. 평생을 걸어온 분노.

황후가 일어나서 지도를 펼쳤다. 허공 중에 넓은 지도가 펼쳐져 고정되었다. 그녀는 깃털펜으로 캐딜럿의 실험실 위치를 표시했다. 라일리아 로마나의 지도에는 어둠숲에 흩어져 있는 여러개의 방랑자의 마을이 섬세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 외에도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여러 지형들이 전부 명확히 그려졌다. 황후는 캐딜럿의 실험실을 표시하고 나서 뒤로 물러섰다. 지금 당장 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동족은 이미 전부 살해당했을 테니까. 한명이라도 구해낼 거라는 생각은 이미 예전에 버렸다.

라일리아 로마나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자신의 앞 허공에 생겨난 둥근 원을 어루만졌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세리나에게 끼워놓은 반지는 예상 외의 효과를 얻고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냥개야. 세리나 리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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