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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52화 (52/142)

<-- 비밀 -->                에스트레드는 세리나를 촌장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비에 푹 젖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세리나를 보고 황자가 바깥을 향해 여분의 옷을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그는 다소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재주도 좋군. 물론 직접 알아낸 건 아니고, 밀렌을 구슬렀겠지만.”

“....”

“왜 여기까지 쫓아온 거지?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움직일 때는 다 이유가 있어서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하지만이야?”

에스트레드는 혀를 찼지만 손은 데워놓은 티포트에서 차를 따르고 있었다. 세리나는 그 찻잔을 받아 따스한 찻물을 조금 머금었다.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비에 푹 젖고 어둠숲의 한기에 노출되었던 몸은 차가웠다. 따뜻한 차 한잔에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내 수호기사로 지낸 십년 동안 날 그렇게나 몰랐나?”

하필 위험한 순간에 전투에 뛰어든 세리나 때문에 에스트레드는 약간 화가 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수호기사로 지내는 내내 그가 그렇게 예민했던 것은 언제나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막아내야 하는 세리나의 위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곁에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이 수호기사라는 위치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녀를 그 자리에 기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에스트레드님.”

세리나는 반복해서 말했다. 옷의 조달이 늦어지자 황자가 벽난로의 불을 좀 더 키우고, 그녀를 불 앞으로 데려가 작은 담요를 어깨에 덮어주었다. 세리나 역시 비에 흠뻑 젖은 기사단 정복을 부츠부터 벗어냈다. 빗물이 초라한 나뭇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저는 단지 에스트레드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궁금해서…”

“궁금해하지 마라. 때가 되면 다 알려주니까.”

황자가 문간에서 세리나의 옷을 받아왔다. 어쩐지 그가 시중을 들어주는 황송한 기분에 황자비는 얼른 옷을 받아들고 갈아입으려 했다. 에스트레드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 한숨을 쉬었고,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자에게 우물쭈물 뭔가 말하려고 했다. 황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옷도 갈아입혀줘?”

“저, 저...그게 아니라...좀 돌아서 주시면…”

“뭘 새삼스럽게 난리야. 볼 데 안볼 데 다 본 사이에.”

에스트레드는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돌아서 주었다. 창문에 꼼꼼하게 커튼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리나는 그가 돌아선 사이에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이곳의 여인이 입는 옷인듯 간소하고 깨끗한 무명 드레스였다. 함께 온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고 옷을 입은 후 돌아서자 에스트레드는 이미 똑바로 서서 그녀를 구경하고 있었다. 세리나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자신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에스트레드님!”

“음, 무슨 큰일이라고 큰 소리야.”

에스트레드가 한쪽 눈을 찌푸리고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아무래도 놀리는 듯한 그의 태도에 세리나는 괜히 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피부 상한다.”

에스트레드의 손이 수건을 빼앗아 얼굴 위를 조심히 톡톡 두드려주고, 올린 머리를 풀러 말려주기 시작했다. 그녀를 앉히고 뒤에 서서 그는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끝부터 두피까지를 꼼꼼히 물기를 제거했다. 여전히 축축한 머리카락을 만지며 그가 혀를 찼다.

“이곳은 워낙 열악해서 간단한 목욕도 하지 못해. 더구나 이런 빗줄기 속에서는...대충 말리고 빨리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야겠군.”

“아죠, 괜찮습니다 에스트레드님. 이 정도야…”

“뭐가 괜찮아. 습기차고 개운치 않지.”

아무래도 에스트레드는 그녀가 삼년 동안 전장에서 구른 군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했다. 그때는 비가 오면 샤워 잘 했다 하면서 옷을 최소한으로 입고 일부러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습하고 더운 지대이긴 했지만 진짜 쏟아지는 장대비는 얼마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귀했던 것이다. 그 점을 지적하려다가 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에스트레드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황자는 새로운 수건을 들어 마지막으로 세리나의 어깨에 걸쳐주고 다시 팔짱을 꼈다. 열심히 세리나의 머리까지 말려줬으면서 눈빛이 차가웠는데, 세리나는 어쩐지 그 점이 좀 귀엽게 느껴졌다. 주군에게 느껴지는 귀엽다는 감정이 무척 낯설고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에스트레드는 진지한 얼굴로 아내의 양 어깨를 잡았다.

“다른 상대라면 뛰어들어도 별말 안해, 하지만 마수가 상대다. 게다가 이곳은 어둠숲. 지난번에 내가 마수의 공격에 당해 어떤 상태가 됐는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하지만, 케린 모나칸과 황궁 기사들이 수세에 몰리는 걸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습니다.”

“적을 잘 파악해라, 세리나.”

황자가 그녀의 녹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수가 우리의 적이지만, 인간이라고 해서 우리의 아군은 아니다. 케린 모나칸은 황후의 사람이다.”

“....”

“지금 이곳은 옷의 색과 깃발로 피아를 구분할 수 있는 전장이 아니야. 그보다 훨씬 교활한 싸움이다.”

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비록 황후의 편에 서있기 때문에 케린 모나칸과 친근하게 말을 나눈 적은 없을지라도 그녀는 케린을 기사로서 인정하고 있었다. 케린 모나칸은 부친을 따라 군에 입대했고 철저히 기사도에 따르는 자였다. 여성의 대외활동이 많지 않아 여성 군인은 거의 없는 로마니엔에서 세리나와 더불어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여기사였고, 서로 가깝지는 않아도 존중하는 사이였다. 높은 귀족가문 출신이라 다소 오만한 편이었으나 그만큼 대가 곧고 성정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에스트레드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효율에 따라 움직이는 남자였다.

“...모나칸 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집 하나를 비워 그 수하들과 함께 치료를 해주라고 했다. 지금 충분히 시중을 받고 있을 게다. 문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겠지만.”

말하자면 치료를 빙자한 구금이다. 사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에스트레드로서는 지금 이 시점에 당도한 세리나가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를 고문하여 정보를 얻은 뒤 그대로 목숨을 거두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어차피 마수에게 쫓겨들어와 다같이 죽을 판이었으니 그들의 죽음을 은폐하는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세리나가 와버렸으니…’

에스트레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다른 이들의 평판이나 눈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단 한명, 세리나 리엔만은 예외였다. 황자비는 다소 침울하게 말했다.

“그 동안 말없는 외출이 잦으셨던 게 마수와 관련이 있었던 겁니까?”

“....”

“말씀을 해주셨다면 제가 미약한 힘이라도 보탰을 텐데요. 저도 이유가 알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더이상 수호기사가 아니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힘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동안도 필요 없는데, 다른 쓸모를 위해 수호기사의 자리를 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리나는 아주 조금쯤은 거기에 자신에 대한 호감이나 관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에스트레드는 딱 잘라 말했다.

“네 힘은 필요없어. 나와 밀렌 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거느린 기사들 역시 뛰어나니까.”

“하지만 에스트레드님...저는...”

“네게는 네 역할이 있어.”

차갑고 딱딱한 말투였다. 그동안 에스트레드가 자신을 특별하게 대한다고 생각했던 건 전부 자신의 환상이었을까. 몸을 섞고 결약을 수차례 강화하고 매일같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들 속에서 느껴졌던 따스한 감정들은. 세리나는 침을 삼켰다.

“넌 황자비 역할로 황자궁에 앉아있으면 돼, 이런 곳에 나다니지 말란 말이다.”

“...”

“네 역할을 잊지 마라.”

순간 세리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숲속에서의 사고 이후 쌓이고 쌓인 화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에스트레드의 명에 이끌려 앓았던 가슴앓이가 불러온 화.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안에 이미 새싹처럼 자라난 욕심을 거부할 수 없었다. 기사로써 주군의 명에 복종하여 전략적 반려가 되어 그의 제위계승에 필수적인 장기말이 되려던 생각,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폐위된 반려로서 먼 곳으로 도망가려던 생각. 모든 것이 그 욕심으로 인해 전부 제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리나는 간소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그녀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목구멍으로 울컥하는 게 올라오는 걸 삼키면서 그녀가 에스트레드를 노려보았다. 녹색눈이 분노로 활활 타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보고 에스트레드는 속으로 움찔했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세리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에스트레드를 향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분명히 세리나는 그에게 불처럼 화를 내고 있었다.

“대체 저는, 에스트레드님께 뭔가요?”

금발의 황자비는 치마를 움켜쥔 채 은발의 황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황자는 잠시 침묵했다.

“예, 전하의 신하이자 수호기사인 세리나 리엔입니다. 그리고 반려의 역할이지요. 계승식까지만 예정된.”

“세리나, 그건…”

“총사령관이신 전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요. 제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세리나는 숨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한번 터진 분노가 자꾸만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녀는 더이상 견디기가 힘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전하. 신 세리나 리엔, 명 받들겠습니다.”

“....이봐, 세리나.”

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세리나는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초가 밖으로 나왔다. 간신히 말리고 따뜻하게 데웠던 몸 위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드레드가 급히 다가와 그녀에게 우산을 씌웠지만 그것을 치워버리고 세리나는 자신의 흑마 위로 올랐다. 치마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말에 올라탄 그녀는 말리는 하드레드를 뿌리치고 그대로 어둠숲으로 달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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