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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51화 (51/142)

<-- 비밀 -->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금속성의 쨍하는 소리들에 에스트레드는 문을 열었다. 밀렌 바스트 대신 데려온 세리나의 부관 하드레드가 얼른 그의 어깨에 망토를 가져다 덮었다. 나머지 호위병과 기사들이 천막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급히 정렬했다.

“무슨 일이지?”

“모, 모르겠습니다. 마을 바깥으로 기사로 보이는 몇몇이 들이닥쳤는데 아무래도 마수를 끌고 온 것 같은데...누군지는…”

“쯧.”

조용히 다니면서 모든 정보를 품고 있는 밀렌에게 익숙해져 있는 에스트레드는 자꾸 말을 더듬는 하드레드가 못마땅해서 혀를 찼다. 덩치 큰 청년은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황자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은발을 뒤로 넘겨 다시 묶었다.

어둠 숲 이 깊은 곳의 버림받은 마을까지 일부러 찾아올 기사들은 많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이곳 방랑자의 마을은 지도에조차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으니 호기심 많은 여행자가 일부러 들를 일도 없었다. 짐승과 괴수에게 쫓기다가 반시체꼴로 마을에 들어서는 자들이야 간혹 있었으나.

촌장의 집 주변으로 그를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의 음습한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 버림받은 마을에 들어선 낯설고 강한 자 때문에 다들 숨어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드레드가 급히 우산을 받쳐들었다. 에스트레드는 비를 맞으며 여전히 울고 있는 노인의 곁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앞니가 다 빠진 노인이 무릎으로 기며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당신, 당신 높은 분이잖소, 그렇지?”

비가 고여 진흙탕이 된 마당 가운데서 에스트레드는 노인을 내려다 보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더러운 얼굴로 노인은 입을 동굴처럼 벌렸다. 그는 손에 껴안고 있던 셔츠 조각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마수의 검붉은 피로 뒤범벅이 되었지만 원래의 색과 질감은 알아볼만한 정도였다. 에스트레드가 누구인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흐린 잿빛 머리카락의 촌장은 가만히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방관했다. 그는 기민한 자였으나 동시에 필요 없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도 했다.

“....”

귀찮아진 에스트레드가 발을 걷어차기 전 노인이 셔츠자락을 그의 손에 밀어넣었다.

“내, 내 아들이요, 내 아들이 맞아. 이건 내 아들…”

늙은이의 목소리에는 당황과 분노와 증오가 동일한 양으로 섞여들었다.

“먹을 걸 구해 온다며 나간 내 아들이란 말이야! 네놈이 죽였어!”

그가 발광하면서 진창인 바닥에 뒹굴었다. 그 와중에도 차마 에스트레드에게 덤비지는 못하는 모습이 이 방랑자의 마을에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버림 받은 마을에 살며 먹을 것을 벌러 나간 아들은 마수로 변이하여 척살당한, 불쌍하고 불행한 부자. 아마도 저주받았을 인생들.

하지만 그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이 마을은 방랑자의 마을. 감옥에서 탈출한 범죄자와 잡히지 않은 범인들, 다른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상이군인들, 고아와 노인과 모든 인간들이 섞여 있는 곳이라는 사실. 그 범죄자들 중에는 연쇄살인마와 나라를 망하게 한 배신자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그걸 전부 구분해서 다스릴 것인가?

“...귀찮군.”

에스트레드는 비에 젖어 자꾸만 뺨에 붙는 푸르스름한 은발을 떼어냈다. 아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는 것이 강도질을 하러 나갔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 아비가 입고 있는 옷도 지나는 자를 죽이고 뺏은 것일 수도 있다. 이 마을의 실정 상 거의 그렇다고 보는 게 맞았다.

노인의 발광을 말리러 다가온 촌장이 비에 푹 젖은 잿빛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웃었다. 그의 흐린 적색 눈이 안광을 발했다.

“이해해주십쇼, 아들이 죽은 아비의 심정이란 것이…”

“....”

“황자 전하께서 은화 한닢이라도 집어주신다면 이 노인이 금방 조용해지겠습니다만...부디 자비를. 워낙 먹고 사는 것이 힘든 동네다 보니까요.”

황자는 비굴하게 웃는 촌장을 내려다보면서 잠깐 고민했다. 이대로 노인과 함께 베어버릴까.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었다. 민간인 희생을 싫어하는 세리나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가 살인충동을 억제하는 일은 상당히 드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생각하며 손을 진정시켰다. 로마나 황실의 피에는 언제나 강한 피와 함께 그보다 더 심한 충동과 폭주의 기질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그보다...주군. 바깥의 마수에 기사들이 많이 몰리고 있는 듯 합니다.”

하드레드가 조심히 아뢰었다. 어둠숲에 들어와서는 말을 조심하라는 에스트레드의 명을 잊지 않고 그는 황자라든가 전하라는 경칭을 생략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멍청하고 아둔한 놈들이군. 약한 자들이 몰려 있는 마을 쪽으로 마수를 끌고 오다니.”

에스트레드가 혀를 찼다. 만약 감당이 안된다면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고, 건드렸다면 이겨야 했고, 이기지 못한다면 감싸안고 함께 죽기라도 해야한다. 싸우는 자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마을 쪽으로 치명적인 적을 끌고 도망오는 것은 모두 같이 죽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약자들은 약자 나름의 기능이 있으므로, 가능한 많이 살아남는 편이 전쟁에서는 언제나 유리했다.

황자는 피곤한 한숨을 쉬고 하드레드가 받쳐든 우산을 손으로 제쳤다. 그는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전부 발밑으로 끌어모아 얼음 폭풍을 만들며 그 위로 몸을 날렸다. 불과 두세걸음만에 마을 바깥에 당도한 그는 마수와 싸우고 있는 여기사를 보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케린 모나칸?”

그는 가볍게 높은 나뭇가지 위에 내려섰다. 밑에서 케린 모나칸과 그녀의 수행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마수에 대항하고 있었다. 황후의 수호기사이자 세리나의 라이벌로 거론되던 여기사.

‘황후 쪽에서는 꽤 노골적으로 여기를 드나들었던 건가.’

황후의 최측근이다. 비록 밖으로 나서지 않는 그림자 같은 자리라지만 귀족 중에서 황후의 수호기사를 몰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자가 이곳 버림받은 마을까지 수행원들을 이끌고 오다니.

에스트레드는 가만히 발밑의 전투 광경을 굽어보았다. 일반인의 여덟배가량 되는 덩치의 고양잇과 맹수같은 형태를 한 마수였다. 마수의 특징적인 새카만 눈빛이 번뜩였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브레스가 터지고, 검은 독가스로 된 브레스에 직격으로 맞아 수행기사와 케린이 동시에 비틀거렸다. 마수가 그중 하나를 물어올렸다.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짐승의 거대한 송곳니에 목을 꿰뚫린 사내가 절명했다.

그 순간 싸움 속으로 또다른 인영이 뛰어들었다. 눈에 익숙한 화려한 금발 머리.

“세리나?”

에스트레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왜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난단 말인가.

금발의 여기사는 케린 모나칸에게 육박하는 마수의 발톱을 롱소드로 막아냈다. 챙강하는 소리와 함께 발톱이 세리나의 롱소드와 충돌한 찰나 금발의 여기사는 그대로 소드 오러를 폭사시켰다. 새파란 검기가 마수의 손톱 사이, 앞발의 살을 자르고 지나갔다. 너덜해진 앞발을 들고 물러서며 마수가 고통에 포효했다. 세리나가 검기를 거두고 검을 세워 방어하면서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곧 롱소드를 겨누며 마수의 목쪽으로 돌격했다.

“밀렌, 엄호해!”

어둠숲의 그림자에서 흐릿하게 인영이 움직였다. 밀렌 바스트를 알아보고 에스트레드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둘이 작당을 한 거군.’

세리나가 그가 있는 곳을 알 리가 없었다. 밀렌이 아니라면 황자의 행방을 아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림자 기사와 붉은 에메랄드가 매우 오래된 친우 사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게 잘못이었다.

세리나는 마수의 리치 안으로 달려들면서 사각지대인 아래턱과 목 부근을 크게 베었다. 검에 약한 소드오러를 두른 채였다. 아까처럼 폭사시키는 오러를 항상 유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건 그녀의 어머니 정도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아직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세리나로서는 검기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닳는 것이 느껴졌다.

강한 피부와 털로 보호되는 몸체에는 약한 부상밖에 입히지 못했다. 흐르는 검붉은 피를 훌쩍 뛰어 피하면서 세리나가 물러서는 사이 밀렌의 검격이 마수의 갈라진 앞발에 꽂혔다. 더이상 피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속살에 그대로 공격이 꽂히면서 마수가 고통에 울부짖었다. 세리나와 밀렌 바스트는 재빨리 피했지만 눈먼 폭주에 결국 기사 하나가 그 발에 깔렸다.

에스트레드는 그 순간을 노렸다.

소리 없이 얼음의 창을 생성해낸 그는 그대로 밑을 향해 창을 내던졌다. 하나만으로 죽지 않았던 다른 경험을 기억해서 황자는 네개를 더 만들어내 아래로 쏟아부었다. 성인남성의 키만한 얼음창 다섯개가 그대로 쏘아져 내려갔다. 인간 몇도 위험하겠지만 피하는 것은 본인 몫이다.

마수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얼음의 창 다섯개는 마수의 머리통과 목, 심장과 허리를 균일하게 뚫고 지나갔다. 꿰뚫린 자리로부터 극한의 냉기가 빠른 속도로 번져 결국 마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죽음을 맞았다. 그것의 앞발에 짓눌렸던 기사 한명도 극한의 냉기를 피하지 못하고 폐가 얼어붙은 채 숨을 거뒀다.

“에, 에스트레드님…?”

예상 외의 등장에 세리나와 밀렌은 눈을 크게 뜨고 나무 위의 황자를 올려다 보았다.

“이번엔 좀 효율적으로 처리했군.”

에스트레드는 손을 털고 가볍게 뛰어 바닥에 내려섰다. 케린 모나칸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그녀는 에스트레드를 알아보고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옆의 수행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황급히 일어난 자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에스트레드 로마나 제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케린 모나칸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처음 거대한 마수를 순식간에 살해한 얼음창에 숨도 못쉬게 놀랐던 수행원들도 예를 차렸다.

에스트레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어붙은 마수의 시체 주변으로 숲은 시커멓게 황폐화되어 있었다. 독가스를 마신 몇몇의 상태도 안좋아보였다. 무릎을 굽힌 채 예를 올리는 상태에서도 기침 소리가 들렸다. 피를 흘리는 부상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리나 리엔.

멋대로 그의 뒤를 따라온 황자비는 롱소드를 검집에 넣고 얌전하게 손을 모았다. 황자는 한숨을 쉬고 그녀의 손목을 끌고 마을로 걷기 시작했다. 밀렌에게 명해 케린 모나칸과 부상자들을 마을로 끌고 갈 수레를 빌려오라 지시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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