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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50화 (50/142)

<-- 비밀 -->                밀렌 바스트가 말없이 먼저 말을 출발시켰다. 그 뒤를 따라 달리면서 세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친우는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성을 벗어난 후 수도를 둘러싼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말은 한참을 달렸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숲의 입구에 세리나가 눈을 찌푸렸다. 어둠숲. 처음 에스트레드가 마수의 공격으로 정신을 잃었던 깊고 깊은 숲이었다. 저곳에 또다시 들어가셨단 말인가. 이곳에 오면 자동적으로 첫번째 관계가 기억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날.

그녀는 말발굽 소리 사이로 크게 소리를 질러 물었다.

“이봐, 밀렌, 엉뚱한 곳으로 가는 거 아니지?”

“이제 와서 그럴 필요가 있겠어?”

밀렌이 뚱하게 답했다. 세리나는 피식 웃었다.

“넌 알고 있었어?”

“뭘?”

“레이디 도나 누앤의 일 말야.”

“몰랐다고는 못하지.”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냐고,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세리나는 일단 거기서 멈췄다. 말을 달리면서 하기에는 적당한 대화가 아니었다.

“황자 전하도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어. 구해 오고서야 알았으니까.”

밀렌은 마치 에스트레드의 변명을 해주는 것처럼 말했다. 사실 변명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그는 자신이 레이디 도나 누앤을 구하던 때를 기억했다.

감찰단의 지하감옥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독방. 어둠 속에서도 행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밀렌 바스트가 아니었다면 움직임조차 힘들었을 곳이었다. 단지 빛이 없어 생기는 자연스러운 어둠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에 의한 부자연스럽고 무거운 암흑이었다.

그곳에 쇠사슬에 묶여 엎드려 있던 여인을 끌어내 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 금방 죽을 것처럼 숨이 넘어가던 도나 누앤은 에스트레드의 지하 챔버에 눕자 꿈틀거리는 줄기를 꺼내들었다. 다행히 황자가 곁에 있어 바로 제압이 가능했지만…

짐승의 내장 따위로는 조용해지지 않았다. 이틀의 난동이 지나고 챔버 안 생명의 기운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황자가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갔을 때 도나 누앤은 거의 까맣게 타들어간 시체가 되어 있었다. 황자가 몸을 굽혀 그녀를 들여다 봤을 때,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칼날같은 그림자를 에스트레드가 막지 않았다. 밀렌은 확신했다. 못막은 것이 아니라, 막지 않은 것이었다.

그림자 줄기는 시종 한명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끔찍한 비명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밀렌이 급히 그를 끌어당겨 뒤로 숨겼지만 시종의 팔뚝은 이미 그림자 속으로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곧 에스트레드가 펼친 결계에 봉인당한 그림자가 잠시 꿈틀거렸지만 도나 누앤의 얼굴은 한결 인간다운 안색을 되찾고 있었다. 생기는 잠식당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생명이 위험해보이지는 않았다. 뒤로 넘어져 고통스럽게 몸을 꿈틀거리는 시종에게 의술사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면서 에스트레드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도나 누앤을 살피고 있었다.

밀렌이 손가락을 입가에 댔다.

“지금부터는 조용히 해야해.”

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숲은 위험한 곳이다. 원래 사냥도 대단위로 나오는 것이 정상인 구역이었다. 빨리 달려가 에스트레드의 일행에 합류해야했다. 잘못하면 큰 들짐승이나 괴수, 아주 운이 안좋을 경우 성체의 마수를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숲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달려가면서 억센 나뭇가지들이 어깨와 뺨을 스쳤다. 최대한 말등 위로 몸을 굽혀 나무를 피하면서 둘은 말을 달렸다.

“어둠숲 근처로도 마을이 있는 건 알고 있지?”

“그래. 수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빈민들의 마을 아닌가?”

“맞아. 빈민과, 부랑자와, 죄수들이 사는 마을이지.”

밀렌이 눈을 찌푸렸다. 그 순간 세리나가 롱소드를 꺼내들었다.

“뒤!”

밀렌은 순간적으로 재빨리 몸을 숙였다. 뒤에서 뻗어나온 굵은 나뭇가지가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리나의 롱소드가 채찍같은 나뭇가지를 잘라내며 위로 베어냈다.

“아직 비도 오기 전인데, 어둠숲 문지기들이 벌써 활동인가.”

밀렌이 투덜거리며 자신의 가느다란 세검을 뽑았다. 세리나가 말등에 더 붙으며 속도를 올렸다. 쓰러진 나무 둥치들을 뛰어넘으며 머리 위로 덮치는 검은 나뭇가지들을 베어내면서 두 사람은 최대한의 속력으로 오솔길을 달려갔다. 머리 위로 한두방을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둠숲 문지기라 불리는 나무들의 공격이 뜸해진 공터에 멈춰서서, 세리나는 짜증스럽게 망토를 여미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딱 그 짝이군.”

“하필 어둠숲 한가운데서 비 시작이라니.”

“우기라 그치려면 사흘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습기가 많아지만 어둠숲은 더욱 활기를 띈다. 건기에 잠들어있던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이 전부 활기를 되찾고 사냥을 개시한다. 이 시기에 어둠숲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은 일반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소의 위험을 감수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난 여기가 그리 불편하진 않은데, 넌 아니지?”

밀렌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림자의 마법을 기본으로 하는 마검사인 밀렌은 어둠숲에 들어와도 다른이드로가는 다르게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기겁할까 말을 못할 뿐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척하고 숨 막히는 기분이야. 공기 자체의 밀도가 높은 느낌이고.”

“그래. 다른 기사들도 똑같은 말을 하더군.”

“넌 아니야?”

“난 오히려…”

밀렌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둠 숲의 무겁고 질척한 공기가 그를 감싸고 돌았다. 오히려 느리고 묵직한 감각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미친 놈 보는 눈이군.”

뜨악한 세리나의 눈에 밀렌이 웃었다. 동족이 아니라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일 터였다.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빨리 가자고. 전하께서 향한 곳은 어둠 숲을 끼고 있는 방랑자들의 마을이다.”

“...의외의 행선지군.”

더이상 답하지 않고 밀렌이 다시 말에 채찍을 휘둘렀다. 세리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말에 박차를 가했다.

*****

에스트레드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보고서를 훑었다. 아무리 사냥을 해도 마수는 줄지 않았다. 분명히 어둠숲을 중심으로 시작된 마수의 대량 출몰은 계속해서 증가만 하고 있었다. 그는 착잡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숲을 끼고 있는 방랑자의 마을. 죄수와 고아와 방랑자가 모인 곳이다. 말하자면 제국에 어떤 등록도 되지 않고 오히려 제국에서 도망다니는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 중 여럿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마을이었다. 설사 이 마을 자체가 사라진다고 해도 말이다. 로마니엔의 지도에는 이러한 마을 자체가 표시되지 않았다. 제국의 수도 근방에 이렇게 더러운 자들이 산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마을 한가운데 촌장의 오두막을 빌려 임시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에스트레드는 창가로 다가가 마당을 내다보았다. 마당에 모아둔 마수의 팔 다리와 사체들에 매달린 것은 대부분 인간의 옷이었다. 허리띠나 미처 풀어내지 못한 가방도 있었다. 오늘 사냥한 것은 간신히 네마리였는데 그 모두가 인간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마당에서 옷가지와 소지품으로 자신의 아들을 알아본 노인이 울부짖고 있었다. 마당으로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가 쏟아져내렸다.

아무리 에스트레드라도 연이은 성체 마수와의 전투는 힘들다. 마법의 도움으로 더 흉포하고 강인해진 마수들은 일반 기사들이 다가가기 힘들도록 강했다. 동반한 호위병이나 기사들은 등 뒤의 호위 뿐 어깨를 겨누고 싸우는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모든 전투는 황자 혼자의 어깨에 걸려있을 뿐.

‘세리나가 잘 싸우긴 했지.’

에스트레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는 피로감을 느끼며 촌장의 작고 낡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세리나 리엔은 고되던 동부 내란의 현장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였다. 그의 등 뒤를 지키는 호위기사인 동시에,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 있는 단어 그대로의 동료. 비록 전투력이 다르긴 했지만 맡은 역할이 다를 뿐 거의 동등한 위치를 점했다. 에스트레드는 가끔 세리나가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엔티아스에게서 어떻게 훈련받았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제국 정예 기사단 출신의 남성 기사들도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라니.

“전설의 소드 마스터 마리아 엔티아스라면 나도 후려 팰 수 있으려나.”

지쳐서 늘어진 채 에스트레드는 혼잣말을 했다. 그는 피식거리며 혼자 웃었다. 일면식도 없는 마리아 엔티아스-세리나의 어머니였지만, 에스트레드는 그녀가 자신의 딸이 가진 특질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저 먼 변방의 리엔 후작가에서 갑자기 황궁으로 보내졌던 열 서너살의 자그마한 여자 아이.

에스트레드는 잠깐 그 시절을 기억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직 십대 중후반이던 소년 에스트레드 로마나에게 나타난 세리나 리엔은-천사같은 금발과 맑고 동그란 녹색 눈동자, 눈부시게 흰 피부의 도톰한 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소녀가 드레스도 아닌 수련기사의 제복을 입고 에스트레드에게 기사로서의 경례를 했을 때 아마 이미 마음은 빼앗겨버린 것 같다고 그는 확신했다.

'내쪽에서 이미 일방적으로 결약을 맺어버렸던 게 아닐까.'

아직 어렸던 그녀가 아름다운 성인으로 자라나며 뿜어내기 시작하던 청명하고 요염하고 풍성한 체향은 에스트레드가 세리나를 싸고 돌며 자신의 묵직하고 짙은 향으로 덮어버렸다. 사실 세리나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도 페로몬의 화학적 작용이었을 확률이 높다고 에스트레드는 생각했다. 그녀가 누구에게도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옭아매던 자신의 체향.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지키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일이 고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약세인 황궁 안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민간의 상단과 용병조직의 힘, 몇몇 그의 편인 귀족들의 조직을 거점으로 하여 버티는 수 밖에는. 누가 이런 짓을 벌이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황제가 아무런 뜻을 나타내지 않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 전에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역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보고서를 펼쳐들었다. 원래의 인간으로 추정되는 자의 신분, 나이, 용모, 능력과 함께 에스트레드가 살해한 마수의 능력치가 연결되었다. 오늘 그가 없앤 것은 네 마리. 모두 이 마을 주민의 변태형이라고 추정되고 있었다. 에스트레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 황후의 동기였다. 분명히 인간의 마수화를 실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로마니엔 제위를 레드포에게 끌어가는 것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짐작이라고 한다면 한가지 신경에 거슬리는 단서가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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