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 --> 다음날 아침, 에스트레드와 세리나의 침실로 급한 전갈이 도착했다. 문 너머로 들린 것은 시종장 호보프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황자 전하, 이른 아침에 송구스럽습니다. 아래 지하층에 비상사태가…”
“어이, 황자 전하! 빨리 내려가보셔야 할 거 같은데?”
뒤이어 벡스 레넌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세리나가 먼저 반응해서 잽싸게 일어나 황자의 의장을 챙기고, 자신 역시 움직이기 쉬운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한창 따스하고 안락했던 아내와의 아침 잠자리를 방해받은 에스트레드가 한껏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그 역시 가타부타 말 없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하루 중 얼마 안되는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았다. 정말 비상사태가 아니라면 호보프가 이런 식으로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 리가 없겠지만, 만의 하나라도 비상사태가 아닐 경우에 나의 기분이 몹시 저조할 거라는 뜻을 담고 에스트레드가 으르렁거렸다. 세리나가 옆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인사도 생략하고 방안으로 뛰어들어온 호보프가 송구스럽다는 듯 절을 했다.
“전하께서 기상하시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오나, 게다가 황자비 전하와 함께 계시는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시종장의 도리가 아닌 것을 아는 바입니다만…”
“야, 야, 시끄럽고.”
뒤이어 들어온 벡스 레넌이 투덜거렸다.
“그렇게 얼굴 찌푸리지 마시라고요, 전하. 아무리 여우같은 마누라...아니, 아무리 봐도 리엔 경은 여우는 아니지만, 미인이긴 한데 좀 곰 과죠. 아무튼.”
세리나는 에스트레드의 얼굴이 그렇게 전폭적으로 찌푸려지는 것을 처음 본 기분이라 신기하게 그를 훔쳐보았다. 황자의 긴손가락이 무릎 위를 성마르게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딱 끊어지게 물어보는 황자의 말에 벡스 레넌이 정신을 차린 듯 아래 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지하 챔버 말입니다. 레이디 도나 누앤한테 가보셔야겠는데요.”
지하 챔버. 그 말이 들리자 대답도 없이 황자가 벌떡 일어나서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호보프가 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레이디를 치료하려 방문했던 의술사가 다쳤습니다. 약간의 폭주 전조 증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챔버의 봉인은?”
“다행히 의술사가 재빨리 작동시켜서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만 본인이 빠져나오질 못했습니다.”
“...”
에스트레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거침없는 걸음이 당도한 얼음의 방 앞에서 그가 손을 들었다. 사람의 키 다섯배 정도로 장대한 높이의 문이 흐릿하게 투명해졌다. 챔버 안의 상황이 눈에 보이면서,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매 속의 나이프에 손가락을 걸었다.
“저 그림자…”
세리나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말했다.
덩굴같은 그림자는 분명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클리스 로마나의 습격 때, 쓰러진 제5황자를 쓸어담고 사라지던 수없이 많은 그림자의 줄기들.
“와, 징그럽구만.”
벡스 레넌이 질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덩쿨처럼 엉킨 줄기들은 질감과 양감을 가지고 서로 얽혀 꿈틀거렸다.
"이곳에 있던 건 분명히 레이디 도나 누앤이 아니었습니까? 대체 저것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
"설마 황후의 힘이 여기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겠지요?"
에스트레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침대 위의 몸에서 뻗어나와 의술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젊은 남자인 의술사는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었지만 그는 기사가 아니다. 그림자는 이미 꼬챙이처럼 그의 허벅다리와 팔을 뚫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마치 가지고 노는 것처럼 줄기들이 그의 다리와 팔을 휘감고 들어갔다. 반투명한 문 위로 마치 환영처럼 모든 광경이 보였다. 세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챔버 봉인 열어주십시오. 제가 선 공격 하겠습니다. 벡스, 백업을 준비해라.”
벡스 레넌도 자신도 모르게 클레이모어를 준비했고 황자비가 나이프를 꺼내 푸른 소드 오러를 발현시켰다. 전보다 한층 안정되어보이는 오러에 잠시 에스트레드가 눈을 빛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만 둬라.”
다른 계획이 있는가 싶어 세리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황자는 곧 투명해졌던 챔버의 문에서 기운을 거두었다. 방안의 광경이 보이지 않자,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치 고요하고 평온한 것 같았다.
“전하,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냥 둔다.”
“네?”
아연해진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에스트레드는 차갑고 냉정하긴 했지만 이유 없이 자신의 사람을 구하지 않는 주군은 아니었다. 의술사는 레이디 도나 누앤을 치료하러 온 사람이었다. 아마도 비밀유지를 위해 에스트레드가 황궁 밖에서 데려온 사람일 것이다. 귀족도 기사도 아닌, 수도에서 사는 시민.
“잠깐...저대로 두면 저 의술사는 죽을 겁니다, 아니 이미 죽었을지도…”
“그래.”
세리나의 나이프에서 오러가 사라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저 그림자는 뭐죠? 아니, 그보다 의술사가 저기서 죽어도 되는 겁니까.”
“별 수 없다.”
“어이, 전하. 이대로 둘 셈이야?”
벡스 레넌과 세리나의 항의를 무시하고 황자는 챔버 바깥에 손을 얹어 얼음을 좀 더 두텁게 강화했다. 쩌적거리며 불어난 얼음으로 인해 챔버의 벽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별 수 없다니요...지금 들어가서 구하기만 하면.”
“무슨 헛소리야, 저기 안에서 사람이 죽고 있는데.”
“그만. 결정은 내려졌다. 이만 올라가자.”
에스트레드는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는 따라오는 호보프에게 지시했다.
“만 하루가 지나면 봉인을 해제해도 된다. 레이디 도나 누앤의 몸 아래 마법진이 흐트러졌을 테니 술사를 불러다 다시 그려라. 시신 수습은...가능한 깔끔히 해서 적당한 보상과 함께 유족에게 전해라. 비밀 유지를 잘 하도록 지시하고.”
“예.”
에스트레드는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수습할 시신도 남아있지 않겠지만…”
“전하! 설명을 해주십시오!”
세리나가 항의했다. 그 곁에서 벡스 레넌 역시 못마땅한 얼굴로 클레이모어를 바닥에 두드리고 있었다. 전쟁을 수없이 겪어낸 기사와 용병이라지만, 전장에서 죽어가는 군인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민간인의 죽음은 그들 역시 쉽게 용인할 수 없었다.
에스트레드는 계단참에 서서 눈썹을 치켰다. 세리나에게 보여주는 그 다정한 얼굴이 안니었다. 오만하고 차가운 군주의 얼굴.
그 앞으로 뛰어가서 세리나는 챔버를 가리켰다.
“전하,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구할 수 있는 자를 구하지 않는다니요.”
“....”
“그래. 나도 이건 좀 별로인데.”
용병대장이 곁으로 다가와 투덜거렸다. 세리나는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의술사는 민간인입니다. 전장의 군인도 아니고 사람을 치료하러 왔던 그가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에스트레드가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재미있군, 여태까지 네가 그렇게 크게 소리를 내서 대답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는데.”
“전하, 봉인만 열어주십시오.”
세리나가 여차하면 달려들어갈 태세로 나이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젓고 그대로 윗층으로 향했다. 시종장 호보프가 어두운 낯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대체 뭐야?”
벡스 레넌이 콧김을 내뿜었다.
“일부러 알리러 간 보람이 아무것도 없잖아? 그냥 죽게 놔둔다니, 멀쩡한 생사람을.”
세리나는 말없이 다시 챔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서 나이프 위로 새파란 소드오러가 생성되었다. 더 높은 경지에 달할수록 검사의 검기는 순도 높은 흰색을 띄우는 법, 지금 세리나의 소드 오러는 불꽃처럼 희고 파랬다.
그녀는 챔버의 얼음 위를 내려쳤다. 한번, 두번, 세번...강철을 자르는 검기에도 황자 에스트레드의 얼음은 가루만 튈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에 벡스 레넌이 다가왔다.
“...이 챔버의 봉인은 전하가 직접 일년에 걸쳐 기운을 쏟아부은 겁니다, 황자비 전하.”
“....”
“어차피 우리가 이 문을 열 수는 없어요. 의술사가 죽게 만드는 게 황자 전하의 결정이라면 우리로선 별 수 없지 뭐.”
“안다.”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하며 다시 한번 얼음을 내리쳤다.
“이해가 안될 뿐이야.”
“...이유가 있겠죠.”
“이유가 있으시겠지, 하지만 나는 이해가 안돼.”
세리나의 나이프에서 다시 한번 소드 오러가 타올랐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얼음 위에 검을 꽂았다. 에스트레드의 철벽 같던 얼음에 아주 미세한 금이 가고, 세리나의 검기가 결계 위로 꽂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자비는 있는 힘을 다해 기운을 불어넣었다.
위잉하며 그녀의 귓가에서 이명이 들렸다. 차갑고 부드러운 공명. 현기증이 일 정도로 모든 기운을 뽑아 쏟아부으면서 세리나는 아주 천천히, 미세하게 투명해지는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벡스 레넌도 놀란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야, 황자비 전하도 솜씨 있으시네, 에스트레드 전하의 결계에 약간이라도 흠집을 내다니…”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용병대장의 말이 끊겼다.
“아…”
세리나가 신음했다. 흐릿하게 반투명해진 문 안쪽으로, 의술사로 추정되는 남자의 가슴께에 날카로운 그림자 줄기가 박히는 것이 보였다.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배 쪽을 파고든 그림자가 가죽을 가르며 남자의 몸 안에서 내장으로 추정되는 것을 꺼내 삼켰다.
힘이 빠진 세리나의 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지고, 문은 다시 불투명해졌다. 지하 홀 안으로 끝없는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