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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46화 (46/142)

<-- 비밀 -->                황후 라일리아는 귀빈용 객실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장미빛 드레스가 소파 위로 넓게 펼쳐져 정원에서 불어온 바람에 하늘거렸다. 긴 검은 머리를 밑으로 묶어 아래로 늘어뜨리고 보드라운 깃털 장식을 옆 머리에 장식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머리카락 사이로 점점이 빛나는 크리스탈 장식들이 밤하늘의 별 같았다. 비록 창백하고 싸늘한 인상이었지만 그마저도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레이디 휘에리는 능란하게 그녀에게 대접할 차를 따라내었다. 사교에 익숙한 귀부인다운 대접에 라일리아는 미소를 띄우고 목례했다. 휘에리는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르고, 황후에게 말없는 허락을 받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황제와 황후는 로마나 황족 중에서도 지엄한 신분이다. 곁이라고 해도 삼보 이상 떨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황후의 뒤에는 그녀의 두 수호기사 중 한명인 케린 모나칸이 서 있었다. 여성 기사인 그녀는 세리나 리엔과 함께 여기사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기사였다. 부드러운 밤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그녀는 등에 멘 거대한 양날검의 손잡이를 만졌다.

그 앞에 급히 지하 챔버를 닫고 달려 올라온 세리나 리엔이 나타났다. 급하다고 해도 이미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라 머리는 깔끔히 올려져 있었고, 드레스 역시 내려갈 때 입었던 폭이 좁은 슈미즈 가운에서 폭이 넓고 겹이 많은 화사한 살구색의 드레스로 바뀌어 있었다.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녀는 드레스를 잡아 무릎을 굽혔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야, 리엔 경.”

무미건조한 그녀의 말투 속에는 여전히 세리나를 황자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명백하게 들어 있었다. 사실 세리나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의 뒤에 서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게 황후 라일리아 로마나였다. 하필 에스트레드가 없는 지금 왔다는 게 일부러 노렸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황자비는 휘에리의 맞은편, 역시 황후에게서 삼보쯤 떨어진 곁에 앉았다.

“그저께 에스트레드를 보고자 전언을 넣었지만 두 사람 모두 궁에 없다는 말을 들었어, 황자 부부는 참 바쁜 모양이군.”

“예, 황자 전하께서 수도 바깥으로 성벽 상황을 살피고 싶다 하셔서...사냥 여행 겸 사흘간 다녀왔습니다.”

준비되어있던 거짓말이 술술 입 밖으로 나왔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레이디 휘에리는 빠른 눈치로 뭔가 잘못되어있음을 눈치채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냥여행겸이라.”

황후가 웃었다. 세리나는 그녀가 알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상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서로가 대충은 윤곽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흘이라...결혼식도 전에 벌써 신혼여행인가. 결약이 그만큼 강해진 건가? 아, 자네의 그 요란스러운 페로몬은 확인하지 않겠어.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듣기에 따라서 상당히 모욕적이고 저속한 말이었다. 하지만 라일리아는 별 거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세리나 역시 그 정도에 당황할 정도로 지금 경계가 내려와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냥은 재미 있었나? 뭘 잡았는지 궁금한데.”

“수확은 없었습니다. 그저 재미로 다녀온 것이라.”

“호오.”

애석하다는 듯 라일리아가 무릎을 쳤다.

“그것 참 아쉽군. 케린이 무엇을 잡았는지 안다면 에스트레드가 부러워하겠어. 마침 황제폐하와 나도 휴식 겸 사냥을 다녀왔거든.”

세리나는 케린 모나칸 쪽을 흘긋 보았다. 밤색 머리카락의 여기사는 그 눈빛을 마주했다. 당당한 체구의 여기사는 그만큼 태연하고 오만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세리나는 한때 라이벌 비슷한 관계였던 그녀가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황후가 손을 뻗어 세리나의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어깨를 다쳤군, 리엔 경.”

세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그 어깨를 가리키자 찌르르하고 고통이 상처 부위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사냥에 나섰다가 다쳤습니다. 주제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저런. 곧 결혼식인데, 가장 중요한 신부감이 다치다니.”

라일리아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이고 검은 눈을 빛냈다.

“몸조심을 해야지, 곧 중요한 사람이 될 예정인데. 사냥에선 사냥감이 가장 중요하듯 결혼식에선 신부감이 중요해.”

어쩐지 음습한 기운이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아서 세리나는 소매 속에 숨긴 나이프를 자신도 모르게 매만졌다. 하지만 곧 황후는 밝게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사실 내가 방문한 건 이유가 있어, 곧 결혼식이니 내 황후로서 선물을 하나 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녀는 곁에 두었던 벨벳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고급스러웠지만 작고 평범해보였다. 세리나는 상자를 받아 열었고, 그 안에는 반지가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가운데서 빛나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평범한 금반지였다.

“한번 껴보게. 크기가 맞는지 봐야하니까.”

꺼림칙한 마음으로도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생각나지 않아 세리나는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반지는 놀랍게도 멋대로 줄어들어 그녀의 왼손 약지에 완벽하게 맞아들었다. 당황한 세리나가 반지를 빼려 했지만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오, 이런. 그 반지가 주인을 찾은 모양이군.”

당황해서 반지를 빼려는 세리나의 모습을 보면서 황후가 유쾌하게 놀리듯 말했다.

“사실 그건 마법의 반지야. 맞는 주인을 찾으면 바로 그 손에 맞게 줄어들어 빠지질 않지. 설마하니 자네가 주인일줄은 몰랐는데.”

“저, 이건 뺄 수가 없는 것인지요. 도저히…”

“글쎄? 난 그걸 뺄 방법을 잘 모르는데.”

라일리아는 세리나의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를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읽을 수가 없었다. 세리나는 침착을 되찾고 손을 내렸다.

“폐하께 돌려드려야 하는데,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어차피 선물이었으니까.”

금방 관심이 식은 얼굴로 황후가 다시 등을 기대고 깊이 앉았다.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레드포와 닮아 있었다.

“결혼식은 성공적으로 진행될거야. 에스트레드와 자네 둘이 노는 사이에 시종장 호보프와 내무부에서 지독하게 고생들을 했지. 결혼식이 열리는 곳은 중앙 황궁이다.”

세리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하나. 앞으로 케린의 부친, 모나칸 후작이 총사대의 지휘를 맡게 될 것이다.”

황후는 볼일 다 보았다는 듯한 태도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런 그녀를 굳이 잡지 않고 세리나는 일어서서 황후를 배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숨을 죽이고 조용히 있던 레이디 휘에리 역시 그녀를 배웅하고 들어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큰일이네요, 그 반지. 좀 수상쩍은데.”

“그렇죠 역시?”

“게다가 왼손 약지...황자 전하의 반지를 끼워야하는 손가락에 다른 반지가 들어앉아버리다니.”

말은 안했지만 불길했다. 세리나는 티를 내지 않고 차분한 얼굴로 평범한 반지를 쓰다듬었다. 아까와는 달리 별다른 느낌이 오지 않았다.

“거참 살벌한 분이시네.”

숨어있던 벡스 레넌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세리나의 손을 자아채 그 반지를 들여다 보았다. 닳고 닳은 그의 눈에도 별다르게 특이한 것은 잡히지 않았다.

“저 여자, 황후 폐하는 이미 누가 레이디 도나 누앤을 채갔는지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귀도 밝군. 옆방에서 다 들었나?”

“이 건물은 방음이 요만큼도 안되니까요. 애초에 숭숭 다 뚫려있고. 하여간 찝찝한 여자에요.”

용병대장이 투덜거렸다.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세리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한마디도 그냥 허투루 하지는 않는 여자다. 케린 모나칸의 가문은 황후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한 대표적인 친황후파 귀족이었다. 케린의 아버지 모나칸 후작은 군에서 잔뼈가 굵은 장성 중 한명이다. 그런 그가 황궁 전체의 경비를 관할하는 자리에 오른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황후는 왜 하필 그 이야기를 세리나에게 한 것일까.

‘일종의 선전포고로군.’

세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궁 총사대는 그냥 경비병이 아니다. 황실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황실의 사병은 황제에게 속하는 것이 당연한 법. 요즘 발렌2세가 아무리 명령을 내리는 일이 적어졌다지만 총사대는 당연히 그의 명을 받들기 위해 대기하는 황실 소속의 군대였다. 그런 총사대의 수장으로 대표적인 친황후파 귀족이 앉는다. 황후가 이미 총사대를 장악했다는 뜻과 다름 없었다.

‘...황제 폐하께선 완벽하게 황후에게 넘어간 것인가…’

한숨이 나왔다. 황제와 황후가 결약을 맺은 것은 이미 이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 와서 넘어가느니 마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 관계일 테지만, 확실히 근래의 황제 발렌2세는 조금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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