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 --> 황후 라일리아가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빗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레드포 로마나는 붉은 빛을 띈 차를 마셨다. 정원에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로마니엔의 중심부, 이곳 수도에는 여름부터 장마가 시작된다. 초여름인 지금부터 벌써 공기는 잔뜩 웅크려 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라일리아는 그 습기가 마음에 들어서 머리를 빗던 은제빗을 내려놓고 손으로 허공을 저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탁한 그림자가 피어올라 공기 중의 수분기를 잡고 황후의 손바닥 안으로 끌어내렸다.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라일리아는 자신의 손바닥 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비가 오겠네요, 어머니. 날씨가 별로네.”
레드포는 일상적인 어투로 널찍이 열린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비를 좋아했지만 그는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화염을 사용하는 황자니 만큼 당연할지도 몰랐다. 반대로 어둠과 그림자의 라일리아 로마나는 장마철을 매우 좋아했다. 습기와 어둠, 그녀가 지배하는 두 가지였다.
황후만이 사용하는 황후궁에는 사용인도 많지 않았다. 시종도 시녀도 말이 없고 고요했다. 그 점은 레드포의 동부 거처와 마찬가지였다. 특히 황후의 방 근처에서 시중을 드는 자들은 일반적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 없었다.
황후가 손바닥 위의 물방울을 굴리며 놀았다.
“도나 누앤이 사라졌어.”
“알고 있어요.”
“누가 데려간 것 같니?”
“뻔하죠.”
“건방진 작자야. 도나는 이제 좀 사용해질만 했는데.”
라일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전 며느리의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말투는 물체를 대하는 것처럼 냉담했다.
“슈엔은 그애 자체로는 너무 쓸모가 없더구나. 아무리 그 애비의 효용이 있다지만…”
“어쩔 수 없잖습니까. 대공녀는 평범하니까요.”
“알고 있어. 하지만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구나.”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그저 풀어내린 황후의 긴 머리는 발치를 넘어설 정도의 길이였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 정원쪽을 향했다. 긴 흑발이 라일리아의 뒤로 그림자를 만들며 그녀를 쫓았다. 레드포는 턱을 괴고 그런 어머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황자의 손안에 있는 찻잔 속, 붉은 빛의 찻물이 흔들렸다. 어머니의 고향에서 나고 자란 식물을 말려 우려낸 차.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도나 누앤이지 슈엔이 아냐.”
“살아있는 도나 누앤 보다는 그녀의 사체가 가장 쓸모 있을 거 같았는데…”
“그래. 세리나 리엔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황후의 눈에 고요하게 적대감이 깃들었다. 무저갱 같이 깊은 검은 눈동자는 빛조차 빨아들일 것 같았다. 창백한 흰 피부 위 크고 둥근 눈은 어딘가 유령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흐린 하늘을 쳐다보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 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감이 팽배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처럼.
레드포 로마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실제로 유령일지도 모른다고.
*****
몸이 성치 않은 세리나를 마차로 데리고 황자궁으로 돌아오고, 시종장 호보프는 노발대발했다. 곧 결혼식인데 가장 중요한 신부 될 사람의 몸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왼쪽 어깨의 흉터라니 순백의 결혼 드레스를 입는 데 디자인에 제약이 많을 것이다. 세리나는 멋적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무도 결혼식에 신경 쓰지 않는 와중 혼자 세세한 것들을 준비하느라 대머리가 될 지경인 호보프는 태평한 그녀의 웃음을 보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에스트레드는 곧 나갈 준비를 했다. 사흘이나 세리나의 곁에 머물러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일이 밀렸다.
“다녀오십쇼.”
“...자네 안바쁜가?”
에스트레드가 성가신 표정을 짓는 건 오랜만이었다. 내면으로는 성가실 때가 많았지만 그걸 표출하는 일은 적은데, 벡스 레넌은 그 희귀한 얼굴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세리나 역시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좀 더 노골적이었다. 전직 수호기사는 매우 불량한 자세로 용병대장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벡스가 고개를 저었다.
“늙은이 너무 박대하지 마시죠.”
“용병대장은 생각보다 한가한 직업인 모양이군.”
“한가해서 여기 와 있는 거 아닙니다. 다 황자 전하를 도와드리려고 하는 거지.”
“뭘 돕고 있나, 황자궁 식비의 초월적 상승? 예산 삭감? 요리사의 수련?”
“거 상단도 휘어잡고 계신 분께서 쩨쩨하게 구시기는.”
벡스는 말과 함께 손에 든 아이스 초콜릿을 빨대로 쪽 빨아먹었다. 답지 않게 달콤한 음식에 열광하는 용병대장은 황자궁에 들어서자마자 제공되는 디저트들에 거의 얼굴을 박고 마시다시피 했다. 세리나의 거동을 도와 비밀리에 황자궁에 들어오고 바로 나가려던 그 가벼운 엉덩이를 붙여 앉은 것도 황자궁 요리사의 디저트 쿠킹 솜씨 때문이 아닐까, 에스트레드와 세리나는 동시에 의심했다. 일단 용병대장이 식은 수프처럼 떠먹는 우유 푸딩이라든가 치즈 케이크 같은 경우 워낙 고급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단가만 해도 대단했다. 게다가 벡스 레넌은 대식가였다.
곁에서 시녀 안나와 레이디 휘에리가 까르르 웃었다.
“어머나, 정말로 레넌 경은 대접하는 재미가 있다니까요.”
...일단 벡스 레넌이 먹고 마시는 디저트 비용을 대는 건 황자궁이었고, 휘에리는 손님이었으며, 벡스 레넌은 경이 아니었다. 한 문장 안에 들어있는 세가지 오류에 황자 부부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디저트와 차와 주스를 대령하던 시종장 호보프도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곧 결혼식인데, 벡스 레넌의 등장으로 일도 비용도 작게나마 플러스 알파가 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호보프는 계속해서 똥 씹은 표정이었다. 용병대장이 빙글빙글 웃으며 몽글몽글한 아이보리색 슈크림을 하나 입에 덥썩 베어물었다.
“역시 레이디 휘에리, 마음이 넓으십니다.”
“당연하죠, 레넌 경. 우리 바깥양반이 당신한테 졌던 빚을 생각하면 제가 세상 모든 수제 초콜릿을 가져다 당신한테 드려도 모자라요.”
“아아 별말씀을. 꼬마 테넌...아니, 카스가드 백작은 저한테 진 빚이 없어요, 제가 졌으면 졌지. 아이구 이런. 이건 남부 사막의 대추야자와 말린 치즈를 얹은 비스켓 아닙니까!”
휘에리와 벡스 레넌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황자 부부는 한숨을 쉬고 그들을 뒤로 한 채 정문으로 향했다. 홀을 걸으면서 세리나가 투덜거렸다.
“벡스 레넌의 나이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물어보면 항상 저와 비슷하다고 하면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정반대니까요. 카스가드 백작에게 꼬마 테넌이라뇨.”
“그건 나도 모른다. 캐봤는데 어디에서도 그의 출생지나 부모에 대한 정보는 나오질 않더군. 45세라고 용병길드에서는 말하지만 헛소리다.”
“45세...대놓고 거짓말이군요.”
“그래. 휘에리와 카스가드 백작이 어렸을 때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다고 하니까 말이지. 현재 백작이 49세다. 그때도 벡스 레넌은 지금과 비슷한 용모였어.”
연령미상, 출신지 미상,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게 알려진 것의 전부다. 꽤 밉상이지만 도움이 될 때는 확실하고, 계약을 어기는 일도 없으니 상관은 없다. 그가 용병대장으로 들어앉은 것도 길드의 계약 기강 때문이었다.
황자는 몸을 돌려서 세리나를 끌어안았다. 곧 있을 우기에 습한 바람이 둘을 감쌌다. 로마니엔의 우기에는 밤이 길어지고 낮은 짧아진다. 하루의 삼분의 일이 낮, 삼분의 이가 밤이다. 장마철의 깊은 밤은 로마니엔에서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역사상 로마니엔 제국의 불길하고 불행했던 일들은 전부 우기의 밤에 일어난다고 할 정도로. 습한 공기가 기분이 나빠서 세리나는 황자의 가슴에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잠시 쉬고 있어라. 어깨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군.”
“이미 많이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에 오른 에스트레드가 아내를 내려다 보았다. 세리나는 낫지 않은 왼쪽 어깨를 숄로 감싸며 물었다.
“레이디 도나 누앤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습니까?”
“글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구출한 뒤로 황자궁 지하의 비밀 챔버에서 의료적인 처치를 받고 있는 도나 누앤은 아직도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았다. 그녀가 있는 챔버 안으로 의술사와 신관이 몇번이나 드나들었지만 치료는 쉽지 않았다.
“신관의 말에 의하면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에스트레드는 답지않게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곧 만날 수 있을 게다.”
“....”
그녀는 잠시 침묵하며 말 위의 황자를 올려다 보았다. 여자의 긴 금발이 흩날리며 허공에 흩어졌다. 초여름 습기를 머금한 회색 하늘로 노란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이 날렸다.
“전하께선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수도방위군으로 가서 카스가드 백작을 만나고 올 것이다. 의논할 일이 있어.”
“백작 말씀이십니까, 지금 수도방위군은 바쁜 시기 아닐지요? 우기 준비를 하느라 수로 뚫고 정신 없을 텐데요.”
“그도 상관 없다고 했다, 잠깐 만나고 돌아올 테니까.”
말없이 세리나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차를 많이 마셔라. 내일이면 돌아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곧 수행원들과 기사들과 함께 에스트레드가 말을 출발시켰다. 세리나는 입술을 물었다.
레이디 휘에리는 카스가드 백작이 일주일동안 지방 영지에 있는 아들을 만나러 갔다고 했다.
수도방위군에는 지금 그가 없었다.
세리나는 잠시 멈춘 상태로 고민했다. 왜일까. 의문스러웠지만 지금 그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어깨도 몸 상태도 온전치 않았다. 그녀는 복잡해진 머리를 안고 홀 안으로 들어왔다.
밖으로 갈 수는 없지만, 지금 밑에는 레이디 도나 누앤이 누워있을 터였다. 말을 나누지는 못하더라도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는 보고 싶었다. 황자비는 홀 저편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지나쳐서 밑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