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41화 (41/142)

<-- 의뢰 -->                에스트레드에게 중상을 입은 이후 그는 자신의 궁에만 박혀 있었다. 사실 그날의 기억은 클리스 로마나에게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황궁 밖으로 왜 나갔는지도 사실 알 수 없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두통. 어느날 밤 고통은 야수이며 동시에 신과 같은 황자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해졌다. 그는 고통에 휩싸인 채로 황궁 밖을 나가 아무곳으로나 뛰쳐나갔다. 신발마저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클리스 로마나는 황자궁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아주 나쁜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거의 반신을 파괴해버렸던 극한의 창날. 남아있는 기억은 단편적이다. 상처 역시 완전히 봉합된 채였다. 기억과 고통은 전부 꿈이 맞는 것 마냥. 하지만 빼앗긴 기력과 이지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날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또다시 그는 밤거리를 헤멨다. 어떤 향기를 찾기 위해서.

클리스 로마나는 허공을 향해 코를 킁킁대었다.

“찾았다…”

코 끝, 예민하게 발달한 황자의 후각이 세리나 리엔의 체향을 잡아냈다. 에스트레드의 체향으로 온통 뒤덮이고 가려졌지만 그는 야수형의 황족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예민한 코를 지닌 클리스 로마나는 후각 세포 가득히 세리나의 체향을 빨아들였다. 달콤하고 청량한 향기. 아주 어릴 때부터 중독적으로 사용해온...천일화의 향. 어쩌면 황족들 모두가 중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세리나는 신중하게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여태까지 경비병들의 안위를 위해 검집째로 휘둘렀지만 지금 그런 만용을 부릴 상대는 아니었다. 그녀는 주변 경비병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육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검기를 소드에 주입했다. 그녀의 손과 롱소드가 마치 하나처럼 검기에 묶여 결합되었다.

지금 당장 뛰어나가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움직였다간 지난번처럼 클리스 로마나의 먹이가 될 것이다. 등 뒤에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세리나는 차분하게 발을 움직여 클리스 로마나를 경계했다.

“뭐해요, 황자비 전하! 빨리…!”

벡스 레넌이 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순간 달려든 클리스 로마나가 거대해진 팔로 그를 후려쳤다. 콰앙 하는 파열음과 함께 장신의 용병대장이 건물 벽에 처박혔다. 간신히 클레이모어로 명치와 심장을 막아낸 벡스 레넌이 황자의 공격을 빗겨낸 왼팔목 뼈를 부수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몸을 꿈틀거렸다.

세리나 리엔이 바닥을 박찬 것도 거의 동시였다. 롱소드를 직선으로 찔러넣는 그녀의 공격을 보며 몸을 반쯤 야수화 시킨 클리스 로마나가 코웃음치고 여자의 검을 한손으로 잡아챘다. 그게 실수였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둘렀지만 검기는 검기. 쇠를 잘라낼 수 있는 검을 손바닥으로 잡은 것을 이용하여 세리나는 검을 안쪽으로 돌리며 후벼팠다. 손바닥 정중앙을 관통한 검이 클리스 로마나의 손목까지 꿰뚫고 들어갔다.

“크아악-!”

몸에 갈기가 솟구치기 시작한 황자가 그대로 그녀를 풀 스윙으로 반대편 벽으로 날려버렸다. 검과 함께 날아간 세리나는 몸을 둥글게 말아 충격을 최소화하며 벽을 치고 굴러 일어났다. 그 사이 벡스 레넌이 클레이모어의 날을 세워 클리스 로마나의 정강이를 공격했다. 스걱 하는 소리와 함께 황자의 몸을 덮기 시작한 갑각이 베어져 나갔다. 비늘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 겹겹이 떨어져 나가자 야수가 비명을 지르며 용병대장을 다시 한번 바닥에 메쳤다. 장신의 벡스 레넌이 형편없이 나가떨어지며 먼지 많은 바닥에 굴렀다. 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누구냐! 대체 무슨 소란이냐!”

건물 밖에서 기사 여럿의 중갑옷 발소리가 들려왔다. 감찰단 소속 기사들이 소집한 것이다. 세리나가 혀를 찼다.

‘젠장.’

도망가려면 지금 뿐이다. 하지만 피떡이 된 벡스 레넌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잡히면 치명적이다. 머리를 굴릴 사이도 없다. 세리나는 그대로 검을 길게  뻗으며 클리스 로마나에게로 달려들었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클리스 로마나가 방어를 극도로 올린 비늘을 꺼내 세리나의 검을 막아냈다. 있는 힘을 다해 밀고 있는 황자비와는 달리 클리스 로마나는 여유로워 보였다. 꿰뚫린 손목과 떨어진 갑각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웃고 있었다. 인간형일 때의 흔적은 불타는 듯한 적발과 검은 눈동자 밖에 없는 그가 히죽거리면서 세리나에게 바람을 불었다.

“황자비...향기... 여자...내 목표….”

‘또, 지난번과 같이…’

식은땀을 흘리며 버티면서도 세리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음욕이 느껴지는 희번득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소름끼쳤다. 또다시, 클리스 로마나는 야수화와 동시에 이지를 잃은 듯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도 이미 제대로 된 이성이 이미 떠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막아내는 방어의 갑각에 힘이 더해졌다. 완력에서 형편없이 밀리는 세리나의 발귀꿈치가 뒤로 지직 밀렸다.

“뭐야, 뭐, 뭐야!”

“저건 뭐지?”

“경비병들을 전부 죽인 건가? 뭐야 저 괴물은!”

건물 안으로 뛰어든 감찰단 기사들이 대치상태인 괴물과 검은 옷을 휘감은 야행인 둘을 보고 속속 검을 뽑았다. 스르릉 하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십여번 울렸다.

남자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위기감을 느껴 세리나가 뒤로 훌쩍 뛰어 물러섰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큭…!”

왼쪽 어깨를 관통한 클리스 로마나의 길다란 손톱이 좌우로 움직이며 상처를 넓혔다. 세리나는 이를 악물고 오른손의 검으로 손톱을 쳐냈다. 스르륵 빠져나간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놀리듯이 몸을 양쪽으로 흔들거리며 야수의 황자가 웃었다. 그는 세리나와 기사들 양쪽 모두를 향해 손짓했다.

“자...다들 덤벼, 버러지들.”

“으, 으, 저건 뭐지?”

“인간이 아냐. 저건 대체…!”

감찰단의 기사들이 우왕좌왕했다. 그 중 한명이 탄식을 뱉었다.

“설마 마수인가?”

“하지만 말을 하잖아!”

순간 클리스가 홀 가운데를 가격했다. 폭력적인 권풍이 홀의 가운데를 가르고 벽까지 흔적을 남겼다. 이성을 잃고 포효하면서 그가 가장 가까운 기사 한명을 공격했다. 검을 들어 방어하려 했지만 검기도 두르지 않은 소드는 그의 갑각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허무하게 튕겨나온 검이 기사의 손을 벗어나고, 클리스 로마나는 단숨에 그의 멱살을 잡아채 들어올렸다.

일반 인간의 두배 가량 되는 야수화 된 황자는 기사를 코 앞에 가져가서 히죽 웃었다. 그리고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단숨에 그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잠시 기사가 몸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축 늘어졌다. 황자는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린 기사의 몸을 쓰레기처럼 바닥에 집어던졌다.

“저, 저런…”

“페테르 경이…!”

분노에 찬 기사들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여유롭게 웃으며 온몸의 갑각을 세우던 클리스 로마나가 갑자기 비명을 터뜨렸다. 처절한 소리였다.

“뭐, 뭐야…!”

“제엔-장, 나도...잊지 말라고….”

숨죽이고 기절한 척 하던 벡스 레넌이 자신의 클레이모어를 있는 힘껏 클리스 로마나의 사타구니로 쳐 올린 것이었다. 갑각이 덜 덮힌 부분으로 절묘하게 파고 들어간 거대한 클레이모어가 클리스의 허벅지 깊은 곳과 골반 부분을 찌르고 지나갔다.

“이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황자가 괴성을 지르며 고통으로 포효하기 시작했다. 이미 얼마 남아있지 않던 이성이 아예 사라진 것 같았다. 감찰단 기사들이 전력으로 검을 내어 분투하는 사이, 간신히 일어난 벡스 레넌이 재빠르게 몸을 피해 세리나를 부축했다. 그녀의 몸이 뜨거웠다.

“전하, 괜찮은 겁니까?”

“...아니, 전혀.”

세리나는 피식 웃었다. 클리스 로마나의 손톱으로 꿰뚫린 어깨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전쟁터에서는 적의 검을 꽂은 채로도 저녁까지 싸웠던 그녀다. 이건 분명히 보통의 부상이 아니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열이 순식간에 정수기 끝까지 솟았다.

“크...젠장.”

뜨거운 숨과 신음성이 터졌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몸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벡스 레넌은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감찰단 건물을 빠져나왔다. 막 건물로 진입하려던 기사들이 둘을 보고 쫓아오기 시작했다.

“저 병신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불쌍한 동료 기사들이나 구하라고!”

용병대장은 욕을 퍼부으며 세리나를 품안에 거의 들어올리다시피 안고 밤거리를 달렸다. 열 때문에 흐릿한 세리나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독...독인가.’

어깨 뿐이 아니라 몸 전체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그녀는 에스트레드를 생각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천천히 눈앞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정신 차려요, 리엔 경!”

벡스 레넌의 다급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세리나는 가물거리는 의식의 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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