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40화 (40/142)

<-- 의뢰 -->                세명은 감찰단 맞은편의 건물 위로 기어올라갔다. 말을 탈 필요도 없었다. 게오르그 상단의 비밀 지소와 연결된 큰 삼층 상점 건물이었으니까. 과연 돈이란 좋은 것이다. 수도 시내 한가운데 공공기관 건물과 얼굴을 맞댄 상점이므로 이 건물의 시가가 대체 얼마나 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요즘 부동산 가격 감을 잡기 힘든 세리나는 머리를 굴려보다가 포기했다.

건물 지붕에 엎드려서 아래쪽을 살피던 밀렌 바스트가 턱을 괴었다.

“자정에 교대한 밤근무조가 지금쯤 가장 졸릴 시간이겠군.”

새벽 두시. 밤이 가장 깊고 사람의 몸이 늘어질 시간이다. 아무리 교대근무라지만 밤에 인간의 육체가 제정신이 아닌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감찰단의 경비병들은 밤근무 때 쓰는 작은 초소 안에 들어가 앉아있었다. 똑바로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가끔씩 고개가 기울어져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털고 나오는 시간은 십분 이내다. 경비병들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감찰단 소속 기사들이 출동하면 꽤 곤란해져. 지지야 않겠지만 우리 정체가 들통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아까 죄수를 어떻게 탈옥시키냐며 그렇게 꺼림칙해 하시던 분 맞습니까? 뭔가 신나신 것 같은데요.”

“그럴리가.”

세리나는 빛나는 금발을 꼼꼼히 틀어올리고 그 위를 검은 야행복 두건으로 완벽하게 가렸다. 머리카락 한올 나오지 않게 가려버린 후 입가에 마스크까지 쓰자 그녀는 성별을 알 수 없는 야행인이 되었다.

“이왕 하게 된 거라면 적극적으로 하자는 게 내 주의지.”

“그리고 뭐 사실 군인이 목표 달성하는 데 방법 가릴 게 있나.”

밀렌 바스트가 맞장구를 쳤다. 용병대장은 콧방귀를 꼈다.

“하여간 높은 분들 말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 못따라가겠습디다.”

“따라오라고 한 적도 없어.”

황자비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그녀는 한 다리를 난간에 짚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감찰단 기사들은 건물 뒤편 숙소에서 생활한다. 밀렌이 그림자 알람을 자극하지 않고 도나 누앤을 빼올 거니까 일단 오분 보다는 늦게 소집할거야. 그 이하는 경비병들이 처리할 수 있는 소란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갑옷을 입고 뛰어나오는 것도 오분은 걸린다. 도합 십분.”

“경비병이 삼십분마다 감옥의 죄수들을 체크합니다. 하지만 중앙계단 쪽 비상이 걸릴 경우 가장 아래층의 문을 잠가버리고 거기에 철문을 덧씌우죠. 그러면 최소한 레이디 도나 누앤이 빠져나간 사실은 내일 아침에나 알게될 겁니다. 밀렌 바스트 경의 도주 시간도 충분히 벌게 됩니다.”

“그림자 마법 때문에 최하층 경비에 신경을 덜 쓴다 이거지. 어차피 황후의 마법이 막아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밀렌 바스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림자 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저 신출귀몰하고 존재감이 적은 기사라고 여겨질 뿐이었다. 애초에 무력과 마력을 함께 쓰는 존재란 이 시대에 극히 드문 존재였다.

“내일 아침 도나 누앤이 사라진 걸 안다고 해서 수사 선상에 밀렌 네가 올라갈 일은 없을 거다. 네 능력을 아는 건 황자 전하와 나 정도니까.”

“저기, 저도 있습니다만.”

벡스 레넌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세리나는 턱을 두드렸다.

“밀렌은 하수도로 도주해서 어디로 갈 건가?”

“서부 지소로 간다. 레이디 도나 누앤의 몸 상태가 여의치 않으면 이곳으로 와야 하겠지만.”

“그럼 우리는?”

“각자 알아서 도망치죠. 자기 한몸 건사 못할 사람들은 아니잖습니까.”

무책임한데 맞는 말이었다. 황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나와 마찬가지로 온몸에 검은색을 두른 벡스 레넌이 두건을 올려썼다. 그의 검은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자, 이제 가죠. 기다린다고 해서 쟤들이 완전히 잠들어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밀렌의 몸이 스르륵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세리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지금부터 시간 카운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저 양반 꼭 저렇게 사라져야되나...지금은 좀 평범하게 해도.”

“말이 많아. 닥치고 따라와라.”

세리나가 먼저 건물옆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철제 계단 중간중간을 밟으며 단숨에 내려온 그녀는 고양이처럼 조용하게 건물 옆으로 붙었다. 환한 불빛 속 초소 안의 경비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인명 피해는 최소한으로 해라.”

황자비가 낮게 명령했고 용병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최대한 사람을 죽이지 말되, 필요하다면 죽이라는 뜻이 숨어있었다.

“최대한 시선을 끌되, 퇴로를 유지하도록.”

먼저 뛰어나간 것은 세리나였다. 뱀처럼 고요하고 빠르게 초소로 접근한 그녀는 검의 자루로 졸고 있는 경비병의 뒤통수를 쳤다. 너무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가 되어버려서 세리나는 일부러 발로 걷어차 임시로 된 천막 초소를 넘어뜨려버렸다. 우당탕하며 큰 소리가 났다. 최대한 소란을 벌여야 했다. 공격은 이쪽이고, 물밑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누구냐!”

“무슨 일이야?!”

그곳에 용병대장이 뛰어들었다. 장신인 그가 자신의 클레이모어를 하늘로 치켜든 채 울부짖었다.

“누구겠냐! 누구겠어! 니네 수사에 불만을 품은 민원인이시다! 제국 수도 시민이시다!”

우렁차게 소리를 지른 벡스 레넌이 달려오는 경비병들의 하복부에 자신의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꽂아넣었다. 다행히 검집을 빼지 않은 채였지만 일반인의 가슴께에 닿을 정도로 큰 철제 몽둥이에 풀스윙으로 맞은 꼴이 된 경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감찰단 건물 1층에서 당황한 경비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사를! 응! 그꼴로 해놓고! 걸레쪽같은 것들! 가만 둘줄 알았냐!”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 매 한대다. 세리나 역시 검집을 뽑지 않고 사내들을 패면서 약간 질린 기분으로 벡스 레넌을 쳐다보았다.

“옆집! 마틴 새끼가! 우리 마누라! 속옷을 훔쳐갔는데! 응!”

눈감고도 경비병 백이라도 잡겠지만 저 정도의 소란은 무리였다. 애초에 그녀의 검술이 속도와 은밀함에 치우쳐 있어 더할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벡스 레넌은…

“내가 아무리! 그 새끼 코뼈를 부러뜨렸기로서니! 그게 죄라니! 니네가! 사람이냐!”

정말 한편이고 싶지 않았다.

“진상 민원인이라고 들어는 보았냐 이 공무원들아!”

용병대장이 포효했다. 임무 수행중임에도 쪽이 팔려서 세리나는 잠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같은 편이 아니라고 어필해볼까를 고려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그녀는 입을 다물고 경비병들의 숫자를 줄이는 데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퍽, 퍽, 퍼벅.

“윗 사람 나오라고 그래!”

남자가 클레이모어를 수평으로 들고 불도저처럼 경비병 넷을 한꺼번에 밀고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진상 부리는 것에 맛이 들려 본인이 안쪽 통로를 맡은 것을 까먹은 모양이라 세리나는 한숨을 쉬고 감찰단 건물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쏟아져 나오던 경비병들이 중앙 계단으로 돌격하는 검은 인영을 보고 경악해서 그녀를 막으려 했다. 세리나는 사내 한명의 멱살을 잡아 패대기치면서 동시에 다른 이의 정강이를 걷어차 뼈를 부러뜨렸다. 인명 살상을 하지 않기 위한 자비로움이었지만 아픈 건 똑같다. 삽시간에 그녀의 주위로 비명을 지르며 구르는 사내들로 가득찼다. 달려드는 경비병의 관자놀이를 손날로 쳐서 기절시키며 그녀는 처음으로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롱소드에 검기를 약간 돌려서, 황자비는 중앙 계단 첫번째 철문에 검격을 가했다.

지잉하는 신경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그린 듯 잘려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감찰단 전체에 삐익하는 경보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붉은 불의 알람도 동시였다. 저 안쪽, 깊은 곳에서 육중한 철문이 내리닫히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일단 저게 닫혔으니 밀렌 바스트 쪽은 도주 시간을 벌었다. 이제 그녀와 벡스 레넌이 도망나가기만 하면 됐다. 밖에서는 여전히 용병대장이 진상을 부리며 윗사람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물론 끝없이 쏟아지는 경비병들을 열심히 기절시키며. 아무래도 오늘 밤의 소란은 옆집 마틴과 싸움이 붙은 진상 용의자의 한바탕 소란으로,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비웃음 당할 것 같았다.

세리나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칠분이 지나 있었다. 이제 빠져나가도 된다. 그녀는 달려오는 경비병 한명을 마저 기절시키고, 저 멀리서 덜덜 떨며 차마 덤비지 못하고 있는 사내들에게 미안함을 담아 손을 흔들었다. 아마 저들은 최소 감봉 대상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정치 죄수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세리나의 등이 빳빳하게 굳었다. 불길한 감각이 소름끼치게 등을 타고 달렸다.

“여기서 볼 줄이야...오랜만인데.”

남자의 목소리는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신중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몸이 꿰뚫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거대한 적발의 남자, 클리스 로마나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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