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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39화 (39/142)

<-- 의뢰 -->                문 안으로 이어진 계단은 밑으로 향했다. 원목으로 된 묵직한 느낌의 계단은 바깥의 먼지 뽀얗게 앉은 방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손때 묻은 계단 난간으로 미루어보아 상당히 오래된 건물이라는 게 느껴졌다.

지하 지소는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두텁게 카페트가 깔린 바닥, 색이 짙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장과 책상. 벨벳 소파 역시 색이 어두웠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샹들리에 불빛에 그녀와 벡스 레넌의 그림자가 흐리게 졌다. 게오르그는 상단이지만 동시에 에스트레드의 사조직이기도 했다. 이런 비밀 지소가 있는 것이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에스트레드 전하는 지금 어디 계시지?”

에스트레드가 이곳에 있으리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물어는 봐야 했다. 벡스는 그녀가 며칠간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보고했지만 지금 현재 상황을 알리지는 않았다고 했으니 아마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 말고...본인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전하만 하실 수 있는 일?”

책상에 놓인 지도와 메모를 가져오면서 벡스 레넌은 혀를 찼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고 계실까요, 마계에 데려다 놓아도 사지 멀쩡히 살아오실 양반인데.”

“그냥 궁금할 뿐이야. 수호기사로서 전하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내 일이니까.”

“수호기사 때려친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직업 황자비이신 걸로 아는데요.”

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그렇지.”

벡스 레넌이 눈을 찌푸렸다. 그는 가타부타 더 말 없이 지도와 메모를 내밀었다.

“훑어봅시다. 감찰단 지하 감옥의 구조도와 경비 상태입니다.”

“재주도 좋군. 이런 건 언제 구했어?”

“용병길드를 뭘로 보는 겁니까? 이 정도 정보 쯤이야 앉아서도 주워먹어요.”

“산 건가?”

“사다뇨. 물론 정보를 매매할 때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병 길드원들이 솜씨 좋게 빼내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찰단은 수사조직이야. 위험한 죄수가 수감되어 있는 곳인데 이런식으로 정보가 막 흘러나오다니… 나중에 감찰단을 한번 감사해야겠군.”

“진짜 군 관료시네요. 어휴 꽉 막혀서는.”

용병대장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어 투덜거렸다. 세리나는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라기보다는 설계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감찰단의 층수와 각 층의 구성, 내려가는 길목과 창문 갯수, 경비병의 위치와 숫자, 교대시간까지 적혀져 있었다. 중죄를 지은 죄수들이 거의 다 수감되어있는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감옥 중 하나다. 정말로 보안 담당자를 크게 혼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세리나는 아주 세게 혀를 찼다.

“감찰단 자체 건물의 문은 정문, 후문과 옆문 두개까지 총 네개지만 건물 밑 지하 감옥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는 하나 뿐입니다. 중앙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 뿐이죠.”

“알아, 거기다 중간문은 철문 아닌가?”

“맞습니다. 경비병은 두명 씩 양 옆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지하감옥으로 내려가면 열명 정도가 한꺼번에 대기하고 있죠. 교대는 세차례로 아침 여덟시, 오후 다섯시, 밤 자정.”

남자는 손가락으로 설계도의 지하 감옥 맨 아래를 가리켰다.

“게다가 황후 폐하의 은혜로우신 마법으로 맨 아랫층에는 그림자 알람까지 걸려있다고 하더군요. 완전히 어두운 감옥 속 빛이 들어 조금이라도 그림자가 물러나면 감찰단 전체에 경보가 발령되는 시스템이죠.”

“....”

“그뿐 아니라 그곳에는 트랩도 있어요. 빛이 없는 한 감옥에 갖힌 수감자는 그림자에 손발이 묶여 꼼짝도 하지 못해요. 아무리 강한 자든 상관 없이.”

세리나는 턱을 매만졌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용병대장을 쏘아보았다.

“일단 나를 끌고 온 이유는 알겠어, 이 정도면 아무리 자네라도 혼자 레이디 도나 누앤을 끌어내는 건 불가능하겠는데.”

“아니 뭐 그건 일단 황자비 전하에 대해 저의 호감이 작용한 결과고…”

“헛소리 말고 설명이나 계속 해.”

“묘하게 저한테만 거치시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에스트레드에게만 부드럽다고 하는 게 정답이다.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세리나는 생각에 잠겨 설계도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 도나 누앤은 맨 아래층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거지?”

“맞습니다. 탈출의 위험이 있는 특급 죄수들이 수감되는 독방에 말이죠.”

그건 좀 이상했다. 물론 감찰단의 감옥은 처벌이 결정되기 전의 죄수들이 수감되는 곳이지만 맨아래층 쯤 되면 반란의 수괴 쯤 되지 않으면 갇히지 않는 곳이다. 그만큼 삼엄한 경비와 혹독한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레이디 도나 누앤이 살아있을지가 일단 의문인데.”

세리나는 가느다랬던 그 여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용병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황자 전하께서는 일단 아무 말 말고 데려오라고 하시더군요.”

“...”

그녀는 말없이 설계도를 손끝으로 훑었다. 경비병들의 위치가 표시된 곳을 손으로 스칠 때 벡스 레넌이 히죽 웃었다.

“전하께선 경비병들을 맡아주셔야 겠습니다. 밑의 감옥은 제가 돌파할테니.”

“경비병들의 목이라도 베라고?”

“안베고도 가능하시잖아요. 뭘 새삼스레.”

“돌파해서 뭘 어쩌려고?”

무력으로 돌파한다면 안될 것도 없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로마나 황족들을 제외한다면 일반 인간들 중에서는 극한으로 강한 두 사람이었다. 경비병들의 인명 피해까지 수반하며 탈출을 시키고자 한다면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두 사람만큼 강한 이가 별로 없다는 건 그만큼 정체 들키기가 쉽다는 뜻도 된다. 용병대장과 황자비 조합의 범죄자라니 그보다 유명할 수도 없겠다.

“다 좋아. 경비병을 내가 끌어내고, 자네가 맨 아랫층까지 돌파한다 쳐. 그림자 알람이 울리는 순간 감찰단의 기사들 전원이 소집할 텐데 내가 알기로 기사 소집 시간은 채 5분이 안된다. 그 시간 안에 정체를 들키지 않고 도나 누앤을 데리고 도망칠 수가 있다고?”

“우리 둘로는 힘들죠.”

의외로 용병대장이 쉽게 인정했다. 그럼 대체 무슨 소리야, 라고 세리나가 투덜거렸다.

“어차피 내가 함께 갈 거니까 염려하지 마, 세리나.”

방안 샹들리에의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마치 거짓말처럼 남자 한명이 몸을 일으켰다. 세리나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네가 있을 줄 알았다, 밀렌.”

*****

“와- 재미없어. 뭐 놀라지도 않으십니까, 전하.”

벡스 레넌이 투덜거렸다. 세리나는 어처구니 없는 놈을 보겠다는 얼굴로 응대했다.

“그림자 기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게 십년이다. 흔들리는 그림자 안에는 항상 밀렌이 있다고 보는 게 맞지. 기척이 없는 자이기는 하지만 상대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게 몸을 숨기는 데 훨씬 안전하니까.”

“경험 많은 기사를 무시했군, 대장.”

밀렌 바스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세리나가 손뼉을 쳤다.

“자, 그럼 대충 그림이 짜여지는군. 내가 경비병을 끌어내고, 벡스 레넌이 중앙 계단을 돌파하고, 그 사이에 밀렌이 도나 누앤을 끌어올린다.”

“끌어올리는 건 내 특기가 아냐, 가라앉혀서 밑으로 간다.”

의아한 얼굴의 황자비를 향해 밀렌은 설계도 맨 밑바닥을 짚었다.

“맨 아래층에는 하수도가 연결되어 있다. 그림자 알람과 트랩 덕분에 다소 경계가 약해진 덕분이지. 사실 수도 전체의 하수도망 위에 건설된 건물이라 함부로 수도를 옮길 수도 없었고. 철창을 베어낼 필요도 없이 배수구만 잘 타고 내려가면 하수도로 연결된다.”

“오호라. 그렇다면…”

“위에서 삼분의 시간만 끌어라. 그림자 알람은 울리지도 않게 하고 빼내올 테니까.”

밀렌 바스트는 그림자 마법에 기초를 둔 마검사였다. 그는 그림자 속에 숨어 기척을 숨기고 이동하거나 아무런 빛이 없는 곳에서도 활동이 가능했다.

“좋아, 밀렌이 참여한다니 성공 확률이 획기적으로 올라갔군.”

“저를 꽤 못믿으시는 거 같은데, 황자비 전하…”

“너는 못믿겠고, 밀렌은 믿음직스럽다. 됐지? 자 이제 복면과 야행복이나 가져와.”

벡스 레넌의 불퉁한 목소리를 잠재우면서 세리나는 손을 내밀었다. 벡스 레넌이 한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고집이 세시네요.”

“남의 말을 하는 건가?”

용병대장은 책상 위의 은종을 울렸다. 작은 쪽문이 열리고 등이 굽은 관리인이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그가 건네는 검은 복면과 야행복은 두벌 뿐이었다.

“나는 알다시피 필요가 없으니까.”

밀렌 바스트는 어깨를 으쓱했고 세리나와 벡스 레넌은 야행복으로 갈아입었다. 지나치게 여인의 티가 나는 몸을 내려다보다 그녀는 붕대를 요청해서 몸통에 둘렀다. 완전히 일자가 된 몸 위로 검은 옷을 입자 세리나의 몸은 마치 소년 같은 모양새였다.

“검도 하나 내놔, 롱소드로.”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르는데 나이프를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검기도 자제해야할 것이다. 그녀는 벡스에게서 롱소드를 받아들고 허리에 검을 찼다.

“더 늦어졌다간 날이 밝겠어, 이제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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