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뢰 --> “좋아요, 그렇게 나오셔야지.”
벡스 레넌이 손뼉을 짝 쳤다. 그의 뒤에 있던 남자들은 어느새 도망치고 없었다. 세리나는 그의 텅 빈 뒤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부하들 다 도망갔는데.”
“어차피 걔들은 있어도 도움이 안돼요. 치고 빠질 때를 아는 거지.”
“용병의 미덕이라는 건가.”
“정답.”
용병과 군인은 근본부터 자세가 다르다. 군인으로서 결코 전우를 뒤에 두고 도망친 적 없는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에스트레드 전하의 의뢰라니 어디로 뭘 하러 가는 거지?”
“그건 도착해서 말씀드리죠.”
“이봐.”
“쉽게 알려드리면 재미 없잖아요?”
황자비는 팔짱을 끼었다. 그녀의 녹안이 음울하게 빛났다. 여자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봤다가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적당히 해라. 지금 네 시답잖은 장난에 어울려줄 여유는 없으니까.”
낮은 목소리의 평이한 말투였지만 벡스 레넌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정말 칼을 뽑을 수도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수호기사 세리나 리엔은 고지식하고 차분하지만 임계점을 넘으면 혈기가 폭발하는 기사였다.
“뭐...일단 나가시죠.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남자는 등을 돌려 훌쩍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따르며 세리나는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지, 애초에 왜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가는 길, 1층 로비 카운터는 텅 비어 있었다.
말을 타고 향한 방향은 수도 정중앙 쪽이었다. 밤이 늦어 고요하고 어두운 골목 속에 다그닥거리는 두 사람의 말발굽 소리만 울렸다. 소리가 클까 전력질주는 고사하고 겨우 속보 정도로 달리는 말 등 위에서 세리나가 이제 그만 이야기나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계속해서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던 벡스 레넌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거 말로 하세요. 되게 쏘아대시네.”
“지금 진짜 검기로 쏴버리고 싶으니까 빨리 말해.”
“하여간…”
벡스는 혀를 찼지만 곧 세리나의 냉랭한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감찰단으로 갑니다.”
“...감찰단?”
순간 세리나는 이게 벡스 레넌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했다. 오르젤 로마나 살해 사건 때문에 그녀는 감찰단이 아직 좀 꺼려졌다. 그곳은 밸러스 대공이 장악한 조직이었다. 레드포 로마나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짓 증언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오르젤 로마나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은 세리나 리엔 자신이었으니까.
“목적은?”
“구할 사람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구한다기보다는...일단 탈옥시킨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긴 한데.”
“탈옥?”
황자비가 멈칫 말을 세웠다.
“전하께서 죄수의 탈옥을 명하셨다고?”
그녀는 평생을 국가의 녹을 먹으며 군인이자 기사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무리 대공의 영향력 하에 있다지만 국가 수사기관인 감찰단에서 죄수를 탈옥시킨다니. 에스트레드라면 필요한 경우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명할 사람이었지만 세리나는 망설여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왜요, 꺼려지십니까?”
벡스 레넌이 자신도 말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왔다. 세리나는 심각한 얼굴로 눈썹을 모았다.
“뭔가 대단히 필요한 사람인 모양이군...전하시라면 불필요하게 명을 하시진 않았을 테니.”
“누군지 궁금하시죠?”
“일일이 묻지 말고 말이나 해.”
세리나 리엔의 불쾌감이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을 감지한 용병대장은 헛기침을 하면서 턱을 긁었다. 세리나의 성격을 여기서 더 긁어봤자 재미는 없을 것 같았다.
“하여간 누가 붉은 에메랄드 아니시랄까봐 성격 급하시기는…”
“고리고짝 옛날 별명이야.”
전쟁터에서 그녀를 따라다녔던 이름. 세리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안좋은 기억이 불러내지는 것 같았다.
‘붉은 에메랄드.’
녹색 눈을 지닌 철혈의 여기사. 얼음을 다루는 제1황자의 곁에서, 검을 들고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적을 학살했던 금발녹안의 세리나 리엔을 아군과 적군 모두 두려움을 담아 그렇게 불렀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금도 그 이름은 유령처럼 그녀의 뒤를 쫓았다.
“옛날이라고 해도 전쟁이 끝난 건 불과 삼년 전이죠. 동부 내란이 지속된 기간만 삼년이 넘었으니까 뭐 그렇게 고리고짝은 아니고.”
벡스 레넌은 용병대장으로서 용병들을 조직하여 에스트레드의 군으로 참전했다. 황제는 제1황자를 동부 내란 진압 현장의 최선봉에 세우면서 변변한 군대조차 지원해주지 않았다. 그때 에스트레드가 선택한 것은, 막 성장하고 있던 게오르그의 자금력을 최대한 빼내 용병 대장과 거래를 하는 방법이었다.
꼬박 삼년간 벡스 레넌은 황자와 수호기사들 곁에서 전쟁을 치러냈다. 그래서 그는 전장에서의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붉은 에메랄드라는 별명 역시 각별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밤하늘 아래 녹색눈의 여자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벡스는 어깨를 으쓱했다가 답했다.
“우리가 구하러 가는 건 레이디 도나 누앤입니다. 레드포 로마나의 전 반려.”
“...레이디 도나 누앤?”
세리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잠시 엉켜드는 것이 느껴졌다.
도나 누앤이라면 레드포 로마나가 내친 지 불과 몇주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레드포의 황궁에서 보았을 때 그녀의 상태가 처참했으니 지금쯤 완전히 사람의 형상이 아닐지도 몰랐다. 오르젤 로마나의 살해용의자로 감찰단에 넘어왔다는 건 밸러스 대공의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뜻이고, 대공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반쯤 미쳐있었다. 오르젤 로마나의 강간 피해자가 될 뻔한 시녀도 고문을 했던 인간이니 살해 용의자인 도나 누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왜?”
“글쎄요.”
생각 후 간신히 나온 물음에 벡스 레넌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세리나는 이해했다. 사실 도나 누앤을 소리 없이 빼올 수 있다면 가장 필요한 존재이긴 할 것이다. 레드포 로마나의 황궁 가장 깊은 곳에서 그에게 고통 받던 가장 핵심 인물 아닌가.
“그런데 그 레이디 도나 누앤을 간단히 탈옥시킬 수 있게 해놨을 거 같아?”
일단 지금은 그 부분이 문제였다. 레드포 로마나도 밸러스 대공도 도나 누앤이 가장 위험한 취약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경비가 보통이 아닐텐데 걸리지 않고 그녀를 탈옥시킬 수 있느냐는 건...사실 거의 불가능일 것이다.
“그렇죠. 사실 그 부분은 대단히 문제니까.”
벡스 레넌의 간단한 대답에 세리나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런데 이렇게 단 둘이, 그것도 얼굴을 보이면 대번에 정체가 들통날 유명인사 둘이서 탈옥을 진행하자고? 무슨 생각이야?”
“하지만 의뢰 진행할때 어중간한 서른 명보다 밥값 하는 둘이 나으니까요. 뭐, 우리 둘보다 밥값 잘하는 사람을 수도에서 찾자면 그렇게 많지 않을걸요.”
벡스 레넌은 다시 말을 출발시켰다.
“일단 갑시다. 어차피 수도 중앙쪽 게오르그 소유의 지소에서 간단히 브리핑은 할테니까요.”
“브리핑까지...간단하게 동참할 문제가 아니었던 거잖아.”
“당연하죠. 로마니엔의 제1황자가 수도의 용병대장에게 단독의뢰를 맡긴 사안인데, 쉬운 부분일 리가 없잖아요?”
벡스 레넌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뭔가 당한 기분에 황자비는 뒷목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효율을 따지던 용병대장은 돈 한푼 내지 않고 제1황자의 전 수호기사를 하룻밤동안 고용해버린 거나 마찬가지인 꼴이 되었다. 불만때문에 자꾸 모아지는 눈썹을 숨기면서, 그녀는 용병대장을 따라 말을 달렸다. 밤 하늘 아래 조용한 자정의 수도 거리, 말 두마리가 돌 바닥 위로 다그닥거리며 달려가는 소리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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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상점은 당연히 문이 닫혀 있었다. 건물 옆으로 돌아간 벡스는 쪽문을 열었다. 삐걱대며 열리는 문은 오래 쓰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더럽지만 들어가시죠. 곰팡내도 나고, 황자비 전하께는 좀 그렇겠지만.”
세리나는 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건조한 공기 속으로 곰팡이 냄새가 매캐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지소에 상주자가 있는 모양이지?”
“...이 먼지 많은 문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지만 문틈 사이에 거미줄이 없지.”
오랜 기간 닫혀있던 문틀에 거미줄이 없을 리 없다. 곰팡내나 먼지는 일부러 손을 대지 않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거미줄은 그렇지 않다. 세리나는 공들여 유지되는 것이 분명한 낡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것 같은 실내. 하지만 그녀는 물끄러미 용병대장을 바라보았다.
“자, 빨리 비밀 문이나 열어.”
“하여간 경험 많은 기사는 까다로워요. 지소 관리자에게 거미줄도 구해다가 문틀에 걸쳐놓으라고 해야겠군.”
벡스는 투덜거리며 검게 재가 쌓인 벽난로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레버를 잡아당기자 벽 한면을 덮고 있던 책장이 위로 올라갔다. 세리나는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다.
“이래서 문이 열린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던 거군. 바닥에 마찰이 있었다면 당연히 흔적이 남았을 텐데.”
“그런 거 관찰하고 있지 말라구요.”
용병대장은 먼저 열려진 검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세리나 리엔도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